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성모병원 산부인과 교수가 수술을 집도하고 있다.
서울성모병원 제공
실핏줄이 여기저기 터진 얼굴은 퉁퉁 붓고, 입술마저 갈라져 피가 맺힌 모습으로 언니는 천천히 말을 했었다.
"나는 이제 나이 든 여자들이 무서워. 어떻게 이 끔찍한 경험을 하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웃고 농담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자기 동생, 딸, 며느리들이 똑같은 고통에 놓이는 걸 모른 척 외면하고만 있을까."
첫아이를 낳으러 분만실로 들어간 후 언니는 충격적인 고통에 시달린 듯했다.
살면서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통증과 두려움 속에서 몇 시간을 혼자 갇혀 있다가 이제 죽는 것밖에 달리 도리가 없겠구나, 할 때쯤 아이가 나왔다고 했다.
소름 끼치는 그 고통이 아이를 볼 때마다 되살아날까 봐 겁이 난다고 말하는 언니는 울고 있었다.
오죽하면 산고(産故)라는 단어가 극한의 고통을 말하는 보통명사로 쓰일까.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린 나 역시 궁금했었다.
사람들이 적잖은 심리적·육체적 타격을 가슴에 새기고도 의연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힘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이제 우리는 그 비밀을 조금 들여다볼 수 있다.
1992년 이스라엘 히브리대 신경과학자 라파엘 메쿨람이 놀라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대마초 연구자로도 알려진 그가 대마의 향정신성 물질과 유사한 신경전달물질을 우리 뇌가 자체 생산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내면의 황홀경'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아난다마이드'라고도 불리는 '칸나비노이드'였다.
뇌에서 만들어진 칸나비노이드는 세로토닌, 도파민, 엔도르핀 같은 호르몬 활동을 조절한다.
이 물질이 우리 몸 안에서 유발하는 직간접 효과는 많다.
그중 눈에 띄는 게 진통과 진정 작용 및 단기 기억 상실이다.
뇌가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이 마법의 약물 덕에 우리는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크고 작은 슬픔과 고통, 모욕을 참고 툭툭 털어낸 후 아침이면 다시 일어나 오늘의 태양을 마주할 수 있는 셈이다.
위대한 발견 이후 뇌를 둘러싼 과학과 의학은 획기적으로 발전했다.
나아가 우리는 친구와 수다를 떨 때, 연고지 프로야구팀을 응원할 때, 아기의 해맑은 웃음소리를 들을 때 칸나비노이드의 지원을 받은 행복 호르몬이 퐁퐁, 솟아나는 원리를 알게 됐다.
망각을 더는 저주로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정밀하게 설계된 내 몸이, 나를 살리기 위해 상처 입은 경험과 감정을 걸러내는 숭고한 작업이 바로 망각임을 알고 있으므로. 실은 기억과 망각에 관한 학자들의 글 중 인상적인 게 있었다.
우리 몸에서 칸나비노이드 수용체가 가장 많이 분포된 곳이 자궁이라는 사실이다.
출산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으면···.
언니는 그 후 아이를 하나 더 낳았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잊고 싶은 것투성이인 이곳의 아름다움을 선명하게 가르쳐주는 존재가 나에게 생겼다.
이웃에 살며 불가해한 기쁨을 매일매일 뭉텅이로 선물하는 인생 16개월 차 내 친구는 그때 언니가 낳은 조카의 딸이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망각, 숭고한 작업에 관하여 [삶과 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