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태의 뷰파인더] 프라이버시 무기로 자료 제출 거부하는 공직자 후보들
● 사생활, 인간의 삶 변하며 생긴 근대적 산물
●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신성불가침 영역 아냐
● 공직자라면 삶 자체가 공적영역의 일부
● 공직 청문회서 ‘프라이버시’ 거론 자체가 문제
김민석 당시 국무총리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 첫날인 6월 24일 국민의힘과 김 후보자는 청문회 시작부터 자료 제출 문제로 맞섰다.
동아DB “국민의 삶이라는 발을 따뜻하게 감싸는 흙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중략) 앞으로 남은 모든 절차에 성실하게 임하겠다는 말씀으로 소감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6월 26일, 강선우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기자들에게 한 말이다.
장관 후보자 지명 후 제기된 배우자 스톡옵션 1만 주 재산 신고 누락 의혹에 대해 즉답하는 대신 인사청문회에서 밝히겠다는 취지의 답변을 내놓은 것이다.
  강선우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6월 26일 서울 종로구 이마빌딩에 마련된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에 출근하며 소감을 밝히고 있다.
뉴시스 장관 후보자들을 향한 논란은 그뿐만이 아니다.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는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배우자가 ‘코로나 수혜주’를 매매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진숙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후보자는 제자 논문 가로채기 의혹에 휩싸였다.
안규백 국방부 장관 후보자는 아들 군복무에 대한 기록 이전에 본인의 병적 제출마저 거부하고 있다.
권오을 국가보훈부 장관 후보자는 근로계약서 없이 다섯 곳에서 수천만 원대의 돈을 받고도 “커피 한 잔 마시는 것도 일하는 것”이라고 대답해 국민을 실소하게 만들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 후보자는 배우자가 태양광 사업을 하는데도 관련 법안을 발의한 전력이 보도됐다.
장관 후보자들에게 쏟아지는 온갖 의혹이 다 사실이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그 내역을 일일이 검증하는 것 또한 이 글의 취지를 벗어난다.
김민석 국무총리에 대한 인사청문회 과정을 복기하면서 더 큰 차원의 논의를 해보도록 하자. 나만의 방에서 시작된 사생활의 개념 6월 24일, 국회 인사청문특별위원회가 김민석 당시 국무총리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를 진행했다.
하지만 무성한 의혹과 달리 청문회는 싱겁게 끝났다.
인사청문회특별위원회 위원장인 이종배 국민의힘 의원은 “인사청문회 도입 이래 국무총리 후보자의 청문회를 19차례 실시했는데 이번처럼 증인과 참고인 채택이 없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라고 말했다.
자료 제출을 요청해도 “개인정보 제공 미동의 등으로 제출받지 못한 자료가 73.3%”에 달했다.
국회는 행정부를 견제하는 기관이다.
국회가 인사청문회 자료를 요청하면 정부는, 장관이나 총리 후보자는 이를 제출해야 한다.
하지만 이 원칙이 무너지고 있다.
이번 정부 들어서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상태다.
국민의힘의 비판에 따르면 민주당 측 간사들이 ‘프라이버시 보호’를 이유로 같은 편 봐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비판에 근거가 없는 것 같지는 않다.
현장에서 박선원 민주당 의원이 “프라이버시 침해”라고 소리친 것만 봐도 그렇고, 다른 장관 후보자들 역시 비슷한 이유로 자료 제출을 미루거나 거부하고 있다는 점을 놓고 봐도 그렇다.
이쯤에서 진짜 질문을 던져볼 때다.
공직 후보자가 ‘프라이버시’를 이유로 인사청문회 자료 제출을 거부하는 일은 과연 합당할까. 합당하다면 어떤 근거로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반대로 그런 행태가 잘못됐다면 어떤 이유로 어떻게 잘못됐다고 말해야 할까. 사생활이란 무엇이며 어떤 경우에 어떻게 보호받아야 하는가. 사생활은 근대의 산물이다.
아무리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더라도 17세기 이전까지 소급하기는 어려운 삶의 양태다.
사생활이 근대의 특유한 현상이라는 인식이 확산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본격적인 역사학의 연구 대상으로 대두한 것 또한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20세기 중후반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은 사생활이라는 것이 형성되고 발전한 과정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것이 ‘공적영역’과 맺는 관계에 대해서도 고찰할 수 있었다.
시설이 열악한 고시원에 사는 청년을 떠올려 보자. 그는 자신의 사생활이 보호받고 있지 못하다고 느낄 것이다.
좁은 복도를 오가며 다른 사람들과 계속 마주칠 수밖에 없고, 심지어 자기 방에서도 남들이 내는 소리, 냄새, 기타 여러 요인에 맞닥뜨리기 때문이다.
즉 ‘남이 없는 나만의 시공간’을 향유하지 못할 때 우리는 사생활의 부재를 느낀다.
  하지만 아무리 열악한 고시원이라 해도 중세 유럽의 귀족보다는 나은 환경이다.
17세기 이전까지는 왕과 귀족도 사생활을 누릴 수 없었다.
왜냐하면 각자 따로 방을 쓴다는 개념이 없었고, 동시에 ‘복도’라는 건축 요소 역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복도가 없는 건물을 오늘날의 우리는 상상하기 어렵다.
특히 복도가 있는 한옥 구조에 친숙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서유럽의 건축은 그랬다.
방과 방이 서로 이어져 있었다.
가장 안쪽 방을 자신의 것으로 쓰는 사람은 집 밖에서 자기 방까지 도달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방을 통과해야 했다.
반대로 바깥쪽 방을 쓰는 사람은 안쪽 방을 쓰는 누군가가 자기 방에 들락거리는 것을 당연히 감수해야 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진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공간 구조 속에서 사람들은 사생활을 누릴 수 없다.
그렇다면 사생활은 어떻게 발생했을까. 프랑스의 역사학자 조르주 뒤비와 동료들은 ‘사생활의 역사’라는 5권의 저서를 통해 그 과정을 추적했다.
그 답은 앞서 잠시 언급한 건축의 신개념, ‘복도’였다.
17세기 영국의 저택에 복도가 생기면서 사람들은 남의 방에 들어가지 않고 이동할 수 있게 됐다.
그러자 남의 방에 들어갈 때 노크를 해서 기척을 알려야 한다는 관습도 생겼다.
근대적 의미의 ‘개인’이 자라날 수 있는 고치, ‘나만의 방’이 생긴 것이다.
사적 생활과 함께 등장한 공적영역 사생활의 탄생은 또 다른 영역을 낳았다.
다시 한번 ‘복도’를 떠올려 보자. 복도는 모든 방을 연결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동시에 누구의 방도 아니다.
예컨대 아파트의 공용공간은 ‘공급면적’ 중 일부로 포함돼 있다.
하지만 그 공간을 함부로 사유화해서는 안 된다.
내가 낸 돈으로 유지되고 있지만 내가 독점하면 안 되는 공간, 내가 독점할 수 없기에 나에게 유익한 공간, 그것이 바로 공용공간인 것이다.
공적영역이라는 것도 바로 이렇게 작동한다.
우리 모두는 일해서 돈을 벌거나 자산을 보유하거나 기타 여러 가지 이유로 세금을 낸다.
국가는 그 세금으로 도로를 정비하고 치안을 유지하고 화재를 예방, 진압하는 등 여러 활동을 한다.
그러한 공적 활동은 엄밀히 따졌을 때 내가 낸 세금으로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시민 각각이 그것을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경찰차를 개인택시처럼 쓸 수 없고, 소방차를 개인 소유 살수차처럼 쓸 수 없는 이유다.
공공서비스는 엄연히 ‘내 돈’으로 운영되지만 ‘내 것’은 아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존재하고 정상 작동함으로써 내 삶의 질이 보장된다.
사생활이 있어야 공적영역이 있다.
이 개념적 대립쌍은 물질 영역뿐 아니라 정신 영역에서도 고스란히 통용된다.
문자 매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로 돌아가 보자. 모든 소식과 정보가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고 있다.
그런 매체 환경에서 ‘비밀’은 존재할 수 없다.
물론 누군가 머릿속에 떠올리고 절대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어떤 생각이 있을 수야 있다.
하지만 일단 표현하는 순간 그것은 남과 공유되고, 따라서 ‘개인의 사유’란 불가능하다.
글쓰기가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조용히 종이에 글을 쓰면 그 생각은 표현되지만 남에게 들키지 않은 채 남아 있을 수 있다.
우편제도의 발생과 출현은 그러한 ‘기밀성’을 더욱 강화했다.
편지를 주고받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비밀이 유지된다.
이런 식의 의사소통은 문자와 글쓰기, 그리고 편지라는 양식이 발명되기 전까지는 불가능했다.
특히 방에 혼자 앉아 편지를 쓴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편지는 언어적 사생활의 영역인 셈이다.
편지를 ‘공개’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특정인에게 보내는 대신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공개하는 방식이다.
글을 쓰고 대량으로 인쇄해 판매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출판 매체, 즉 신문이 된다.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 메일(Daily Mail)’에 ‘편지(Mail)’라는 단어가 여전히 남아 있는 이유다.
사적 글쓰기, 즉 편지가 먼저 발명됐고, 공론장이라 할 수 있는 언론은 그 거울쌍처럼 출현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언어 화석’인 셈이다.
사생활은 절대적 신성불가침 영역이 아니다.
건축을 통한 공간 구성, 매체 환경, 기타 여러 요소에 의해 출현한 근대적 산물이다.
그렇게 형성된 사생활의 공간과 언어, 제도와 관습은 자연스럽게 공적영역을 탄생시켰다.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은 서로를 지탱하고, 또 서로 침범하며 상호 의존한다.
공직자의 사생활은 온전히 사적일 수 없다 공용공간인 아파트 복도에 화분 등 개인 물건을 내놓은 광경. 동아DB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공직을 맡겠다는 사람의 사생활은 어디까지 ‘프라이버시’로 보호받을 수 있을까. 공용공간이 누구의 것도 아닌 것처럼 공직자의 사생활 역시 온전히 사적인 것으로만 남아 있을 수는 없다.
공직자란 국가나 지자체의 공적 의사결정을 내리거니 깊숙이 개입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삶 자체가 ‘국가 공동체의 공용공간’이 돼버리는 것을 기꺼이 감내할 수 있는 사람만이 공직에 나서야 한다.
공직자가 국민 앞에 사생활을 들이대고 항변하는 건 그런 면에서 납득하기 어렵다.
공용공간에 자기 살림을 내놓는 얌체 입주민 같은 짓이다.
공직자는 사생활을 평범하게 지킬 수 없다.
그 희생을 이해하거나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은 공직에 나설 자격이 없다.
많은 민주주의 선진국은 공직자에 대해 한국보다 더 엄격한 기준을 요구한다.
가령 프랑스의 경우 공직자는 자녀가 해외 유학을 할 경우 그 비용을 어디서 조달했는지 소명해야 할 책임을 지며, 합리적 설명을 내놓지 못할 경우 처벌받는다.
“내 자식 교육비는 사생활의 영역” 같은 항변은 허용하고 있지 않다.
공적 이유가 있을 때 사생활의 영역은 당연히 축소될 수 있다.
가장 극적인 사례를 꼽아보자. 올해 4월, 미국 정부는 중국 주재 정부기관 직원들에게 중국인과는 연애하지도 말고 성관계를 맺어서도 안 된다는 내용의 지시를 내렸다.
중국 정보기관들이 미인계 혹은 미남계를 통해 미국의 정보를 빼내고 있다는 판단하에 내려진 지시다.
이것은 사생활 침해다.
하지만 미국 공직자가 ‘내 개인적 삶은 프라이버시’라며 미국 정부의 지시를 어기고 중국인과 연애하는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다.
우리는 이미 어떤 영역, 특히 공직에서는 사생활이 양보될 수 있고, 때로는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 당연한 논리가 통하지 않는 것, 사생활 보호를 들이대지 말아야 할 곳에 프라이버시가 거론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아직 성숙한 민주주의를 갖추지 못했다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번 청문회 정국은 바로 그 개념의 혼동부터 바로잡는 계기가 돼야 마땅하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학사 ● 前 포린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 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칩 워’ ‘인간의 본질’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外
사생활 운운하는 사람에겐 공직자 자격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