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헌법을 읽는다] ⑹ 재판소원과 한정위헌
헌법은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도록 국가를 강제하는 문서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에는 헌법을 몰라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국가가 헌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헌법으로 국가가 아닌 국민을 통제하기도 했다.
그러다 군사정부가 무너지고 시민들이 헌법을 새로 썼다.
이 헌법으로 우리는 국가를 통제해 왔다.
그런데 지금 시민이 만든 헌법이 무력화하고 있다.
헌법을 지키려면 헌법을 알아야 한다.
언론인 출신 헌법학자 이범준 서울대 법학연구소 연구원과 함께 헌법을 읽는다.
[편집자주] 국회가 만든 법률이 헌법에 어긋나면 헌법재판소가 위헌을 선언해 폐지한다.
정부가 시행한 정책이 헌법에 어긋나도 헌법재판소는 위헌을 선언해 취소한다.
하지만 법원이 한 재판은 헌법에 어긋나도 헌법재판소가 어찌하기 어렵다.
1988년 새 헌법에 따라 헌법재판소가 만들어졌는데, 이때 제정된 헌법재판소법이 헌법소원 대상에서 재판을 제외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공권력의 행사 또는 불행사로 인하여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을 침해받은 자는 법원의 재판을 제외하고는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할 수 있다.
….”라고 제68조 제1항에서 정했다.
외국에는 법원의 판결을 헌법재판하는 독일 같은 나라가 적지 않다.
그래서 한국의 헌법소원 대상에 법원 재판을 넣어 재판소원을 도입하자는 주장이 있다.
최근 활발해졌고 헌법재판소도 찬성한다.
하지만 재판소원을 도입하도록 헌법재판소법이 바뀌면 그건 위헌법률이라며 반대하는 의견이 있다.
여기에는 대법원이 함께한다.
반대 주장의 줄기는, 재판소원은 좋다 나쁘다를 논하기 전에 헌법위반이므로 논의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재판소원이 헌법위반이라는 근거로는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속한다.
”라는 헌법 제101조 제1항을 든다.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뉴시스 국가기관의 인권침해를 감시하는 일이 헌법재판이다.
1988년 헌재가 개소해 헌법재판을 해보니, 인권침해는 국회의 법률 제정 단계뿐 아니라, 법원의 법률 해석 단계에서도 발생했다.
이런 문제를 맞아 헌재가 한정위헌 결정을 시작했다.
한정위헌 결정이란 이런 것이다.
1980년대 법원은 사죄광고 명령을 자주 내렸다.
근거는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 자에 대하여는 법원은 … 명예회복에 적당한 처분을 명할 수 있다”라는 민법 제764조다.
‘적당한 처분’으로 법원이 사죄광고를 만들었다.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이에 1991년 헌재는 “민법 제764조의 ‘명예회복에 적당한 처분’에 사죄광고를 포함시키는 것은 헌법에 위반된다”라고 결정했다.
법원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후로는 이런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헌재가 법률을 통제하는 체하면서 사실은 재판을 통제하고 있다”라고 반발했다.
법률을 통제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조문을 심판하는 일이라고 법원은 말한다.
이에 헌재는 조문(條文)이 아니라 규범(規範)을 심판하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그러면서 법원 주장이 맞는다면 ‘제1호 내지 제4호’라는 조문에 제2호가 없는데도, “제2호는 헌법에 위반된다”라는 헌재 결정(93헌가1)을 받아들이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
하지만 법원이 물러서지 않으면서 헌법재판에 공백이 생겼다.
의회 단계부터 위헌인 법률을 법원이 적용할 때는 헌재가 위헌 무효로 만들 수 있지만, 의회 단계에서는 합헌이던 법률이 법원 적용을 거쳐 위헌이 되면 방법이 없었다.
가령 법원은 노동자의 파업을 형법 제314조 제1항 업무방해죄로 처벌한다.
헌법 제33조 제1항이 보장하는 파업의 본질적 속성은 업무방해인데도 이를 처벌했다.
의회 단계에서는 합헌이던 업무방해죄가 법원의 적용을 거쳐 위헌이 된 셈이다.
헌재는 이 문제에 “쟁의행위는 고용주의 업무에 지장을 초래하는 것을 당연한 전제로 한다”라면서도 “법원이 쟁의 과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하여야 할 사항”이라고 2010년 적고 말아야 했다.
이 밖에도 위헌이 의심되는 판결이 드물지 않았다.
재판이 위헌 상황을 해소하기는커녕 오히려 불러온다는 비판까지 나왔다.
오영준 헌법재판관 후보자가 1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 출석해 의원 질의에 답하고 있다.
오 후보자는 재판소원에 대해 "입법·행정·사법작용 모두 헌법소원심판의 대상에 포함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뉴시스 위헌을 의심케 하는 법원 재판은 계속 늘었다.
과거 군사정부는 경찰과 군인을 시켜 시민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씌웠다.
이런 국가범죄가 드러난 계기는 2005년 제정된 과거사정리법이다.
이 법에 따라 만들어진 과거사위원회가 2006~2009년 조사를 벌여 진실을 밝혔다.
피해자들은 2009~2011년 법원에 형사 재심을 청구해 무죄를 받았다.
이때부터는 불법행위를 저지른 상대방, 즉 국가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했다.
손해를 배상하라고 했다.
오래된 일들이라 소멸시효가 문제였다.
세계적으로 국가범죄나 인권범죄에 대해서는 소멸시효를 없애는 경우가 많다.
대법원도 처음에는 과거사 사건의 소멸시효를 배제했다.
그러다가 2013년 5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민법이 정한 단기 소멸시효 3년을 적용한다고 선언했다.
이때는 박근혜 대통령 취임 석 달 뒤다.
같은 해 12월에는 이해가 어려운 이론을 구성해 6개월로 줄였다.
군사정부 피해자들이 줄줄이 패소했다.
소멸시효를 이유로 손해배상이 거부된 사람들이 헌법소송을 제기했다.
헌법재판소는 소멸시효를 과거사 사건에는 적용하지 말라고 2018년 결정했다.
이날 전에 없던 새로운 주문(主文)을 선보였다.
‘적용되는 부분은 헌법에 위반된다’가 등장했다.
“민법 소멸시효 조항 중 과거사정리법에 규정된 사건에 적용되는 부분은 헌법에 위반된다.
” 이렇게 문장을 바꾸며 ‘한정위헌’이 아니라 ‘양적 일부위헌’이라고 했다.
헌재가 주문형식에 이름을 뭐라 붙여도 법원으로서는 차이가 없었다.
심지어 헌재 결정의 반대의견 재판관 3명부터 이건 한정위헌이라고 했다.
이들은 “구체적 사건에 관하여 사실관계를 인정하고 법률을 해석하여 적용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법원의 역할이다.
… 청구인들의 이 사건 심판청구는 모두 부적법하므로 이를 각하하여야 한다”라고 했다.
법원이 기존 태도를 고수한다면 헌재 결정을 거부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당해 파면된 이후 법원의 소멸시효 판결이 새삼 비난받고 있었다.
여론과 학계의 지배적인 의견도 대법원의 과거사 소멸시효 판결이 정의롭지 않다고 했다.
이듬해인 2019년 대법원이 헌재 결정을 받아들였다.
대법관 4명이 참여하는 소부 결정이었고, 주심은 민유숙 대법관이었다.
내용이 불분명했다.
언뜻 헌재의 결정을 해석에 대한 관여가 아닌 법률에 대한 위헌으로 인정하는 것 같지만 명확하지 않았다.
이 판결을 법원 안팎에서 모두 불만스러워했다.
판사들은 “이렇게 되면 앞으로 법원 판단을 헌재가 일일이 교정할 수 있다는 것이고, 무엇보다 한정위헌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지난 30년 입장이 설명도 없이 뒤집히는 셈”이라고 했다.
외부에서도 석연치 않다고 한다.
“대법원이 견해를 바꿨는지 분명하지 않다.
언제든 한정위헌은 대법원 해석권 간섭이라며 무시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헌재 결정을 입맛에 따라 고르겠다는 얘기가 된다”라고 지적한다.
조희대 대법원장(오른쪽)과 김형두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77주년 제헌절 경축식에 앞서 열린 국회의장과의 사전환담에 참석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재판소원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 적어도 한정위헌 결정을 법원이 받아들이도록 헌법재판소법에 명시해야 한다는 주장 등이 나오는 것이다.
재판소원에 대해 헌법학자 대부분은 헌법위반이 아니며, 따라서 도입은 선택의 문제라고 설명한다.
재판소원 도입이 위헌이라는 학자는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다.
한정위헌을 법원이 인정하도록 명확히 하자는 주장에 대해서는, 헌법재판소가 한정위헌 결정을 하지 않으며, 양적 일부위헌 결정으로 이론이 변경되었으므로 법원이 따르는 일만 남았다고 보기도 한다.
최근 대법원이 이재명 대통령 후보자 선거법 사건 상고심 선고 등에서 드러낸 위헌적 태도는, 법원에 대한 헌법적 통제가 필요하다는 점을 확인시켰다.
대한민국 입법 권력과 행정 권력이 모두 헌법의 통제를 받는데, 사법 권력만 헌법의 통제를 받지 않는 현실은 어떻게든 바뀌어야 한다.
[필자 소개] 이범준 헌법학 박사. 서울대 법학연구소 연구원. 저서로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거의 모든 것(2022)>, <헌법재판소, 한국 현대사를 말하다(2009)> 등이 있다.
기자 시절 대법원 사법농단 비리, 검찰 디지털 개인정보 무기한 저장, 대법원 전자법정 입찰 비리 등을 보도해, 국제앰네스티, 한국기자협회, 한국신문협회 등에서 기자상을 받았다.
법원의 위헌적 판결을 통제하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