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규제 덮친 정비사업]①
수주전 새 키워드 ‘현금 지원 조건’ 떠올라
시공사 ‘보증 리스크’ 부담…무리한 출혈경쟁 경계
서울의 한 아파트 재건축 현장. [연합뉴스]
[이코노미스트 이승훈 기자] 정부의 고강도 대출 규제로 정비사업 시장의 판도가 요동치고 있다.
금융당국이 수도권 재건축·재개발 정비사업의 이주비 대출 한도를 주택담보대출(주담대)과 같이 6억원 한도를 적용키로하면서, 고가 아파트가 밀집한 강남·용산 등 주요 지역 정비사업장에서 '자금력 양극화'가 본격화될 조짐이다.
이에 따라 건설사 간 수주전은 단순한 공사비나 브랜드 경쟁을 넘어 ‘현금력 전쟁’으로 비화하고 있다.
  정부는 6·27 대출규제에서 지난 6월 28일부터 관리처분인가를 받은 정비사업지 조합원들의 이주비 대출에도 주택구입 목적 대출규제를 똑같이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수도권 다주택자는 원천적으로 이주비 대출이 금지된다.
1주택자는 기존 주택을 6개월 내에 처분해야 이주비 대출이 가능하다.
무주택자는 이주비 대출 한도가 6억원 이하로 제한된다.
  정비사업 ‘양극화’ 우려…자금여력이 수주전 판가름  이주비는 기본 이주비와 추가 이주비로 나뉜다.
기본 이주비는 정비 공사 기간에 거주할 집을 구하거나 임차인에게 보증금을 반환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금융기관에서 대출받아 지원하는 비용이다.
이번 규제 전에는 조합원 자산의 감정평가액의 주택담보대출비율(LTV) 50%까지 지원이 가능했다.
기존에는 조합원 개인별 주택 가격에 따라 수십억 원까지 대출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일괄적으로 상한선이 설정된 것이다.
이는 강남3구(강남·서초·송파)나 용산 등 고가 주택이 몰린 지역에서 실질적으로는 기존보다 수억원씩 적은 대출만 받을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규제 강화로 정비사업 조합원들의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면서, 이주비 부족분을 누가 얼마나 채워줄 수 있는지가 수주전의 핵심 변수로 떠올랐다.
현재로서는 시공사가 보증을 서서 조합에 빌려주는 추가 이주비 대출은 이번 규제 대상이 아니다.
추가 이주비 대출 금리는 기본 이주비보다 높은 5~6% 수준이다.
  문제는 이 추가 지원이 사실상 건설사 자체 자금 또는 보증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시공사의 ▲재무여력 ▲신용등급 ▲금융조달 능력 등에 따라 제안 가능한 조건이 갈릴 수밖에 없다.
이 같은 부담은 자금여력이 부족한 중소형 건설사에게는 사실상 수주전에서의 진입 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브랜드나 시공능력도 중요하지만 ‘현금줄이 두꺼운 회사’가 수주를 가져가는 시대가 펼쳐질 것으로 보인다”며 “자금 동원력이 수주전의 최대 변수가 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이어 “건설사 간 양극화가 더욱 심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현금 싸움’ 격화…정비사업도 ‘금융 전쟁’ 돌입  실제 현재 진행 중인 ‘대어급’ 정비사업장에서는 대출 규제가 변수로 작용하며 추가 이주비 지원 등 파격적인 금융 조건 내걸기에 한창이다.
일례로 서울 강남구 일원동 ‘개포우성7차’ 재건축 사업장에서 삼성물산과 대우건설의 수주 경쟁이 진행 중이다.
삼성물산은 LTV 100%+@ 수준의 추가 이주비를 제시하며 사실상 대출 한도 무제한을 공약했다.
뿐만 아니라 업계 최고 신용등급(AA+)을 바탕으로 최저 금리 제공을 강조해다.
또 조합원 분양계약 완료 후 30일 내 환급금 100% 지급, 분담금 상환 최대 4년 유예 등의 혜택을 내걸었다.
  대우건설은 기본 이주비 6억원에 LTV 50%를 추가 이주비로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사업비 대여 금리는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0%로 제시하고 있다.
정비사업 최저 수준이다.
프로젝트파이낸싱(PF) 보증 수수료 전액 부담, 분담금 입주 시 100% 납부 등의 조건 등도 제안했다.
  조합원들은 추가 이주비 한도와 금리뿐만 아니라 분담금 상환 유예, 사업비 조달 금리 등 건설사들이 제시하는 금융 조건을 종합적으로 비교해 선택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주비 지원을 경쟁적으로 확대할 경우, 시공사 재무구조에 부담이 쌓일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건설사가 직접 자금을 지원하거나, 금융권 보증을 약속하면서 보증 리스크와 유동성 위기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특히 중견 건설사의 경우, 한두 개 현장에서 무리한 보증을 서다가 연쇄적으로 유동성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과거 2010년대 초반 재개발 시장에서도 이주비 보증이 과도했던 일부 중견 건설사가 신용등급 강등을 겪거나, 수익성 악화를 겪은 전례가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이주비 대출 규제가 정비사업 시장의 구조적 변화를 촉진할 수 있다고 진단한다.
한 부동산업계 관계자는 “이제 정비사업 수주전은 단순 시공 경쟁이 아니라 재무 능력·금융기법·리스크 관리 능력을 총동원하는 금융전쟁 양상으로 흘러갈 것”이라며 “향후 정부 규제와 시장 수요 변화에 따라 정비사업의 주도권도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전문가는 “정부는 대출 총량을 관리할 수 있을지 모르나, 이로 인한 부담이 민간 건설사로 전이되면서 결국 정비사업의 양극화와 공급 속도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6억 장벽’에 막힌 이주비…정비사업 수주전, ‘현금력’ 확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