트럼프 1기 안보보좌관 "중국에서 분명히 '권력 교체' 일어나고 있다"
후임자로 왕양 거론…'군부 권력' 이미 장유샤에게 넘어갔다는 분석도
6월27일 트럼프 1기 행정부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마이크 플린이 흥미로운 글을 올렸다.
플린은 "중국에서 분명히 권력 교체가 일어나고 있다"며 "중국 지도부 교체의 결과는 매우 심각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장유샤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의 사진을 전면에 내걸었다.
이튿날 버뮤다 총영사를 지냈던 그레고리 슬레이턴은 뉴욕포스트에 "건강이 안 좋은 시진핑 총서기가 오는 8월에 열릴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물러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그동안 일부 중화권 매체와 해외 반중 논객을 중심으로 떠돌던 '시진핑 실각설'이 본격 확산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중국 정보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미국에서 전직 고위 관료가 직접 언급한 무게감 때문이다.
슬레이턴이 밝힌 내용은 구체적이었다.
후진타오 전 총서기를 비롯한 공산당 원로들이 시진핑의 실각을 후원하고, 공청단파 출신의 개혁파인 왕양 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시진핑 자리를 대체할 것으로 예측했다.
또 군부 권력은 이미 장유샤에게 넘어갔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듯한 움직임이 최근 일어났다.
7월3일 리커창 전 총리 70번째 생일을 맞아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장문의 논평을 실었다.
제목은 '당과 인민을 위한 사업에 평생을 분투하다'로 첫 소제목이 '공청단 사업을 당과 국가사업에 복무시키는 데 힘썼다'였다.
그는 2023년 사망했는데, 한때 시진핑과 최고 권좌를 두고 겨뤘다.
특히 같은 공청단파 출신인 후진타오가 리커창을 밀었다.
하지만 태자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시진핑이 최종 승리했다.
ⓒChat GPT 생성이미지
"건강 안 좋은 시진핑 8월 물러날 가능성"
2002~12년 후진타오 집권기에 중국 지도부는 크게 3개 파벌이 권력 균형을 이루었다.
장쩌민 전 총서기가 형성한 상하이방, 공산주의청년단에서 경력을 쌓은 공청단파,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한 공산당 고위 인사들의 자녀인 태자당이 그것이다.
시진핑이 개혁·개방 이후 네 번째 중국 최고지도자가 됐던 결정적인 배경에는 그에게 힘을 실어준 상하이방이 있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2006년부터의 중국 권부 역학관계를 살펴야 한다.
그해 9월 상하이시 당서기 천량위가 돌연 낙마했다.
이유는 부정부패 혐의였다.
천량위는 2002년 장쩌민이 총서기에서 퇴임하면서 심어놓은 상하이방 미래 주자였다.
1970년 이래 오직 상하이에서 근무해 상징성도 컸다.
이런 천량위를 후진타오는 부패 척결을 명분으로 제거했다.
집권 이후 숙청한 관료 중 최고위직이었다.
2007년 공청단파와 상하이방이 차기 최고지도자를 선출하는 문제로 암투를 벌였다.
같은 해 열리는 제17차 당대회에서 후계자가 지정되기 때문이다.
이는 덩샤오핑이 만든 격대지정(隔代指定)으로, 다음이나 다다음 세대의 지도자를 미리 낙점하는 것이다.
덩샤오핑은 종신 집권한 마오쩌둥 1인 독재의 피해를 혹독하게 겪었다.
따라서 독재자 출현을 방지하기 위해 격대지정을 고안했다.
그 덕분에 장쩌민 집권기에 후진타오를 차기 지도자로 낙점해 장쩌민의 장기 집권을 사전에 막았다.
격대지정에 따라 2007년에 차기 지도자를 뽑아야 했다.
후진타오는 후계자로 리커창을 후원했다.
그러나 상하이방은 시진핑을 추천했다.
이 아이디어를 냈던 사람은 국가부주석 쩡칭훙이었다.
쩡칭훙은 상하이방이자 태자당이었다.
같은 태자당인 시진핑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당시 시진핑은 중앙 정계에서 존재감이 없었다.
아버지가 개혁·개방 이후 공산당 8대 원로이자 부총리를 역임한 시중쉰이었으나 지방직을 전전했다.
하지만 시진핑은 오랫동안 푸젠성에 근무하면서 뚜렷한 성과를 거뒀다.
반면 리커창은 허난성과 랴오닝성 당서기로 일할 때 별다른 업적을 쌓지 못했다.
쩡칭훙은 이 점을 파고들었고, 상하이방과 태자당이 합세해 시진핑을 차기 지도자로 낙점했다.
그래서 시진핑은 공석 중인 상하이 당서기에 임명됐고, 제17차 당대회에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됐다.
리커창도 상무위원으로 승진했지만, 서열은 시진핑이 높았다.
2010년 시진핑이 중앙군사위 부주석 자리까지 꿰차면서 후계자 경쟁에서 완전히 승리했다.
2012년 제18차 당대회에서 후진타오는 뜻밖의 선택을 했다.
총서기뿐만 아니라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시진핑에게 물려줬다.
중국에서 최고지도자는 공산당 총서기, 국가주석, 중앙군사위 주석에 오르면서 당·정·군을 장악한다.
덩샤오핑은 한 번도 총서기나 국가주석에 오르지 않았지만, 중앙군사위 주석으로 재임하면서 중국을 대표했다.
1990년에는 퇴임해 공식 공직을 마감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마오쩌둥의 말처럼 중국에서 군권을 차지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렇기에 장쩌민은 2002년 공산당 총서기와 국가주석 자리를 이양한 뒤에도 2005년까지 중앙군사위 주석으로 재임하며 후진타오를 견제했다.
후진타오는 당·정·군을 모두 장악한 뒤에야 상하이방의 천량위를 숙청했다.
이런 전례가 있었기에 후진타오도 중앙군사위 주석을 고수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후진타오는 덩샤오핑이 세운 불문율을 너무 따랐다.
모든 권력을 한꺼번에 물려줘 시진핑의 어깨에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 됐다.
이에 2012~22년 시진핑 집권 1기와 2기 내내 리커창과 공청단파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리커창의 권력은 최고지도부의 확고한 2인자였던 리펑, 주룽지, 원자바오 등 전임 총리에 비하면 초라했다.
결국 2022년 제20차 당대회에서 공청단파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을 1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공청단파 출신인 리커창과 왕양은 당시 67세였다.
67세는 유임하고 68세는 은퇴한다는 공산당 관행에 따라 왕양은 상무위원에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진핑은 왕양마저 리커창과 함께 퇴진시켰다.
軍 넘어 당까지 번지는 시진핑 1인 체제 균열
슬레이턴이 왕양을 차기 최고지도자로 지목하고, 인민일보가 리커창을 추모한 데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자리 잡고 있다.
리커창이 죽은 뒤 추모 열기가 고조되자 지난 2년 동안 당국은 리커창에 대한 언급을 억제했다.
따라서 이번 인민일보 논평은 굉장히 이례적이다.
논평은 리커창이 민주적 의사결정과 집단지도체제를 강조했다고 소개했다.
또 공급망 구조 개혁, 자유무역지대 설치, 빈곤 퇴치 등을 성취했다고 평가했다.
이는 시진핑 1인 독재 체제와 대비되고, 시진핑 집권기의 경제 성과를 리커창이 이뤘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중국 언론에서도 인민일보 논평을 크게 다뤘다.
하지만 현재 해당 논평과 관련 기사는 모두 삭제됐다.
외신에서는 수개월 전부터 군부에서 촉발된 시진핑 1인 체제의 균열이 공산당으로 확산하는 것이 아니냐고 평가한다.
물론 슬레이턴의 전망은 그동안 해외 반중 논객이 주장했던 내용과 다를 바 없다.
또 군부를 대표하는 장유샤와 공청단파는 그 어떤 접합점도 없다.
하지만 중국에서 시진핑 1인 체제에 대한 반발이 조금씩 터져 나오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됐다.
커지는 시진핑 실각설…美 전직 고위 관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