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제는 미국의 만성적 경상수지 적자에 의존해 발전해왔다.
트럼프의 일방적 관세 인상은 미국이 적자국 노릇을 거부하겠다는 신호다.
‘상품·금융의 사이클’이라는 큰 그림을 봐야 한다.
5월1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항구에서 하역을 기다리는 중국산 상품들. ©AFP PHOTO 전 세계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지만, 트럼프의 관세정책엔 나름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만성적 ‘경상수지 적자국(이하 적자국)’이란 운명에서 미국을 구해내겠다는 것이다.
그 방법이 너무 거칠고 엉뚱하긴 했다.
경상수지는 외국과 거래할 때 ‘번 돈’과 ‘쓴 돈’을 비교한 수치다.
전자가 후자보다 많으면 ‘경상수지 흑자’, 그 반대라면 ‘경상수지 적자’라고 부른다.
미국 경제분석국(BEA) 통계에 따르면 미국은 1970년 이후 일곱 해를 제외하고 줄곧 적자를 기록했다.
특히 2000년대 들어서는 한 해도 빼놓지 않고 매년 3000억~1조 달러의 경상수지 적자를 냈다.
2024년 경상수지 적자 규모는 무려 1조1300억 달러다.
구조적으로는 당연한 일이다.
다른 모든 나라가 ‘안전자산’인 미국 달러를 원하기 때문이다.
국가 간 거래(무역)는 대다수가 달러로 결제된다.
1997년 한국 외환위기 당시처럼 ‘경제 인프라’가 탄탄해도 달러를 충분히 보유하지 않으면 국가부도를 낼 수 있다.
해외 국가들이 달러를 확보하려면 그 나라가 ‘쓴 달러’보다 ‘받는 달러’가 많아야 한다.
미국에 대해 경상수지 흑자를 내야 한다는 이야기다.
만약 미국이 경상수지 적자로 세계에 달러를 뿌려주지 않는다면 글로벌 경제 전체가 삐걱거리게 된다.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가 세계경제를 떠받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계 살림과 마찬가지로 국가도 적자를 내면 외부에서 돈을 끌어와 메워야 한다.
그런데 미국의 경우, 해외 국가들이 돈을 퍼준다.
미국은 글로벌 금융허브다.
달러로 사고팔 수 있는 주식·채권 등 금융상품들이 수없이 발행된다.
해외 투자자들이 미국의 금융상품을 매입하면 그만큼의 돈이 미국으로 유입되어 경상수지 적자를 메워준다.
2000년대 들어서는 한국·일본·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이 가장 큰 대미 투자자였다.
이들의 투자만큼 미국에선 자금 공급이 늘어나 미국 정부와 시민들은 싼 금리를 누릴 수 있었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미국 금융상품을 매입한 달러는 어디에서 왔을까? 한국·중국·일본 등이 대미 수출로 얻은 경상수지 흑자다.
이제 ‘동아시아-미국 간 상품·금융의 사이클’이라는 큰 그림을 볼 수 있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미국에 상품을 팔아 경상수지 흑자를 낸다.
그 돈으로 미국 금융상품을 매입해서 미국의 적자를 메워준다.
미국은 세계의 수출 상품을 흡수하는 소비의 풀(pool)인 동시에 글로벌 자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글로벌 금융허브)이다.
동아시아는 열심히 상품을 만들어 미국에 판 덕분에 경상수지 흑자와 경제성장을 챙겼다.
한편 미국 시민들의 실질소득은 1980년대 이후 제자리걸음이었지만 동아시아 특히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값싼 생필품으로 그럭저럭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미국과 동아시아는 20여 년 동안 ‘윈윈’ 게임을 즐겼던 것이다.
그런데 2010년대 중반부터 이 시스템의 한계가 드러나게 된다.
불만은 주로 미국 측에서 부풀어 올랐다.
‘경상수지 흑자국’의 경우, 해당 국가 시민·기업·정부의 지출(소비·기업 투자·정부지출)이 ‘국내에서 생산하는 것’보다 적기 마련이다.
국내에서 사용하고 남는 부분을 수출해서 흑자를 낸다고 보면 된다.
‘적자국’에선, 해당 국가 내의 지출이 국내 생산보다 크다.
국내에서 생산한 것보다 더 많이 소비한다는 의미다.
더 필요한 상품은 해외에서 수입해야 한다.
그 결과가 바로 경상수지 적자다.
흑자국은 임금 상승을 억제하고 사회복지 지출도 낮게 유지하는 경향이 있다(내수 억압). 인건비를 낮춰야 저렴한 가격으로 수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국민의 소비와 복지를 희생시키는 대신 다른 나라 시민들에게까지 상품을 공급하는 과정에서 산업을 발전시키고 일자리를 늘린다.
대조적으로 적자국은 해외 수입품으로 인해 국내 산업이 황폐화된다.
실업이 증가하니 임금 상승 속도가 느리다.
민간경제가 바닥을 기고 있다면 정부지출을 늘려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재정적자가 눈덩이처럼 쌓인다.
미국의 ‘쌍둥이 적자(경상수지 적자와 재정적자)’가 대표 사례다.
2000년대 들어 동아시아는 계속 흑자를 내며 채권국으로 등극했고, 미국은 연속된 적자로 채무국이 되었다.
이른바 ‘글로벌 불균형’이다.
미국은 이 상태를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
가장 큰 위기 징후는 국가부채다.
미국 연방정부의 순부채는 미국 GDP와 비등한 수준이다.
연방 총지출 가운데 10% 이상을 이자로 낸다.
이자 규모는 계속 커지리라 전망된다.
연방정부가 내년 상반기까지 갚아야 할 원리금이 9조 달러(미국 GDP의 30%)에 달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해외 투자자들이 점점 더 미국 국채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는 상황까지 발생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국제통상 체제를 뒤엎으려 하는 이유다.
미국 중심의 세계경제 질서가 무너지는 것은 한국에도 결코 이롭지 않다.
중국·일본과 다른 한국의 처지 트럼프 행정부가 무리한 관세 인상을 시도한 것은 경상수지 적자를 줄이기 위해서다.
행정부 내 ‘국민경제파’들은 심지어 각국이 보유 중인 미국 국채의 만기(1년, 10년, 30년 등)를 100년으로 늘리도록 세계를 압박하자는 아이디어까지 내놓고 있다.
채무를 감당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세는 적절한 수단이 될 수 없다.
미국과 동아시아 사이의 불균형을 완화하려면, 미국인들이 내수를 줄여 수입을 축소해야 한다.
반면 동아시아는 임금과 복지를 늘려 내수를 확대해야(=수출을 줄여야) 한다.
관세는 개별 국가 간 무역 흐름을 규제하는 수단일 뿐으로, 불균형을 조정할 수 없다.
또한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채 만기를 100년으로 늘리자고 압박하는 즉시 글로벌 금융시장은 미국채를 ‘부도 낸 회사에 빌려준 돈’쯤으로 간주하게 될 것이다.
글로벌 금융공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로 꼽히는 케인스는 1944년 브레턴우즈 회의에서 수출과 수입의 균형을 목표로 하는 ‘관세동맹’을 제안했다.
©Wikipedia 트럼프 행정부는 강압적인 관세 인상보다 통상 체제 개혁을 위한 논의 테이블을 국제사회에 정중하게 제안해야 했다.
베이징 대학 금융학과 교수인 마이클 페티스는 〈포린폴리시〉에 쓴 기고문(4월21일)에서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1944년 브레턴우즈 회의에서 제안한 ‘관세동맹’을 참조하자”라고 제안한다.
이 동맹의 목표는 수출과 수입의 균형이다.
특정 국가가 ‘내수 억압’으로 경상수지 흑자의 영구화를 도모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메커니즘을 내장하고 있다.
페티스는 흑자국들이 임금인상, 복지 강화 등으로 내수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 같은 적자국은 소비를 줄이고 수출 경쟁력을 향상시켜야 한다.
국내는 물론 국가 간 제도의 구조조정도 필요한 문제다.
트럼프 행정부는 일방적 관세 인상에서 차츰 거리를 두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국 경제의 근본 문제 중 하나인 ‘글로벌 불균형’은 앞으로도 계속 돌출될 수밖에 없다.
예컨대 동아시아 국가들은 ‘내수 확대(=수출 축소)’를 압박받게 될 것이다.
국내 시장이 넓은 중국과 일본은 몰라도 한국이 ‘내수 중심 경제’로 전환할 수 있을까? 오는 6월 출범할 새 정부가 이후 5년 동안 진지하게 대응해야 할 문제다.
미국이 통상 체제 전복에 나선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