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율의 정치격파] 첫 지지율 文 84% vs 李 64%…원인은 ‘정치 양극화’
● 새 대통령 지지율 상승 막고 있는 ‘진영의 벽’
● 탄핵 후 여야 ‘인간적 차원의 교류’ 사라져
● ‘유튜브’, 정치·사회적 양극화에 기름 붓다
● 일부 유튜버, 부분 정보를 사실로 둔갑시켜
● 법사위원장, 야당에 양보하는 합리성 보였어야
● 민주주의는 제도 만들 때 소수의견 반영하는 것
2004년 3월 12일 국회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이 통과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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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9일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통과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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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14일 국회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안이 통과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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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7일 발표된 한국갤럽의 정례 여론조사(6월 24일부터 26일까지 만 18세 이상 남녀 1004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전화 면접 방식 여론조사, 표본오차는 95% 신뢰 수준에서 ±3.1%포인트.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64%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이는 이 대통령 취임 이후 한국갤럽이 처음으로 조사한 대통령 국정 수행 지지율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직후 치러진 19대 대선에서 승리한 문재인 당시 대통령의 취임 후 첫 지지율은 84%였다(한국갤럽). 두 사람 모두 전임 대통령의 탄핵으로 인한 조기 대선에서 승리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취임 후 첫 지지율 차이는 20%포인트 정도다.
전임 대통령 탄핵 사유의 상이함이 대통령 지지율에 영향을 줄 법한데, 오히려 반대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도 매우 특이하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 농단이라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로 탄핵당했지만, 윤 전 대통령의 경우 전 국민을 경악하게 만든 비상계엄이라는 명백한 문제로 탄핵됐기 때문에 탄핵 사유의 중대성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지지율 면에서는 반대 현상이 나타나니 특이하다는 것이다.
이런 특이성의 상당 부분은 19대 대선 직후와 현재의 정치·사회적 환경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 차이는 다름 아닌 정치·사회적 양극화다.
19대 대선 당시 양극화는 지금보다 훨씬 덜했기에 진영을 넘어 새 대통령에 대해 지지를 보낼 수 있는 환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진영의 벽’이 대통령 지지율 상승을 막고 있다는 것이다.
양극화가 그만큼 심화돼 있다는 것인데, 이런 정치·사회적 양극화의 심화는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전 세계 차원에서 발생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왜 세계는 이런 정치·사회적 양극화로 인해 고통받고 있을까. 그 원인을 따져보자.
수다 떨기 수단으로 등장한 SNS
우리나라의 경우 정치·사회적 양극화가 심화한 가장 큰 이유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들 수 있다.
먼저 탄핵의 위기를 겪었던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노 전 대통령의 탄핵 발의가 국회를 통과하기 전인 16대 국회 전반기까지만 하더라도 여야 의원 간 싸움은 있었지만, 싸운 후에는 소주잔을 기울이는 경우도 많았다.
싸울 때 싸우더라도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던 것이 노 전 대통령 탄핵 발의 직후 치러진 17대 국회부터는 여야 의원 사이에 이런 ‘인간적 차원의 교류’가 거의 사라졌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대통령 탄핵안 가결이라는 충격 여파가 여야를 완전히 갈라놓은 것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헌법재판소에서 인용되자 정치 양극화가 사회로 전이됐다.
정치 양극화가 사회로 전이돼 정치·사회 양극화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이런 양극화의 완결판은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인용 때 발생했다.
한마디로 세 번에 걸친 대통령 탄핵으로 인해 정치·사회 양극화가 극에 달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여기에 이른바 IT 강국이라는 점도 한몫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본래 지인들끼리 자신의 잡다한 소식을 빠르게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역할했다.
최초의 SNS 중 하나인 트위터(Twitter)라는 서비스명 자체도, 영어 동사 ‘twitter’에서 나왔다.
이 단어는 ‘짹짹 거리다’ ‘재잘거리다’를 의미한다.
참새들이 짹짹거리며 수다 떨듯 지인들 간 수다 떨기 수단으로 SNS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런 SNS가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되기 시작하자, 일부 정치학자들은 정치권력은 이제 죽음을 맞이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소셜미디어의 보편화와 정치도구화는 일반 유권자의 정치참여를 더욱 활성화해 이른바 ‘참여적 시민’을 증가시키고, 이를 통해 참여민주주의가 활성화됨과 동시에 밀실 정치가 직접 민주주의로 변하게 될 것이라며 중앙집권적 권력의 종식을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이는 인터넷이 처음 보편화했을 때 여러 가지 부작용과 문제점이 발생했음에도 인터넷의 자정 기능이 이런 문제를 극복할 것이라는 주장의 ‘시즌 2’를 보는 듯하다.
어쨌든 이들의 희망처럼 SNS의 정치도구화는 권력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위주의 형태를 강화했다.
또한 직접민주주의라는 환상을 이용해 소수의 목소리가 여론인 것처럼 포장됐다.
이런 현상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정치인이 SNS로 자신의 입장이나 주장을 유권자에게 전달하는 것은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문제의 근원은 일반 유권자가 정치인에게 느끼는 친근감이다.
SNS가 정치도구로 변하기 이전, 유권자들은 정치인들을 ‘저곳에 있는 그들’로 여겼다.
즉 자신과 상관없는 이들로 여겼다.
그런데 정치인들이 SNS를 활용하며 일반 유권자에게 다가가자, 상황은 변하기 시작했다.
특히 유권자 자신들의 의견에 특정 정치인이 답하는 것은 일반 유권자 처지에서는 정말 경이로운 일이었다.
‘저곳의 그들’로만 생각했던 정치인이 자신 앞에 나타나 친절하게 자신들 요구에 답하는 것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해당 정치인의 비서진이 그들 의견에 답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유명 정치인이 자신에게 반응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통해 유권자 개인은 정치인에게 ‘친밀감’을 갖게 됐다.
이런 친밀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특정 정치인에 대한 추종으로 변화했다.
본다.
안다.
고로 존재한다?
본래 이성적 유권자의 태도는 정치인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인을 ‘이용’하는 것이다.
정치인이 권력 쟁취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유권자들을 이용하듯 유권자도 저마다의 이익을 위해 정치인을 이용해야 한다.
그런데 이용은 고사하고 그를 추종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정 정치인을 추종하게 되면 그 정치인의 반대편에 있는 진영, 정당 그리고 정치인은 적(敵)이 된다.
나에게 반응해 주고 내 의견에 답해 주는 정치인을 못살게 구는 ‘그들’은 타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정치적 팬덤은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하게 된다.
정치적 팬덤이 정치의 한 축으로 등장하면 정치는 사라지게 된다.
정치에서는 본래 상대방을 협상의 파트너로 인식해야 하는데, 상대를 타도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면 협상은 불가능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 정치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정치가 사라지면, 그 자리에는 대신 ‘무한 투쟁’이 자리 잡게 된다.
이런 현상이 유독 우리나라에서 극성을 부리는 이유는 SNS의 정치도구화, 그리고 우리 정치 문화 속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정치의 인격화’ 현상 때문이다.
정치의 인격화 현상이란 정치를 이성적 프로세스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 사람 중심으로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특정인이 권력을 잡으면 세상이 잘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고가 바로 정치 인격화 현상의 단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정치·문화 요소가 우리에게 강하게 투영되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정치인의 SNS 활용 때문에 정치인을 추종하는 현상까지 겹쳐 나타나게 되니, 우리나라에서 정치 양극화는 극에 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나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팬덤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SNS와 팬덤의 존재는 분명 상관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발생한 정치·사회 양극화에 기름을 붓는 것이 바로 유튜브다.
유튜브는 미디어 부문에서 혁명이라고 할 만한 변화를 가져왔다.
유튜브 덕분에 저마다 ‘방송국’을 차릴 수 있게 됐고, 저마다 언론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또한 유튜브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개진할 수도 있게 됐다.
유튜브의 가장 큰 강점은 시각효과를 통해 정치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시각은 미디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람은 ‘본다는 것’과 ‘안다는 것’ 그리고 ‘존재한다는 것’을 일치시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즉 자신이 본 것은 존재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봤기 때문에 안다고 생각한다.
북한을 방문할 수 있던 시절, 일부 정치학자들이 북한을 방문하고 와서 북한 관련 주장을 하게 되면, 북한을 가보지 않은 학자들은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 정도로 시각은 사람에게 강력한 영향을 줄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유튜브는 과거 팟캐스트에 비해 시청자에게 더욱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 유튜브가 영향력을 갖게 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SNS에 의해 정치·사회 양극화가 극에 달하면, 상대 진영이 정권을 갖게 됐을 때 반대 진영은 그 정권하의 레거시 미디어를 신뢰하지 않게 된다.
진보진영이 정권을 가져가면, 보수들이 레거시 미디어를 신뢰하지 않고,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 진보들이 레거시 미디어를 신뢰하지 않게 된다.
레거시 미디어는 정권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진실을 외면한다는 인식을 갖게 돼 나타나는 현상이다.
문제는 레거시 미디어를 신뢰하지 않는 이들이 몰려가는 곳이 유튜브라는 데 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적지 않은 수의 유튜버는 정보와 사실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이들 유튜버 상당수는 정보를 사실처럼 말한다.
이들이 사실과 정보를 구분하지 않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유튜브 채널에서는 게이트키핑 기능이 없거나 미약하다.
일반 레거시 미디어의 경우 정보를 입수하면 크로스체크도 하고 중간 간부층에서 해당 정보의 사실 여부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는데, 상당수 유튜브 채널의 경우 이런 과정이 없거나 미약하다.
그렇기 때문에 정보가 사실로 둔갑하는 경우가 많다.
두 번째 이유는 이른바 ‘시사 선정성’이 많은 구독자를 확보하는 중요한 열쇠라는 점이다.
좀 더 자극적인 정보를 제공해야 그만큼 수익도 늘어난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유튜브가 많아질수록 유튜브 수용자들은 ‘진영에 대한 신념’을 더욱 강하게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이는 알고리즘에 의해 형성되는데, 유사한 정보를 보여주는 유튜브 채널에 많이 노출될수록, 근거가 미약한 정보가 ‘신념’으로 굳어지기 쉽다.
결론적으로 SNS에 의해 형성되고 심화된 정치·사회 양극화는 유튜브에 의해 ‘신념화’된다고 할 수 있다.
유튜브, 방송법 규제 틀 안에 묶어놔야
이런 악순환의 고리는 언제가 끊어내야 한다.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유튜브 역시 방송법의 규제 틀 안에 묶어놔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기존 방송법처럼 일정 규모의 투자가 계속 이어져야 하고, 일정 규모의 설비를 갖춰야 한다는 식으로 법을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방송법이 규정하고 있는 콘텐츠 관련 규제는 유튜브에도 적용돼야 한다.
이것 말고도 중요한 것은 정치의 복원이다.
지금은 정치가 실종돼 있다.
다수결은 민주주의의 가치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현하는 수단이다.
그럼에도 다수결이 민주주의 가치라고 주장하며 수(數)로 밀어붙이는 행태가 지속되는 한, 정치는 부활할 수가 없다.
또한 대통령제하에서는 ‘견제’가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장치인데, ‘수’로 밀어붙이며 조금의 견제도 허락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면, 이는 실종된 정치를 아예 땅에 묻어버리는 행위와 같다.
그렇기 때문에 견제를 허용해야 한다.
이를 위해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 위원장 정도는 야당에 양보하는 합리성을 보여줘야 했다.
그래야만 행정부와 입법부가 융합된 지금의 상태에서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과 역작용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고, 그래야만 정치도 다시 살아나는 상황이 조성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이마저 완전히 물 건너갔다.
여권 스스로 만든 이런 상황은 결국 여권에 부메랑이 돼 다시 돌아갈 수 있다.
모든 사안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질 수밖에 없게 됐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진정한 가치는 제도를 만들 때 소수의 의견도 반영하는 것이다.
소수의견을 다수의 이름으로 묵살한다면, 그곳에서는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없다.
우리가 만들고 지켜낸 민주주의를 어떻게 가꿀 것인지를 고민해야 할 때다.
그런데 지금 정치권에서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어 안타깝다.
분명한 것은 민주주의는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계엄군 앞에서 몸으로 장갑차를 막아섰던 시민들을 항상 기억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수 이름으로 소수 의견 묵살하면 민주주의는 작동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