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AI의 지속적 발전은 컴퓨터가 연산을 어느 정도까지 감당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정재호 연세대 양자사업단장이 양자 컴퓨팅의 가능성에 대해 설명했다.
6월9일 서울 연세대학교에서 만난 정재호 연세대 양자사업단장이 양자 컴퓨터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시사IN 박미소
미국 IBM이 개발한 ‘퀀텀 시스템 원(IBM Quantum System One)’이란 컴퓨터가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컴퓨터(이하 ‘고전 컴퓨터’)가 아니라 이른바 ‘양자 컴퓨터’다.
지금의 ‘슈퍼 컴퓨터’로도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의 연산을 훨씬 빠른 속도로 수행할 수 있다고 한다.
대다수 시민들에게 아직 익숙하지 않은 양자 컴퓨터란 기술이 실험실을 뛰쳐나와 실용적 활용의 시작 단계에 이른 것이다.
연세대학교는 지난해 11월, 송도 국제캠퍼스에 설치한 양자 컴퓨터를 공개했다.
연세대로선 앞으로 형성될 국내 양자 기술 및 산업생태계에서 ‘허브’ 지위를 선도적으로 확보하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이 사업을 주도해온 연세대 양자사업단의 단장인 정재호 의과대 외과학 교수를 만났다.
양자 컴퓨터가 뭔가? 현재 사용 중인 PC, 스마트폰, 태블릿(‘고전 컴퓨터’) 등과의 차이는?
비유로 설명하겠다.
당신이 하늘을 비행 중인 항공기를 자주 보고 싶다고 치자. 그 확률을 높이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구름을 걷어내야 하나. 고성능 망원경을 갖고 다니면서 수시로 하늘을 바라볼까?
훨씬 좋은 방법이 있다.
비행기가 가장 많이 출몰하는 곳으로 가라. 공항 근처다.
인천공항 부근에선 거의 5분에 한 대씩 볼 수 있다.
맞다.
그런데 비행기 보는 것과 컴퓨터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나.
나는 당신에게 ‘비행기를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라는 문제를 제출한 셈이다.
그 정답을 찾기 위한 연산(계산)을 컴퓨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고전 컴퓨팅과 양자 컴퓨팅이 이 문제를 어떻게 푸는지 비교해보자. 고전 컴퓨팅이라면 서울 강남, 신촌, 대구, 광주, 춘천 등 수많은 지역을 ‘순차적으로 하나씩’ 방문(연산)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인천공항의 비행기 관측 확률이 가장 높다’는 정답을 찾게 된다.
양자 컴퓨팅에서는 수많은 지역의 비행기 관측 가능성을 한꺼번에(동시에) 고려한 뒤 인천공항의 확률이 가장 높다고 판단한다.
양자 컴퓨팅은 ‘정답의 확률이 가장 높은 곳으로 당신을 데려가는’ 기술이다.
연산량이 비약적으로 줄어든다.
고전 컴퓨터로는 하나씩 차례로 탐색하는데 양자 컴퓨터는 한꺼번에 처리한다니 연산량이 매우 줄긴 하겠다.
그 능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중첩(superposition)’ 같은 ‘양자 세계(원자 및 이를 구성하는 전자, 양성자 등 아주 작은 입자들의 세계)’의 물리학적 현상에서 비롯된다.
‘중첩’ 등의 ‘양자 현상’들을 잘 활용해서 알고리즘을 정교하게 설계하면 연산 속도를 엄청나게 향상시킬 수 있다.
양자 세계는 극미(極微)하지만 너무나 큰 세상이기도 하다(편집자 주: 이후 10~20년 안으로 양자 컴퓨팅의 연산 속도가 특정 부문에서는 고전 컴퓨터보다 수백~수천 배, 심지어 수백만 배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그 기술이 어마어마한 규모의 연산이 필요한 인공지능(AI)과 결합하면 어떻게 될까.
이론적으로는, AI의 학습 및 가속화가 지금과 차원이 다를 정도로 촉진되어 훨씬 고성능의 AI가 출현할 것이다.
또한 양자 컴퓨팅은 이후 AI 발전에 따라 늘어날 에너지 소모와 비용을 줄이는 데도 기여할 수 있다.
GPT-3(오픈AI가 2020년에 내놓은 대규모 언어모델. 챗지피티는 GPT 시리즈의 응용 프로그램)의 파라미터가 약 1750억 개였다.
GPT-4의 그것은 수천억 개에서 수조 개로 추정된다(편집자 주: GPT 같은 언어모델은 ‘y = ax + b’ 같은 방정식의 집합이다.
여기서 a가 파라미터인데 한국어로는 ‘계수’라고 부른다.
AI의 ‘학습’은 현실 세계의 데이터를 방정식에 대입해 연산하면서 파라미터를 바꿔나가는 과정이다.
그렇게 조정해야 하는 파라미터가 수천억 개에서 수조 개에 이른다면 얼마나 많은 연산이 필요할까).
AI는 결국 연산이다.
이렇게 학습시킨 덕분에 요즘 우리가 쓰는 수준의 AI가 나온다.
데이터센터에서 수천, 수만 개의 GPU(AI의 학습에 주로 활용되는 고성능 연산장치로 전력 소모량이 크다)를 장기간 돌리며 연산한 결과다.
연산량이 늘어날수록 이에 필요한 전력 소비량도 증가한다.
이재명 정부의 공약인 ‘모두의 AI’를 실현하려면 더 많은 전력이 필요할 것이다.
양자 컴퓨팅을 활용하면 AI의 성능을 유지하면서 연산량과 이에 따른 전력 소비를 확 줄일 수 있다.
지난해 11월20일 연세대 송도 국제캠퍼스 양자컴퓨팅센터에서 공개된 ‘IBM 퀀텀 시스템 원’. ©연합뉴스
고전 컴퓨팅과 양자 컴퓨팅의 또 다른 차이가 있다면?
양자 컴퓨터의 연산은 가역적이다(reversible computation). 연산의 결과인 출력값으로 입력값을 유추해낼 수 있다.
출력을 입력으로 되돌릴 수(reversible) 있다.
정보가 ‘보존’된다.
고전 컴퓨팅에선 가역적 연산이 불가능한가.
예를 들어 설명하겠다.
고전 컴퓨팅의 회로를 구성하는 ‘논리 연산자’ 중엔 ‘AND’라는 것이 있다.
입력 데이터가 둘 다 1일 때만 1을 출력한다.
두 입력값 중 하나라도 1이 아닌 (0, 0) (1, 0) (0, 1) 등에서는 0을 출력값으로 낸다.
이렇게 되면 출력값이 0으로 나온 경우, 우리는 입력값이 (0, 0)인지 (1, 0)인지 (0, 1)인지 알 수 없다.
‘정보 손실’ 현상이 발생한다.
그게 왜 중요한가?
정보가 손실되는 비가역적 연산 과정에서 열이 발생한다.
‘고전 컴퓨터’가 뜨거워지는(발열 현상)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정보 손실’이다.
‘란다우어 원리’라고 부른다.
1비트의 정보가 지워질 때 발생하는 열까지 열역학적으로 계산이 되어 있다.
‘무어의 법칙’이 깨진 이유 중 하나도 이 발열 현상이다.
열이 나면 트랜지스터를 더 작게 만들어 반도체칩에 밀집시키는 작업이 어려워진다.
(이에 따라 고전 컴퓨터가 더 발전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그 대안 중 하나를 양자 컴퓨터로 꼽을 수 있다.
‘획기적 연산속도’ ‘전력 소비 감소’ ‘컴퓨터라는 연산 기계의 발전 한계 극복’ 등에서 양자 컴퓨터의 의의를 찾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양자 컴퓨터 기술이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만큼 발전되어 있는 상태는 아니지 않나.
현시점에서 양자 컴퓨터의 기술적 완성도는 100점 만점에 30~40점 정도로 본다.
그러나 실용적으로 활용 가능한 임계점은 이미 살짝 넘어섰다.
고전 컴퓨터와 협업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
‘슈퍼 컴퓨터(수천, 수만 개의 GPU를 병렬로 연결해서 연산능력을 높인 고전 컴퓨터)’와 양자 컴퓨터의 하이브리드로 HPC(고성능 컴퓨팅) 플랫폼을 구축하는 방법이다.
각각 잘하는 일을 맡기면 된다.
양자 컴퓨터는 고차원 확률분포 공간 탐색 같은 엄청난 규모의 복잡한 연산을 처리한다.
그 결과를 고전 컴퓨터가 받아 파라미터를 최적화한다.
양자 컴퓨터만 독자적으로 사용해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까진 양자 하드웨어의 성능 개선이 필요한데, 앞으로 10년 정도 더 걸릴 것이다.
실용 사례가 실제로 있나.
교통, 물류, 금융 등의 부문에서 이미 활용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으론, ‘양자 어닐링 컴퓨터’로 로스앤젤레스 항구(LA 항구)의 물류를 ‘최적화’한 경우가 있다.
화물선들이 컨테이너를 내리는 한편 그 화물들을 싣고 나갈 수많은 트럭이 들어오는 상황이다.
트럭이 운송 대상 화물을 다른 컨테이너들에 막혀 빼내지 못한다면 적체 현상이 발생한다.
LA항의 경우, 슈퍼 컴퓨터로 물류 최적화를 시도해봤는데 ‘경우의 수’가 너무 어마어마해서 실용적인 시간 내에 최적 경로를 출력하지 못했다.
그래서 디웨이브 사(D-Wave Systems)에서 만든 양자 어닐링 컴퓨터를 도입했는데, 화물을 빼는 시간이 며칠에서 몇 시간으로 줄어들었다(편집자 주: 항구의 물류 최적화는 매우 복잡한 문제다.
예컨대 ‘하루 100척 이상의 선박들을 어느 부두에서 맞이하고 보낼지’ ‘선박에서 1만여 컨테이너를 어떤 순서로 내려 어디에 배치할지’ ‘수백 대에 이르는 트럭의 출입 순서 및 하역 대상 컨테이너에 이르는 경로를 어떻게 설정할지’ 등 서로 연결된 문제들을 종합적으로 ‘최적화’해서 물류를 원활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에 크레인이나 인력 배치, 창고 사용, 통관, 날씨 등 다른 제약 조건까지 고려하면, ‘경우의 수’가 수십 자리인 천문학적 규모에 이를 수 있다.
정재호 단장의 설명에 따르면, 고전 컴퓨터는 ‘경우의 수’를 하나씩 순차적으로 검토하지만 양자 컴퓨터는 ‘중첩’의 활용으로 모든 경우를 한꺼번에 고려해서 정답일 확률이 높은 해법을 찾아내므로 물류가 빨라진 셈이다).
2021년 6월, 뉴욕·뉴저지 항구에서 트럭이 컨테이너를 나르고 있다.
©AP Photo
양자 어닐링은 대단한 기술인 것 같다.
아니다.
양자 컴퓨팅에선 초보적 수준이다.
정교한 논리 회로 없이 큐비트(qubit : 양자 컴퓨팅에서 정보를 표현하고 처리하는 기본 단위)의 배열만으로 문제를 풀도록 설계되었다.
그런데도 LA항 물류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의사로서 양자 컴퓨팅에 관심 갖게 된 계기는?
일단 신약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신약 한 종을 만들려면 평균 17년 동안 5조원 정도를 투입해야 한다.
성공 확률은 4%에 불과하다.
어지간한 기업으로서는 덤벼들 엄두를 못 낸다.
그래서 가격이 비싸다.
혈우병 치료제인 베크베즈라는 신약은, 주사기에 든 1~1.5cc의 약물을 투여받는 데 가격이 무려 46억원이다.
개발에 들어간 엄청난 돈과 시간이 반영된 가격이다.
그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여야 사람을 살릴 수 있다.
그것과 양자 컴퓨팅엔 어떤 관련성이 있나?
인체의 단백질 구조 규명은 물론 이에 기반한 신약 개발 단계에서도 ‘약물 후보’가 될 수 있는, (때로는 ‘경우의 수’가 수조 개인) 모든 화합물의 조합을 탐색(연산)해야 한다.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든다.
정확하고 빠른 연산 기술이 있다면 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양자 컴퓨팅 기술로 신약 개발 기간을 평균 1.7년, 비용도 5000억원으로 낮추게 된다면, 한국 제약사들도 도전할 만한 사업이 되지 않겠는가. 요즘 많이 거론되는 정밀 의료(Precision Medicine: 환경·생활습관·유전 등 개인별 특성을 고려해 맞춤형 질병 예방 및 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역시 ‘패턴 분석’의 문제다.
두 당뇨병 환자가 같은 약물을 처방받았는데 한 명은 치유되고 다른 한 명은 그렇지 않다면, 이는 두 사람의 패턴이 뭔가 다르다는 의미다.
패턴을 찾는 기술이 AI다.
이에 양자 컴퓨팅이 결합된다면, 진정한 의미의 개인 맞춤형 정밀 의료가 가능해질 것이다.
연세대 국제캠퍼스에 IBM이 개발한 양자 컴퓨터를 국내 최초로 도입했는데.
양자역학 관련 과학기술 전반을 고도화하려면 교육이 필요하다.
양자 컴퓨터라는 도구가 없는 상태에서 학생들을 어떻게 훈련시킬 수 있겠나. 오는 9월1일부터 ‘양자 정보 대학원’을 신설해서 이 부문의 석박사를 길러내기 시작한다.
양자 컴퓨팅으로 문제를 풀고 싶어 하는 산업체들에도 맞춤형 교육을 제공할 계획이다.
예컨대 제약사 측이 ‘수천만 개의 화합물 가운데 신약으로 가능성 있는 것을 고르는 문제를 풀어달라’고 요구하면, AI와 양자 컴퓨팅 기술의 활용으로 적절한 알고리즘을 개발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산학 협력을 이뤄낼 수 있다.
양자 컴퓨터 부문에서 한국이 너무 뒤처진 것 같다.
크게 낙후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K-양자 컴퓨터를 반드시 만들자’ 같은 야심을 품지 않을 이유는 없다.
다만 한국이 장차 양자 컴퓨터를 만든다 해도 그 시점에서 선도국들이 적어도 ‘양자 컴퓨터 제조’ 부문에선 더 앞서 나가고 있을 것이다.
한국은 ‘패스트 팔로(신속한 따라잡기)’를 잘하는 나라다.
어떤 부문에 ‘선택과 집중’을 할 것인지 현명하게 결정하면 된다.
이쯤에서 항공산업의 비유를 들고 싶다.
대한항공은 비행기 제조업체가 아니지만 여객 및 화물 수송 서비스로 세계적 항공사로 부상했다.
어차피 비행기 제조업체는 많지 않다.
세계적으로도 보잉과 에어버스 정도다.
비행기를 직접 만들지 않아도 항공산업에서 주요 지위를 점할 수 있다.
6월16일 미국 보스턴에서 세계 최대 바이오 전시회 ‘2025 바이오 인터내셔널 컨벤션’이 열렸다.
©연합뉴스
양자 컴퓨터에서도 상용화된 하드웨어의 활용을 통해 산업적 가능성을 추구하면 된다.
양자 컴퓨팅으로 신약 개발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면 한국의 제약산업은 성큼 성장할 것이다.
금융·화학·소재·반도체에서도 양자 컴퓨팅의 잠재력을 활용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양자 컴퓨팅 전용 메모리칩을 개발하는 산업이 나타나고 이와 관련된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산업도 발전할 것이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투자한다면 10년 후쯤엔 한국도 양자 컴퓨팅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다.
필요한 산업정책은?
알고리즘을 짜는 연구자들은 산업 현장에서 어떤 문제를 풀고 싶어 하는지 알기 어렵다.
산업 측으로부터 ‘어떤 문제가 있는데 신기술로 해결할 수 없나’라고 구체적 이야기를 전달받아야 이에 상응하는 해법(알고리즘)을 구상할 수 있다.
산업정책은 양자 컴퓨팅과 관련된 ‘테스트 베드(기술이나 시스템·제품을 시험하고 검증하는 플랫폼)’ ‘알고리즘 및 소프트웨어 개발센터’처럼 산업체와 연구자들이 함께 들어가 논의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는 쪽으로 가면 좋겠다.
산업체에도 AI나 양자 컴퓨팅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잘 모르기 때문에 나서지 못한다.
그런 분들이 쭈뼛쭈뼛하면서도 나와서 다른 연구자들과 만나는 공간이 필요하다.
그들이 한 일주일만 양자 전문가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준(準)전문가 수준이 되어 적어도 본인들의 문제가 양자 컴퓨팅의 도움이 필요한지 정도는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갈 수 있다.
그들이 유튜브까지 찍을 수 있도록, 내가 만들어보고 싶다.
※8월12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페럼타워 페럼홀에서 2025 〈시사IN〉 인공지능 콘퍼런스가 열립니다.
정재호 교수도 ‘AI와 양자 컴퓨터가 만나면’이라는 주제로 발표에 나섭니다(참가 신청:
saic.sisain.co.kr
)
“AI 발전 핵심은 연산능력, 연산능력 끝판왕은 양자 컴퓨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