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기의 알프스 365 (10)
그린델발트~아이스미어역~미텔레기산장~아이거 정상~아이거요흐~묀히산장
아이거 남릉을 따라 하산 중인 등반팀. 정상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미텔레기 리지다.

빨강은 그린델발트의 색이다.
 벨벳 질감의 베고니아 잎 사이로 젊은 등반가의 생채기 같은 꽃이 광장에 피었다.
 6월에서 9월이 한창인데 스위스 베르너 알프스산군의 등반 시기와 꼭 맞다.
 꽃물이 가장 붉을 때는 산도 계곡도 등반가도 상처투성이다.
 눈 폭풍이 지나간 아침, 정상으로 향한 누군가의 발자국을 마주할 때 밀려오는 패배감. 두려움에 남겨졌던 그린델발트에서 빨강은 곧 상처의 색이다.

날씨가 궂었다.
 하루 맑고 하루 흐렸다.
 이런 반복 앞에 모든 등반 기술은 허사다.
 마을엔 해가 나도 정상에 구름은 걷히지 않았다.
 밤엔 눈폭풍이 시작되고 새벽에 멈췄다.
 우리는 아이거Eiger(3,967m)를 오르기로 했다.
 아이거는 33m가 모자라 82개의 알프스 4,000m 피크에 들지 못했지만 북벽의 악명은 어느 산 못지않게 유명하다.
 예측 불가능한 날씨 변화로 인해 수많은 등반가의 목숨을 앗아간 역사가 있다.
 날씨 때문에 우리가 선택한 루트는 좀 더 안전한 미텔레기Mittellegi루트다.
 미텔레기란 독일어로 '중간 능선' 이라는 뜻으로 1921년 9월 일본인 유코 마키Yoko Maki가 스위스 가이드 3명과 함께 이 루트를 초등했다.

구름에 둘러싸여 있는 미텔레기산장, 이이거 등반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장소며 역사적인 자산이다.

미텔레기산장은 맛집
등반은 해발 3,159m 아이스미어Eismeer역에서 시작한다.
 이곳은 아이거글레처에서 융프라우요흐로 향하는 융프라우 철도의 중간 지점으로, 알프스의 전경을 감상하는 전망대 역할을 한다.
 열차는 아이거의 내부에 자리한 아이거반트Eigerwand역과 묀히의 내부에 위치한 아이스미어역에서 각각 약 5분간 정차한다.
 아이거반트역에서는 전설적인 북벽의 위용을, 아이스미어역에서는 알프스빙하의 장엄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정차했던 기차가 출발하고 역에 남은 우리들의 목적지는 미텔레기산장이었다.
 역에서 빙하로 나가는 출입구를 눈치로 찾았다.
 상반신만 겨우 들어갈 만한 쪽문으로 먼저 로프와 배낭을 던졌다.
 문은 곧 경계다.
 문명을 등 뒤에 두고 원시의 언어를 흥얼거리며 빙하 위로 올라섰다.

이번 산행의 드레스코드는 레드다.
 일행 셋은 빨간 바지, 빨간 배낭, 빨간 등산화로 색을 맞췄다.
 나이순으로 채도가 높았다.
 설원에서 아이거 남벽으로 이어지는 발자국을 따라 갔다.
 왼편으로 펼쳐진 빙하는 굽이굽이 압도적이었다.
 물을 가둬둔 거대한 댐이 터져 폭파하는 순간을 바로 얼린다면 모양이 저럴까? 경사가 급한 곳의 빙하는 비틀어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아이스미어역에 있는 전망대. 빙하의 상태와 날씨를 살펴 보고 있다.

이곳은 낙빙 구간으로 조심해야 한다.
 바위까지 지체 없이 신속하게 이동하는 것이 좋다.
 바위의 출발점은 낙석 위험이 있으니 장비 준비는 역 안에서 하고 이곳에서는 바로 출발하는 것이 좋다.

바위 아래서 로프 한 동을 풀었다.
 오른쪽으로 난 크랙인데 이곳이 산장 가는 길에 최고 난도다.
 4급으로 볼트가 잘 설치되 있고, 2피치를 오른 후 산장이 보이는 곳까지 걸어서 이동하면 된다.
 미끄러운 곳만 조심한다면 큰 어려움은 없다.
 다만 산장은 매년 7월 첫 주 금요일에 여는데 그 전에 간다면 눈이 많아 산장까지 접근이 어려울 수도 있다.
 이이스미어에서 아이거 동쪽 끝 능선에 위치한 산장까지 약 2시간 거리다.

역에서 빙하로 나가는 출입구. 몸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작은 크기의 구멍이다.

산장에 도착했다.
 산장지기를 '가디언Guardian'이라고 부른다.
 가디언은 수프를 끓이고 있었다.
 미텔레기 헛Hut은 맛집이다.
 100년이 넘은 이 산장은 전통적으로 여성 가디언이 맡아 왔다.
 이곳을 이용하는 투숙객들은 대형 산장들보다 적다.
 30명 내외인데, 음식의 질은 높다.
 산장은 1924년 세워졌다.
 미텔레기 루트 초등 3년 후다.
 산장 건립을 위해 초등자인 유코 마키가 1만 스위스 프랑을 기부했고, 그린델발트 가이드들은 6,000프랑의 비용을 냈다.
 결국 1만6,000프랑을 들여 16명의 등반객을 수용할 수 있는 산장을 완성했다.
 77년 만인 2001년에는 40인 수용 규모의 새 산장이 완공되어 2002년부터 운영되고, 구 산장은 인근 산악박물관으로 옮겨져 남아 있다.
 최근 개보수를 한 시기는 2019년으로 그린델발트 산악 가이드 협회가 주도했다.
 편의 시설들을 최신 스타일로 바꾸었고 수용 인원은 최대 38명으로 제한해 산장의 전통과 환경을 보존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었다.

가디언이 정성을 들인 수프의 맛은 산장을 에워싼 안개만큼 깊고 짙었다.
 지금까지 어느 산장에서도 맛본 적 없는 풍미였다.
 진한 국물은 분명 재료의 선택과 다양한 조리법이 만들어낸 결과일 테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미텔레기능선 위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있다.
 험준한 능선 아래 아이스미어 빙하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스프를 오래 끓이면 재료들 사이에 맛이 어우러지고, 국물에 농도가 생겨요."
그녀는 이내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너 도착하기 전부터 계속 끓이고 있는거 봤잖아?"
문득, 100년 전 이곳에 처음 올라 산장을 세운 젊은 등반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린델발트에서 올려다보면 언제나 안개에 싸여 있던 산장, 오늘은 그 속에 들어와 밤을 보낸다.
 가디언이 예약자 명단을 살피다가 내 이름 위에 형광펜을 가져다 댔다.
 "맞죠?" 하는 눈치였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펜으로 내 이름을 그었다.
 입실이 허락되었다.

그레이트 타워에서 맞이한 알펜글로. 하늘은 서서히 불타오르고, 붉은빛이 얼어붙은 벽과 긴장된 마음을 조용히 녹여냈다.

"이런 곳에서 확보물 설치해야죠!"
'새벽 10분은 오후 1시간.' 등반 격언이다.
 새벽의 부지런함이 오후 등반시간에 큰 영향을 준다는 뜻이다.
 조심스럽게 모포 속을 빠져나왔다.
 서두르지 않으면 앞서가는 다른 팀을 쫓게 된다.
 그것은 지루한 일이다.
 식사를 간단히 마치고 장비를 챙겨 산장에서 나왔다.
 김기식, 강석민 두 선배와 함께였다.

정상으로 이어지는 동쪽 능선을 따라 가는 루트라 길 찾기는 수월하지만 고도가 있어 작은 실수도 치명적이다.
 정상까지 5~6시간 걸릴 것이라 예상하고 출발했다.
 중간 중간 확보물을 설치하지만 서로 로프만 묶고 연등으로 등반 시간을 아꼈다.
 주요 지점들은 고정로프가 설치돼 있어 등반이 수월했다.
 그레이트 타워 아래에 도착하자 해가 떠오르면서 벽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올라온 길을 돌아봤다.
 동료의 검게 탄 얼굴과 주름에 붉은빛이 비쳤다.
 이것은 알펜글로Alpenglow다.
 해 뜨기 전이나 해 질 무렵 산 정상에 붉게 비치는 햇빛을 묘사할 때 쓰이는 말이다.
 공기 중에 붉은색의 산란으로 선명하게 보이는 현상으로 높은 고도에서 공기의 농도, 대기 오염이나 수증기의 영향을 덜 받기 때문이라고 한다.
 알펜글로가 암벽이나 눈에 반사되면서 붉은 색조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었다.

아이거 남릉을 통해 아이거요흐로 향하는 등반팀. 베르너산군의 연봉들과 빙하는 시간의 흐름을 잊게 해주었다.

그레이트타워를 지나니 발아래 허공이 천길이었다.
 강석민 선배가 선등자로 나섰다.
 그는 망설임 없이 바위를 치고 올랐다.
 확보물 하나 없이 30m를 넘게 리드한 그의 선택에 불안을 느낀 나는, 피치에서 만나자마자 말을 쏟아냈다.

"이런 곳에선 적어도 한두 개쯤은 걸고 올라야죠."
하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 기억이 나를 찔렀다.
 나 역시 앞서던 구간에서 확보물 없이 속도를 택했으니, 다를 게 없었다.
 두 선배는 내 판단을 신뢰하고 묵묵히 따랐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 순간 떠오른 단어 하나 '내로남불'. 그 말의 무게가 고도만큼이나 깊고 무겁게 다가왔다.
 판단과 신뢰 사이에서 흔들린 순간이었다.
 정상에 가까워지자 암릉이 끝나고, 눈이 덮인 칼날 능선이 시작되었다.
 크램폰을 단단히 조여 착용하고, 배낭에서 피켈을 꺼내 손에 쥐었다.
 암릉에서 설릉으로 다시 암릉으로 이어지는 다양한 등반이 주는 경험이 알파인 등반의 재미 아닐까 싶다.

정상부 나이프 리지 통과 중, 급변하는 날씨로 시야 확보가 어려웠다.
 구름과 안개가 시시각각 능선을 덮쳤다.

그린델발트에서 올려다 보는 아이거 정상은 늘 안개에 가려 있었다.
 북벽 아래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가장 거세게 받아내서 그렇겠지. 역시 설릉 위로는 짙은 안개로 앞이 보이지 않았고, 선등자조차 연무 속으로 사라지곤 했다.
 가끔 안개가 옅어지는 짧은 순간을 틈타 전진하고, 시야가 닫히면 멈춰서는 식의 반복으로 나아갔다.
 GPS를 통해 고도와 위치를 확인해 겨우 우리가 정상에 서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 틈을 타 인증 사진을 남기고 서로의 등정을 축하했다.

내려오는 길에 생각했다.
 100년 전 이 루트를 만든 일본의 젊은 등반가 유코 마키가 옆집에 살았으면 좋겠다고. 쿠팡에서 받은 택배 박스를 들고 있는 그를 계단 어디에서 마주치거나, 주차장에서 차를 빼달라는 그의 전화를 받고 싶다고. 그가 미텔레기능선에 뿌려놓은 붉은 포자가 얼마나 자라났는지, 산장의 수프는 얼마나 맛있는지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infomation
그린델발트는 아이거 북벽 아래 자리한 스위스 알프스의 산악 마을로, 사계절 내내 하이킹, 등산, 스키어로 북적이는 융프라우 지역의 관문이다.
 자연과 모험이 어우러진 장엄한 풍경을 선사하고 목조 가옥들 사이로 만년설이 빛난다.
 여름에는 하이커와 패러글라이더로 붐빈다.

겨울엔 눈부신 매력적인 리조트와 설원으로 스키어들이 모인다.
 피르스트 전망대나 글레처슐루흐트 협곡 같은 다채로운 명소들이 인근에 있어, 여유로운 여행자 트레커, 등반객들까지 많이 찾는 산악 마을이다.

그레이트 타워
초등 당시 등반대는 어려운 구간을 참신한 도구로 극복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장비는 특수 제작된 6m 길이의 나무 막대로, 갈고리와 회전형 금속 스파이크가 달려 있어 급경사 암벽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등정 기록은 유코 마키가 1923년에 펴낸
에 23쪽 분량으로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고 한다.

미텔레기산장
1924년 해발 3,355m 위에 지어졌다.
 38개의 침상이 있으며 시즌에 1,000여 명이 이용한다.
 그린델발트 산악가이드협회 소속이다.
 2023년 6월 22일, 아이거 남측 아이스미어역 인근에서 발생한 대형 낙석 사태 때문에 터널 출구에서 바로 빙하 위로 약 20m를 하강하는 것이 좋다.
 하강을 위해 고정 로프와 확보 지점이 설치되 있다.
 이 후 약 200m를 내려가 낙석 퇴적지를 가로질러 산장으로 이동하면 된다.
 예약 https://www.mittellegi.ch/
하산 정보
아이거 정상에서 남릉을 따라 하산할 경우, 약 6~7시간 이상 필요하다.
 약 25m씩 6번 정도 연속 하강을 해야 하며, 각 구간에는 하강용 링이 설치되어 있다.
 비교적 안정적인 하강이 가능하다.
 남릉에서 묀히산장Mönchsjochhütte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설원 구간은 오후에 지나게 되는데 햇볕에 눈이 녹아 발이 빠질 수 있다.
 체력 소모가 커져 예상보다 시간이 요구될 수 있다.

월간산 7월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