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기 확산과 기술·정보 환경의 변화가 새로운 차원의 핵위협을 불러오고 있다는 전문가들의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핵전쟁을 표현한 이미지.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핵무기 확산과 기술·정보 환경의 변화가 새로운 차원의 핵위협을 불러오고 있다는 전문가들의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 두 나라가 주도하던 핵 질서가 여러 나라가 핵무기를 보유한 다극 체제로 바뀐 상황에서 인공지능(AI)과 허위정보의 확산은 군사적 오판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는 것이다.
19일(현지시간)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따르면 세계 각국 간 무력 충돌 위험이 커지는 상황에서 ‘인류 종말까지 남은 시간’을 상징하는 ‘운명의 날 시계’는 자정을 불과 89초 앞두고 멈춰섰다.
시계가 처음 등장한 1947년 이후 가장 위태로운 수치다.
기후변화와 생물학적 위협 등도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지만 전문가들은 핵전쟁 위험이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인류 종말 시계' 자문단의 일원인 다니엘 홀츠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핵위험은 냉전 시기 과거 유산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지만 실제 전문가들은 위험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우려한다”고 말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인도와 파키스탄 간 무력충돌,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핵시설 공습 등 최근 벌어진 갈등은 모두 핵무장 국가가 얽혀 있는 분쟁이다.
여기에 중국의 군비 증강, 북한의 핵무기 고도화, 이란의 고농축 우라늄 생산, 인도·파키스탄의 핵무기 확대 움직임까지 겹치면서 핵 질서는 갈수록 불안정해지고 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정보 환경의 변화는 새로운 불안 요소로 대두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한 허위정보 유포, AI의 군사적 활용 확대는 각국 수장의 판단을 흐리게 하거나 군사 대응을 오판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핵전문가 매트 코르다는 “SNS를 통해 ‘이란이 핵무기를 완성했다’는 가짜 정보가 확산되면 대통령의 결정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지난 5월 인도와 파키스탄 간 무력 충돌 당시에도 양국의 전과를 과장한 허위 이미지와 영상이 SNS에 퍼졌다.
인공지능(AI)으로 생성된 공격 장면이 온라인에 확산되며 핵전쟁 우려를 키웠다.
다행히 미국의 외교 개입으로 나흘 만에 휴전에 이르렀지만 위기는 언제든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여전하다.
AI의 군사 활용이 핵무기 운용 판단에 미칠 영향도 주목된다.
최근 미국 국방부는 AI 기반 지휘통제 체계를 도입했다.
지난해 미 공군 전략사령관은 “AI가 핵무기 운용 판단을 가속화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오픈AI, 앤트로픽 등 주요 AI 기업들도 미국 정부와 국방 분야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 역시 AI를 군사 시스템에 통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최근 등장한 ‘AI 추론 모델’은 단순 임무 수행을 넘어 복합 판단까지 가능하다는 점에서 요주의 기술이다.
허버트 린 스탠퍼드대 연구원은 “AI가 전쟁 전략을 제안하는 의사결정 보조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이들 모델이 때때로 ‘환각(hallucination) 현상'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실제가 아닌 정보를 만들어내는 AI의 이러한 특성은 수많은 인명의 생사를 가르는 핵무기 판단에 잘못된 형태로 작용할 수 있다.
국가 간 신뢰도가 약화한 상황도 AI발 가짜정보의 위협성을 높인다.
냉전 시절에는 미국과 소련 과학자 간 비공식 소통 채널이 존재했으며 외교적 대화로 오판을 방지했다.
그러나 현재는 이 같은 비공식적인 소통 경로가 사라졌고 이스라엘과 이란 간 전쟁 등으로 공식 외교 채널도 마비되는 일이 잦다.
카렌 할버그 아르헨티나 바르세이로연구소의 교수는 “국제관계와 과학계 모두 협력보다 경쟁이 우선되는 분위기가 핵위기를 증폭시키고 있다”고 우려했다.
핵위험을 막기 위한 과학자들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14일(현지시간)부터 미국 시카고에선 핵무기 개발 80주년을 맞아 3일간의 국제학술회의가 열렸다.
회의에선 노벨상 수상자를 비롯한 세계 과학자들이 모여 핵전쟁 방지책을 논의했다.
AI의 군사적 함의에 대해 투명하게 공개하고 핵실험 중단 합의을 재확인했다.
미·러 간 ‘신전략무기감축조약(New START)’을 대체할 새로운 군축 협정을 추진해야 한다는 권고도 나왔다.
정치인들의 경각심이 제고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데이비드 그로스 시카고대 교수는 “2024년 각국 주요 선거에서 핵 문제는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며 “사회 전반이 핵위험에 대한 경각심을 상실한 상황이 더 큰 위기”라고 경고했다.
"AI와 허위정보, 핵전쟁 오판 부추겨"…전문가 우려 고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