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철강사들, 미국 투자 러시…트럼프 '50% 관세' 경고가 불 지펴 현대제철·포스코, 전기로 제철소 신설…일본제철, 트럼프와 '직거래'로 반전 노려 미국이 세계 철강 지형의 중심으로 다시 떠오르며 글로벌 제철사들의 격돌의 장으로 변모하고 있다.
포스코와 현대제철은 8조원 규모의 미국 제철소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제철은 아예 미국 철강의 자존심인 US스틸을 인수하며 '미국 기업화'를 선언했다.
한일 철강사들이 일제히 북미로 달려가는 이면엔 단순한 시장 확대가 아닌 사활을 건 전략이 깔려 있다.
수출 대신 현지화로 전환하지 않으면 미국이라는 세계 최대 수요처를 잃을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서다.
과거 철강산업은 값싼 철강재를 본국에서 생산해 수출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업 형태였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조 바이든 전임 행정부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미국산 우선구매법(BABA·Buy America Build America)을 통해 직접 생산을 국가 전략으로 규정한 데 이어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 폭탄'을 다시 꺼내들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철강과 알루미늄에 25%의 품목관세를 부과한 트럼프 2기 행정부는 6월에 50%까지 또 인상했다.
ⓒChat GPT 생성이미지 보호무역주의가 바꾼 수출 공식 25% 관세 영향이 본격화된 5월과 6월에 한국의 철강 수출은 각각 12.4%, 8% 감소했다.
2018년 232조원 관세로 한 차례 충격을 받았던 철강사들에 이번 트럼프 정부의 관세 정책은 '현지화 없이 북미시장에 남을 수 없다'는 경고로 받아들여진다.
한국은 2018년 당시 관세를 수출 쿼터로 바꿔 피해를 줄였지만, 여전히 전체 수출 물량의 70%가량이 제약을 받는다.
일본은 관세 면제 대상에서 빠졌다가 뒤늦게 복귀했지만, 시장 내 입지 회복은 더딘 상황이다.
특히 트럼프가 재집권에 성공하면서 보호무역주의가 공고해진 상황에서 철강을 '전략자산'으로 관리하려는 미국의 기조는 바뀌지 않을 전망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기류를 가장 먼저 읽고 움직인 건 일본제철이다.
일본제철은 지난해부터 US스틸 인수를 위해 미 재무부와 접촉했다.
다만 당시 바이든 행정부와 노동계의 강한 반발에 부닥쳐 인수 계획은 좌초됐다.
하지만 미국 내 고용 유지와 친환경 설비 투자, 경영권 분산 등 새로운 조건을 내세우며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다시 인수 협상에 나섰고, 이번에는 양측 이해가 맞아떨어졌다.
결국 일본제철은 올해 초 US스틸을 약 15조원에 인수했다.
US스틸 인수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
124년 역사의 이 회사는 미국 산업화의 자존심으로 불리며 정치적 민감도를 지닌 자산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2028년까지 110억 달러를 추가 투자해 새 제철소를 짓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이번 투자는 단순히 미국 철강 업계 내 입지 확보 차원을 넘어 일본제철이 글로벌 자동차 업체와의 관계를 북미 현지에서 재정립하려는 의도도 깔려있다.
토요타, 혼다 등 주요 고객사들이 미국 내 공장 가동을 확대하는 가운데 이들과의 공급망을 긴밀히 잇기 위한 '포석'이라는 해석이다.
인수 과정에서 일본제철의 절박함도 드러났다.
일본제철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교감 속에 사실상 미국 기업이 되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황금주 보장, 미국 현지인 최고경영자(CEO) 선임, 현지 고용 및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투자, 본사 소재지 유지 등은 모두 '기업 귀화' 전략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미국은 외국계 기업의 투자를 유치하면서도 정치적 통제를 유지할 수 있는 구조를 요구했고, 일본제철은 전격 수용했다.
일본제철은 왜 이토록 많은 것을 내주면서까지 미국 시장 진출에 사활을 걸까. 답은 '내수 한계'와 '실적 급감'을 맞닥뜨린 일본 철강산업의 절박함에 있다.
일본제철은 올해 기준 순이익이 전년 대비 43%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지난해 순이익은 전년 대비 36%나 줄어들었다.
내수는 정체되고, 글로벌 수요에선 중국산 저가 제품에 밀리는 상황에서 미국만이 탈출구였다.
한국 철강사들도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현대제철은 지난 3월 루이지애나주에 연간 270만 톤 생산이 가능한 전기로 기반 일관제철소를 짓겠다고 밝혔다.
총 58억 달러(약 8조원)를 투자하고, 2029년 가동을 목표로 한다.
포스코도 합작 형태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북미 전기차 시장 대응에 나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산 수입품에 25%의 상호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한 4월3일 경기도 평택항에 철강 제품이 쌓여있다.
ⓒ연합뉴스 '충돌'보다 '공존' 택하나 이번 초대형 프로젝트는 단순히 제철소 하나를 짓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현대차그룹이 조지아주에 조성 중인 전기차 생산단지 '메타플랜트 아메리카'와 연계해 부품에서 완성차까지 현지 조달 체계를 갖추려는 '패키지 전략'이다.
현대제철은 이 공장에서 연간 120만 대가량의 전기차를 생산할 수 있는 자동차용 고급 강판을 근거리에서 실시간으로 공급할 수 있게 된다.
미국 내 전기차 보조금 요건인 북미산 부품 비중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포석이자 완성차·부품·소재사 간 밸류체인 내재화의 일환이다.
제철소 설립은 곧 현대차그룹 전체 공급망의 경쟁력 강화로 이어지는 구조다.
또한 북미 전기차 생태계 중심부에 현대차그룹이 '앵커 기업'으로 자리 잡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표면적으로는 한국과 일본 철강사가 공급하려는 제품군이 겹친다.
전기차용 초고강도 강판, 조선·인프라용 후판, 고강도·고내식 강재 등이 대표적이다.
일각에선 일본제철의 전면적 공세가 단순한 경쟁을 넘어 한국 철강 업계에 전방위적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철강 업계의 한 관계자는 "두세 회사가 미국에 공장을 추가로 짓는다고 해서 경쟁이 치열해지진 않는다"며 "오히려 미국 시장에서 서로 다른 고객군과 밸류체인으로 분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US스틸 인수처럼 상징적 거점 확보는 중요하지만, 이 한 건으로 시장 주도권이 좌우되진 않는다는 설명이다.
미국은 철강 수요 자체가 워낙 크고 자급률도 75~80% 수준에 불과해 여전히 연간 2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연간 철강 수요량도 약 1억5000만 톤으로 단일 국가로는 중국, 인도에 이어 세 번째다.
현대제철과 포스코의 '북미 드라이브'는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처럼 단기 효과는 없지만 IRA 보조금 요건 충족,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대응 등 장기 전략 면에서 유리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전기로 중심 설비를 신설하는 전략을 세운 까닭이다.
특히 전기로 기반의 친환경 설비는 EU와 미국의 환경 규제 강화 기조에 맞춰 향후 보조금 수혜나 탄소세 부담을 줄일 수 있는 강점을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