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얼스틴은 자신을 짓누르던 성별 불쾌감에서 용감하게 걸어 나와 트랜스 여성이 됐다.
수술 직후 키얼스틴을 돌본 것은 한국인 이민 여성 준희였다.
〈고통 구경하는 사회〉의 저자인 김인정 전 광주MBC 기자가 새 연재 ‘경계의 사람들’을 시작합니다.
정상성과 이분법 기준 바깥에 놓인 채 거절당한 이들을 만납니다.
차별과 혐오가 일상이 된 시대에 정치와 제도가 누락시킨 사람을 다시 삶으로 이끄는 ‘틈의 목소리’를 기록합니다.
※ 등장인물의 이름은 모두 가명입니다.
우버가 준희의 집 앞에 멈췄을 때 키얼스틴은 머리 전체에 붕대를 감은 채 흐느끼고 있었다.
빌어먹을 공황발작이었다.
2024년 9월이었고, 오후 1시였고, 캘리포니아 오클랜드는 늘어진 여름을 느긋한 속도로 지나고 있었다.
그녀가 사는 미국 동부 도시와 달리 공기 중에 거슬리는 습기 하나 없었다.
하지만 붕대에 감싸인 얼굴 피부가 점점 부풀어 오르는 게 느껴졌고, 피부 바깥쪽에 닿는 공기의 쾌적함을 느끼기엔 턱 하나 제대로 가누기 어려웠다.
두개골을 지탱하는 와이어가 머릿속에 있다는 생각을 했고, 봉합한 두피가 터져 의료용 스테이플로 다시 꿰맸다는 자각도 들었다.
누군가에게 얼굴을 맞기라도 하면 모든 게 망가질 것이었다.
오클랜드는 처음이었다.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범죄율이 높다는 이 도시가 안면 여성화 수술(FFS: facial feminization surgery)을 갓 마친 자신에게 얼마나 안전한지 확신이 없었다.
준희의 집 담벼락 너머로 늘어진 블러드 오렌지 나무에서는 이제 갓 열리기 시작한 초록색 열매가 보였다.
테니스 원피스에 부드러운 보라색 꽃무늬 카디건을 걸쳐 입고 살짝 떨고 있는 키얼스틴의 상태도 비슷했다.
무언가가 되기 위해 움트는 시기였다.
한국인 이민 여성 준희는 트랜스젠더 수술을 마친 키얼스틴이 머물 수 있도록 자신의 방을 내주었다.
비혼 여성인 준희는 한국에서 온 유기견 치즈와 함께 산다.
©김인정 문 앞에서 전화를 건 지 한참 만에 문이 열렸다.
키얼스틴의 오빠 알렉스였다.
알렉스는 전 연인 준희와 여전히 친구처럼 잘 지낸다며, 샌프란시스코에서 수술을 마치고 나면 준희의 집에서 머무는 게 어떤지 권했다.
준희가 먼저 제안했다고 했다.
준희는 알렉스 뒤쪽의 어두컴컴한 층계참에서, 허리에 손을 살짝 짚고서 흰 개와 함께 서 있었다.
단발머리에 키가 크고, 슬쩍 웃고 있는 한국인 여자. 키얼스틴은 울음 사이로 감사 인사를 간신히 건네고, “초면에 미안하지만 자러 가야 할 것 같다”라고 속삭이듯 내뱉었다.
준희가 안내한 침실에 들어가 문을 닫자마자 키얼스틴은 침대에 걸터앉아 울고 또 울었다.
인생에서 가장 비싸고, 가장 나쁜 결정이었다고 생각하며 떨리는 손으로 부은 얼굴을 어루만졌다.
네 시간쯤 울다 방에서 나오자, 소파에 앉아 알렉스와 수다를 떨고 있는 준희가 보였다.
오자마자 들어가버려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니 준희는 그저 싱긋 웃으며 “와줘서 고맙다”라고만 말했다.
그러곤 집을 구석구석 소개해줬다.
키얼스틴은 그제야 준희가 내준 방이 그 집에서 가장 큰 침실이라는 사실을 알고 화들짝 놀랐다.
그 방을 쓸 수 없다고 손사래를 치자, 준희는 집의 모든 걸 편안히 쓰고, 샤워한 뒤 나올 때 화장실 물기 제거만 해달라고 했다.
알렉스가 지독하게 그 규칙을 안 지키기 때문에 동생인 너에게도 큰 기대는 없다는 농담도 덧붙였다.
알렉스와 연인이었을 때, 준희는 가끔 알렉스의 동생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몇 년에 걸친 그 이야기들은 단계적이고 조심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훤칠하고 몸 좋은 남동생이 LGBTQ+ 프라이드 행사 같은 데 다닌다거나, 고등학생 때 남성과 약간 스킨십이 있었던 것 같다거나, 트랜스 여성과 연애했다가 엄마랑 싸운 적이 있다거나···. 동생이 살짝 독특하다고만 생각하고 있던 차에, 알렉스가 준희에게 말했다.
“동생이 트랜스 여성으로 호르몬 치료를 받고 있고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했다”라고. 곧 안면 여성화 수술로 유명한 의사가 있는 샌프란시스코까지 수술을 받으러 올 거라는 이야기를 할 때, 그는 ‘남동생’과 ‘여동생’ 사이에서 어떤 단어를 골라야 할지 자꾸만 헤맸다.
곤혹스럽게 동생의 변화를 소화하려 애쓰면서도 털어놔준 게 고마웠다.
준희는 선뜻 “네 동생이 여기까지 수술을 받으러 올 때 따로 쉴 곳이 없다면 병원에서 멀지 않은 우리 집에서 묵어도 괜찮다”라고 말했다.
한국인 이민 여성인 준희는 코로나19 팬데믹 전에 집을 한 채 샀고, 누구든 그 집에 불러 잘 먹이고 잘 재워왔다.
그 제안 역시, 수술을 받은 사람을 잘 돌봐줘야겠다거나, 소수자니까 더 잘해줘야 한다는 생각 없이 가볍게 튀어나왔다.
회복하고 머물 데가 필요할 테니, 동생과 둘이 같이 오라고. 함께 있자고. 준희는 키얼스틴을 처음 봤을 때 얼굴에 둥글게 두른 붕대나 부어오른 얼굴보다, 아직 근육이 덜 빠진 몸에 걸친 미니 원피스와 카디건에 먼저 눈이 갔다.
‘얘는 참 여성스럽게 입었네’라는 생각이 곧장 들었고 자신에게도 편견이 있었다는 자책이 따라붙었다.
준희와 가까운 친구 중엔 트랜스젠더가 아직 한 명도 없었다.
준희의 소셜미디어 X(옛 트위터)의 타임라인에는 ‘성범죄를 저지른 남성이 갑자기 자기를 여성이라고 주장하면 어쩌냐’ ‘겉모습이 완전히 남자인데 트랜스 여성이라며 여자 탈의실에 들어오면 어쩌냐’ 같은 우려와 날 선 비방이 종종 뜨곤 했다.
그런 측면은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고, 준희 역시 생각하곤 했다.
성범죄율이 높은 국가인 한국에서 태어나 페미니스트로 살아온 준희에겐 여성의 안전은 중요한 이슈였다.
집을 찬찬히 둘러본 키얼스틴은 준희와 알렉스가 앉아 있던 소파 쪽으로 와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순간부터 대화는 매일 이어졌다.
준희가 일을 마치면 둘은 소파에 앉아 일, 책, 연애, 가족, 인생에 대해 끝없이 얘기했다.
둘째로 태어나 손위 형제를 가정의 중심인물로 느끼며 억눌렸던 경험부터, 직장 내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어려움까지 퍼즐을 하나씩 맞췄다.
준희가 직장에서 옳은 의견을 내고도 남성 직원들에게 무시당한 경험을 내밀면, 키얼스틴이 트랜지션 초기 경험을 건넸다.
화상회의 카메라를 끈 채 여성의 이름만 보인 채로 말하면 아무도 자기 말을 믿지 않다가, 아직 남성적인 모습이 남아 있는 얼굴이 보이도록 카메라를 켜면 갑자기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다고 했다.
그 순간 서로가 느낀 불평등이 착각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소파에 앉아 베개를 껴안고서 딱 붙어 수다를 떨다 보면, 헷갈렸던 경험들이 선명하게 합쳐졌다.
회복을 위해선 하루에 두 시간씩 걸어야 했다.
준희와 한국에서 온 유기견 치즈, 키얼스틴 셋이 긴 산책을 몇 번 했다.
커피를 같이 마시기도 했다.
키얼스틴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젠더 디스포리아(성별 불쾌감)를 경험했고, 가족에게 말했지만 학대당한 경험을 준희에게 털어놓았다.
평생 머릿속을 맴도는 노래가 있다.
영국의 팝 가수 도나 루이스의 ‘I Love You Always Forever’가 키얼스틴에겐 그런 노래다.
네 살 때, 아주 좋은 꿈을 꾸고 있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그 노래에 깼다.
너무나도 좋은 꿈이라 다시 꿀 수 있을까 기대하며 눈을 감았지만 그 꿈을 다시 꿀 순 없었다.
깊은 슬픔이 밀려왔다.
자신이 여자아이인 꿈이었다.
이런 경험도 있다.
유년기에 가장 친했던 두 소녀와 공주님 같은 드레스를 입고 화장을 하며 놀았는데, 어느 날 엄마들끼리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더니 그 놀이는 영원히 금지되었다.
나쁜 일을 겪어 마땅한 사람은 없다 또 다른 날의 기억은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엄마의 브래지어를 꺼내 입고 ‘Man! I Feel Like A Woman!’이라는 노래에 맞추어 장난을 치며 춤을 추자 아빠도, 고모도, 사촌들도 웃었다.
엄마는 웃지 않았다.
엄마는 키얼스틴을 위층으로 끌고 가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쥐어짜듯 꼬집으며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그때 생긴 흉터는 아직도 남아 있다.
“하지 마. 역겨워. 이상해. 넌 괴물이야. 남자애는 그런 짓 하면 안 돼.” 키얼스틴이 일곱 살 때, 아빠는 키얼스틴을 불러 조용히 말했다.
“네가 게이여도 괜찮아. 그런데 트랜스젠더가 되지는 마. 그런 사람들은 정말 이상하단다.
” 그런 일은 반복해서 일어났다.
여자아이들과 노는 걸 그만두었다.
아홉 살 즈음, 엄마와 이모들이 요리하는 부엌에서 오렌지 환타에서 반짝이는 기포가 올라오는 걸 보던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다.
어린아이들은 부엌에서 놀고 있었는데, 누군가 키얼스틴에게 “야, 거실에 가서 남자들이랑 놀아”라고 했다.
거실 쪽에선 삼촌 셋이 담배를 피우고 버드와이저를 마시며 카레이싱 경기 중계를 보고 있었다.
키얼스틴은 마지못해 그쪽에 가서 소파에 앉으며, 끔찍한 기분을 느꼈다.
남자로 정해져 있는 세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고,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쫓겨나 무언가 영영 잘못된 채로 평생 살아야만 한다는 기분이었다.
성별 불쾌감은 점점 심해져서 자기는 나쁜 일을 겪어 마땅한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사춘기에는 자살 시도를 하기도 했다.
트랜스젠더의 40%가 살면서 한 번 이상 자살 시도를 한다는 건 나중에야 알게 됐다.
미국 최대 트랜스젠더 인권보호단체인 NCTE(National Center for Transgender Equality)에 따르면 트랜스젠더의 자살률은 일반 자살률의 10배에 달한다는 것도. 키얼스틴의 이야기를 직접 들으니 살기 위해, 자기를 찾기 위해 트랜지션하게 된 한 사람의 지난한 삶의 여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밤엔 아주 단순한 진실이 준희에게 왔다.
바로 키얼스틴이 여자라는 깨달음이었다.
키얼스틴은 40대 비혼 여성인 준희의 삶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꼈다.
혼자인 시간으로 충만하고, 낮에는 주어진 일을 하고, 밤에는 자신을 위해 요리하며, 자신과 개 한 마리를 잘 돌보는 삶. 충분히 열심히 살지만 삶을 계속해서 바꿔야 한다는 열망으로부터 해방된 듯한 삶.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려온 키얼스틴이 처음 보는 타입의 여성 롤모델이었다.
수술 뒤 몸 상태가 엉망이라 거의 늘 파자마를 입고 있기도 했지만 준희와 보내는 그 시간이 꼭, 어렸을 때부터 염원했지만 한 번도 초대받아본 적이 없는 파자마 파티 같았다.
키얼스틴은 살지 못했던 시간을 되찾는 느낌이었다.
준희의 집에서 돌아온 뒤에도 키얼스틴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다.
얼마 전에는 목소리 여성화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힘겹게 부기를 빼고 나니 딱 원하던 ‘옆집 소녀’ 같은 친근하고 예쁘장한 얼굴이 됐다.
특히 최근엔 사람들이 키얼스틴을 자연스럽게 여성으로 인식한다.
그녀는 더는 잘못된 사람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평생 어깨 위에 있던 거대한 짐을 내려놓았다.
‘너는 나쁜 사람’이라고 매일같이 말하던 자기 안의 검은 구멍이 사라졌다.
빈자리에 따뜻함과 사랑과 빛이 스며들었다.
날마다 조금씩 더,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됐다.
2017년 7월15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퀴어문화축제에 성중립 화장실이 설치됐다.
©시사IN 신선영 수술할 때 옆에 있어준 오빠 알렉스 외에는 가족과 거의 연락하지 않는다.
엄마는 “네가 트랜스젠더가 되면 엄마로서 실패한 기분일 것”이라고 말했다.
아빠는 고집스럽게도 키얼스틴을 예전 이름으로 부른다.
트랜스젠더가 소아성애자라는 식의 음해 때문에, 어떤 친구들은 키얼스틴과 마주칠 때 자기 아이들의 얼굴을 가리기 시작했다.
트랜지션을 하고 반 년이 지났을 때 직장에서 갑자기 해고당했다.
커리어의 정점에서였다.
키얼스틴은 대기업 영업 분야에서 에이스였고, 그해 인생에서 가장 높은 연봉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트랜스젠더들이 트랜지션 뒤 해고당하는 걸 자주 봤기에 놀라지는 않았다.
그녀는 같은 분야에서 일했던 트랜스 여성을 일곱 명 아는데, 한 명을 제외하곤 모두 트랜지션 1년 안에 해고당했다.
UCLA 로스쿨 윌리엄스 연구소가 2024년 11월 내놓은 ‘트랜스젠더 직원의 직장 경험’ 연구에 따르면 트랜스젠더 54%가 해고를 경험한다.
취업이 다시 되길 바라지만 미래는 불투명하다.
트랜스젠더가 생물학적 성별과 다른 화장실에 가는 게 불법인 미국 내 주들이 있다.
그 법대로라면 키얼스틴은 남자 화장실에 가야 한다.
하지만 호르몬 치료와 수술을 받은 키얼스틴은 이미 너무나 여성처럼 보이고, 남자 화장실에 가면 안전하지 않다고 느낀다.
키얼스틴의 다른 친구는 트랜지션 중간 단계에 있고 돈이 부족한 상황이라, 가슴과 긴 머리를 갖췄지만 수염 제거를 하지 못했다.
주유소에서 차에 기름을 넣고 있는데 한 남자가 차를 몰고 가까이 다가와 “여기서 꺼져, 지금 총이 있다면 널 쐈을 거야. 넌 혐오스러운 존재야”라고 위협하고 갔다.
“트랜지션 중이라는 게 눈에 띄게 보이는 상태일 때 사회적 서열의 가장 아래에 위치하게 된다”라고 키얼스틴은 설명했다.
그런 시기에 있는 트랜스젠더에겐 남성 특권도, 여성 특권도 없고, 인권조차 없다.
성별 구분이 없는 화장실을 찾을 때까지 요의를 그저 참아야 하고, 어디에도 나를 위한 공간이 없는 상태를 참아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 재취임 후 상황은 악화되고 있다.
트럼프는 취임 직후 트랜스젠더를 인정하지 않고 생물학적 성별만 인정하는 행정명령을 발효했다.
2025년 2월 퓨리서치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 LGBTQ+ 성인 10명 중 8명은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이 트랜스젠더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칠 거라고 예상한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범죄자로 낙인찍히거나 교도소에 가기 쉬워진 데다가 출생 성별에 따라 수감되기 때문에 성폭력을 당할 위험성도 증가했다.
화장실에서 항의를 받으면 키얼스틴은 그저 자리를 얼른 뜬다.
체육관 탈의실에도 가지 않는다.
겁에 질려 있기 때문이다.
증오범죄가 두렵다.
키얼스틴은 트랜스 여성으로 살기 시작하며 사회적 지위가 확실히 추락했다고 느낀다.
여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선택한 어려움이라 좋은 면도 나쁜 면도 다 받아들이려 한다.
여성만의 공간에 침투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키얼스틴은 말한다.
그저 들어갈 수 있는 화장실이 필요하다.
생물학적 여성들의 고통을 깎아내리려는 게 아니다.
그저 출산 축하 파티에 초대받고 싶다.
평범한 고모, 이모, 누나, 여동생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
아무도 잘 기억하지 않지만 있으면 좋은 그런 사람 정도면 된다.
현수막을 들고 행진의 맨 앞에 서려는 게 아니다.
그저 여성들이 싸울 때 옆에 같이 서고 싶다.
당신들을 지지하며 우리가 자신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원한다.
어떤 상황에선 여성들이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으리라고 이해하면서도, 자신을 그저 ‘남성’으로 보는 성별 이분법에 반대한다.
“우리가 진짜 누구인지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준다면, 우리가 뭔가를 빼앗으려는 게 아니라 조용히 같이 걷고 싶을 뿐이라는 게 보일지도 몰라.” 행복해지겠다고 선언하는 이야기 2주에 걸쳐 네 번 긴 대화를 나눈 끝에 키얼스틴이 다양한 여성들과 찍은 사진 여러 장을 보여주었다.
이 중 누가 트랜스 여성 같은지 물었다.
정말 어려운 질문이었다.
계속 시도했지만 나는 한 장도 제대로 맞히지 못했다.
다들 그저 여자처럼 보였다.
이윽고 유럽 여행에서 여러 여성들이 활짝 웃고 있는 마지막 단체 사진에 이르자 나는 잠시, 모두 트랜스 여성이 아닐까 생각했다.
가장 남성적인 얼굴형을 가진 한 사람을 지목하자 키얼스틴이 대답했다.
“이 중에 트랜스 여성은 없어. 이 사람들은 모두 생물학적 여성이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월5일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트랜스젠더 여성 선수의 스포츠 이벤트 출전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고 있다.
©AP Photo 키얼스틴은 트랜지션한 뒤로 자신이 찾아낸 가족, 자매들에게 기대어 삶을 살아간다.
같은 의사에게 성 확정 수술을 받은 트랜스 여성끼리 온라인에서 정보를 공유하며 시작된 모임은 10명 정도가 됐다.
일단 음성 채팅을 시작하면 늘 새벽까지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
같은 거절을 겪었고 인간이라는 걸 무시당했기에, 서로를 이해하고 돌보는 이들이다.
수술을 받으면 서로 돌보고, 명절을 함께 보낸다.
수술 뒤 통증을 완화해줄 등받이 베개와 겨드랑이 베개 세트를 서로 물려주기도 했다.
그 베개는 한 트랜스 여성에게서 다음 트랜스 여성에게로 전달되며 몸과 마음을 기대게 해주고, 회복하기까지 함께한다.
준희는 키얼스틴이 집을 떠날 때, 베개 세트를 넘겨받아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는 일을 맡았다.
키얼스틴과 준희에게 가장 잊히지 않는 순간은 랍스터 비스크를 만들던 밤이다.
키얼스틴이 고체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된 걸 축하하는 첫 식사였다.
처음으로 함께 요리를 하게 된 두 사람은 서로 부딪히면서도 부드럽게 리듬을 찾아나갔다.
빠른 협의 끝에 부족한 재료를 대체하기 위해 화이트와인 식초 대신 쌀 식초를, 셰리 대신 미림을 넣기로 했다.
곧 냄비 세 개가 동시에 끓었고 랍스터와 셀러리, 당근, 양파의 향이 퍼졌다.
인덕션 스토브를 써본 적 없는 키얼스틴에게 준희가 사용법을 알려주었고, 헤비 크림과 카옌 페퍼를 지나치게 많이 넣는 걸 준희는 가만히 지켜봐주었다.
고요한 신뢰였다.
단순히 요리를 함께하는 게 아니라, 자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감각을 느꼈다.
키얼스틴은 준희의 진지한 눈빛을 보았다.
누굴 이기고 싶은 게 아니라 일을 정확하게 해내려는 성실함이 있었다.
준희의 업무 방식에 대해 들을 때 느낀 그대로였다.
“이 방식이 맞고, 우리가 할 수 있으니까 잘 해내자”라는. 두 사람의 손을 두루 거쳐 만들어진 랍스터 비스크는 꾸덕꾸덕한 크림에 부드럽고 촉촉한 랍스터의 식감이 살아 있는 걸작이었다.
뜨거운 랍스터 비스크를 떠먹으며, 이민자로, 비혼 여성으로 살아가는 준희를 향해 키얼스틴은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는 기본값을 거부하고 낯선 땅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라고. 가족과 세상의 기대와 정해진 정답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 바꾸겠다고 말한 사람들이라고. 두 사람의 이야기는 쉬운 길을 포기하는 이야기, 그리고 스스로 행복해질 거라고 선언하는 이야기다.
부엌에서 쫓겨나 원치 않는 남성의 세계로 밀려났던 어린아이는, 이제 서른두 살의 트랜스 여성이 되어 자신이 찾아낸 자매에게서 깊고 충만한 연대감을 느끼고 있었다.
네게도 등받이 베개를 물려주고 싶어 [경계의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