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돌로미티 (6) 알타비아 No.2 콘트린산장~펠트레
전반부의 부드러운 초원을 지나, 본격적인 고산지대에 들어서며 매일 새벽, 산장을 나서서 또 하나의 날을 열었다.
날씨는 예측할 수 없었고 길은 거칠었지만, 그 속에서 나 자신과 마주하는 순간들이 깊어졌다.
10일차에 사쏘 스카니아를 지나는 암릉길을 통과하고 있다.
양옆은 낭떠러지여서 손에 땀이 맺히는 구간이라 앞만 바라보며 걸을 수밖에 없었다.
6일차 산양과 들꽃, 두 개의 고개를 넘는 여정
콘트린산장~ 발레스산장Rifugio Capanna Passo Valles, 17.8km
밤새 우렁차게 내렸던 비가 아침엔 잦아들었다.
축축한 공기 속에서 옅은 안개가 피어오르고, 초록빛 산자락은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이 날은 두 개의 고개를 넘어야 했다.
초반 오름길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시렐고개Passo Cirele (2,283m)로 오르는 길에 산양무리를 만났다.
녀석들은 바위 아래서 여유롭게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겁내지 않는 모습은 이미 사람에 익숙해진 듯했다.
고개 정상까지는 바위와 자갈이 널린 황량한 길. 정상에서는 어제 지나온 페니아Penia가 한눈에 보였고, 멀리 사쏘룽고Sasso Lungo 능선이 겹겹이 펼쳐졌다.
하지만 하산 길은 거칠었다.
미끄러운 자갈과 잔설, 습기로 가득한 경사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도 돌밭 사이에 피어난 들꽃이 마음을 환하게 했다.
사막 같은 삭막함도 좋았지만, 역시 살아 숨 쉬는 초원이 마음을 밝혀 주었다.
산을 오르는 사람, 내려가는 사람은 한 점으로만 남았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한 점일 뿐임을 실감했다.
늦은 점심은 포제호수Lago di Pozze 인근의 식당에서 해결했다.
이후 산펠레그리노고개Passo San Pellegrino를 지나 스키슬로프를 따라 고개를 올랐다가 내려와 다시 평원을 걸었다.
지루함이 밀려올 무렵에 두 번째 고개를 넘고 발레스산장에 도착했다.
오늘 하이라이트는 무한리필 샐러드바 저녁식사. 오랜만에 야채와 과일을 실컷 먹을 수 있었던 행복한 저녁이었다.
시렐고개로 오르는 길에 만난 산양무리들이 바위 아래서 여유롭게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7일차 우박과 장대비 속, 가장 험난했던 하루
발레스산장~ 로제타산장Rifugio Rosetta, 14.1 km
이 날의 시작은 평온했다.
날씨는 맑았고, 짧은 일정이라 여유롭게 걸을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고산은 언제나 예상을 뒤엎었다.
초반엔 비교적 부드러운 능선길이 이어졌고, 고산지대 특유의 황량하고 압도적인 풍경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마르게리타고개Forcella la Margherita(2,665m)를 넘어 고도를 높여가며 도달한 파랑골레고개Passo delle Farangole(2,815m)에서 잠시 멈춰 숨을 돌렸다.
이후 본격적인 비아 페라타 구간이 시작되었다.
가파르고 미끄러운 철계단, 발 디딜 틈 없는 좁은 암릉길이 연달아 나타났다.
체력은 빠르게 소진되었고, 점심은 허기를 달래기보다는 의무처럼 넘겼다.
설상가상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바위 길은 더욱 미끄러워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박이 쏟아졌다.
장대비로 이어진 시간 동안 우리는 와이어에 의지해서 무조건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쉴 곳도, 피할 곳도 없었다.
몸속까지 젖어들던 빗물과 싸우며, 속도는 더뎌졌고 긴장은 극도로 높아졌다.
그래도 끝은 있었다.
로제타산장이 가까워지자 빗줄기는 서서히 약해졌고, 구불구불한 바위 계단 끝에 드디어 산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2,581m에 위치한 이 산장은 고립된 지형에 있어 보급품은 모두 헬리콥터로 운반된다.
알타비아 No.2에는 이런 산장들이 많지만 운영자도 이용자도 모두 지혜롭게 그 시스템을 적응하고 활용하고 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건조실. 비가 많은 지역 특성상 설치된 공간으로, 젖은 옷과 등산화를 널어 말리는 동안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샤워는 유료였지만, 젖은 몸을 바람과 빗속에서 떨지 않아도 되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이 날의 산행은 체력 이상의 정신력을 요구한 여정이었다.
뮬라즈산장에 도착하기 직전에 만난 잔설구간은 은근히 길고 비아 페라타 구간까지 이어져서 체력이 무척 소모되었다.
8일차 빙하의 기억과 숲의 위로가 함께한 하산길
로제타산장 ~ 발 카날리Val Canali, 10km
이른 아침, 로제타봉cima delle Rosetta(2,743m)의 붉은 햇살을 받으며 산장 주변을 산책했다.
빗속을 걸었던 길들이 눈에 들어왔다.
빗속을 걸었던 어제가 마치 오래전의 기억처럼 희미하게 느껴졌다.
트레비소산장Rifugio Treviso을 예약하지 못해 프라디달리산장Rifugio Pradidali에서 머문 뒤 프리메로 피에라Fiera di Primero로 가야 해서 비교적 여유 있는 출발이었다.
산장을 출발할 때는 마른 옷과 등산화를 신어 기분이 상쾌했다.
길 가에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빙하 크기의 변화를 보여 주는 설명문이 있었고, 실제로 프라두스타봉Cima di Fraduta( 2,939m) 주변의 프라두스타빙하는 사진보다 훨씬 작아져 있었다.
코메돈고개를 오르기 위해 좁고 가파른 바위 길을 올랐다.
왼편은 절벽 길, 비까지 더해지니 한 걸음 한 걸음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내리막은 길고 고되었다.
지그재그로 이어진 내리막길은 끝없이 이어졌다.
성미 급한 몇몇 트레커들은 가로 질러 내려가다가 미끄러지기도 했다.
발리고개Passo di Bali를 넘어 프라디달리산장에 도착해 잠시 쉰 뒤, 709 루트를 따라 발 카날리로 향했다.
날씨는 점점 더워졌지만 다행히 숲길이 나왔다.
빙하가 녹은 계곡물이 경쾌하게 흘렀다.
물가로 내려가서 더위에 지친 몸을 잠시 빙하물에 담갔다.
한여름인데도 발이 얼얼할 정도로 차가웠다.
발 카날리에 도착해서 트레킹은 마무리되었다.
버스로 프리메로 피에라로 이동했고 모처럼 도시의 여유를 만끽했다.
801 루트를 따라 코메돈고개를 오르다 체레다고개를 바라보니, 체레다산장이 알프스를 닮은 풍경 속에 고요히 자리하고 있었다.
9일차 폭우 속의 진흙길, 그 끝에서 마주한 평화
체레다고개Passo Cereda~ 보즈산장Rifugio Boz, 12.7km
도시에서 하룻밤에 보내고 버스를 타고 체레다고개(1,369m)에 내렸다.
801 루트를 따라 숲속으로 들어서자 '초록 샤워'란 말이 절로 나올 만큼 상쾌한 길이 펼쳐졌다.
그러나 여유로움도 잠깐, 코메돈고개Passo del Comedon (2,130m)까지 고도를 800m 가까이 올려야 했다.
숲길이 끝나니 급경사 바위 길과 절벽 옆길이 이어졌고, 설상가상으로 비아 페라타 구간까지 나타났다.
길은 미끄럽고 비는 세차게 내렸으며, 왼쪽은 낭떠러지라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비를 뚫고 어렵사리 고개에 오르자 거대한 암봉들과 함께 돌로미티의 압도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짧게나마 그 웅장함에 압도당한 채 한숨을 돌렸다.
알타비아 No.2 트레일은 단지, 돌 위에 그려진 삼각형 표식만으로 방향을 알려 주었다.
무인 산장Bivacco Feltre Walter Bodo(1,930m)까지 가는 길은 몇 군데 비아 페라타 구간이 있었지만 비교적 평이했다.
산장에는 3~4개의 2층 침대와 테이블이 있었다.
관리하는 사람은 따로 없지만 깔끔히 정돈돼 있었다.
잠시 빗속을 피해 숨을 고를 수 있는 고마운 공간이었다.
보즈산장까지 가는 길은 허리 능선을 따라 이어졌다.
끊임없는 진흙길은 발을 딛기가 어려울 정도. 베키고개Col dei Bech(1,960m)와 무라고개Passo de Mura(1,867m)를 지나 숲으로 접어들자 긴장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러나 진흙탕처럼 변한 하산길은 끝까지 조심스러웠고, 마지막까지 체력을 소모하게 했다.
비에 젖은 몸으로 보즈산장(1,718m)에 도착했을 때, 내부는 예상대로 열악했다.
16개의 침대가 한 공간에 모여 있었고, 화장실 물도 졸졸 흐를 뿐이었다.
그런데 젖은 옷과 등산화를 씻고 맑게 갠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엔 이상하리만치 평화로웠다.
파란 하늘은 언제 비를 뿌렸는지 모르겠다는 듯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편한 공간에서 맞이한 뜻밖의 평화였다.
젖은 옷을 말리며 마신 커피 한 잔의 여유는 모든 걸 잊게 했다.
악마의 광장을 지나 피에테나고개를 넘어오니 능선 따라 그림처럼 평화로운 초원이 펼쳐졌다.
10일차 험한 능선과 고요한 초원, 돌로미티와의 작별 연습
보즈산장~ 피아즈산장Rifugio Dal Piaz, 13.1km
이 날도 801 루트를 따라 걸었다.
산행 초반은 비교적 평탄했지만, 이내 바위와 돌이 가득한 급경사 구간이 시작되었다.
비아 페라타 구간에서는 절벽 난간에 부착된 와이어를 잡고 조심조심 걸으니 크게 어렵지 않았다.
이 길은 피아즈산장까지 이어지는 긴 고산 능선길로, 주변은 돌산과 협곡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사쏘 스카니아Sasso di Scarnia(2,226m)를 지나는 구간은 그중에서도 가장 아찔했다.
폭이 채 50cm도 되지 않는 암릉길, 양옆은 낭떠러지였다.
손에 땀이 맺히는 구간이라 앞만 바라보며 걸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길은 점점 부드러워졌다.
몬테 라메차Monte Ramezza(2,250m)를 지나며 조망이 트였고, 고산 목초지가 한없이 펼쳐졌다.
마치 알프스의 풍경엽서 속으로 들어온 듯한 장면이었다.
엄청나게 큰 바위들이 가득한 악마의 광장Piazza del Diavolo을 지나니 피에테나고개Passo Pietena. 초원엔 염소와 양떼가 자유롭게 풀을 뜯고 있었고, 똥을 피해 조심조심 그 사이를 걸었다.
능선을 따라 펼쳐진 평화로운 초원을 걷는 순간만큼은 돌로미티와의 작별을 준비하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피아즈산장에는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다.
이곳은 알타비아 2 트레킹에서 마지막으로 하룻밤을 보내는 장소였다.
기대가 컸던 저녁 식사는 지나치게 짜서 전체 일정 중 식사 만족도가 가장 낮았던 산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요하고 부드럽게 마무리된 하루에 대한 고마움은 줄지 않았다.
사쏘 스카니아를 지난 뒤에도, 아찔한 절벽을 따라 이어지는 비아 페라타 구간을 또 한 번 지나야 했다.
11일차 마지막 발걸음, 감사와 작별의 시간
피아즈산장 ~펠트레Feltre, 15.1km
새벽 5시, 창밖을 보니 하늘은 어둡고 잔잔했다.
배낭을 패킹하면서 비를 만나지 않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아침식사를 간단히 마치고 마지막 여정지인 펠트레로 향했다.
22일간의 돌로미티 트레킹이 마침내 끝나는 날. 초원길을 지나 숲길을 걷고, 작은 마을을 거쳐 펠트레에 도착했다.
알타비아 No.1과 2, 트레치메, 사쏘룽고, 알페 디 시우시, 체세다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걸었던 날들이 떠올랐다.
감기로 무척 고생하기도 했고, 비아 페라타 구간과 잔설 구간도 많았지만 무사히 완주했다.
장엄하고 거친 돌로미티의 자연은 매일 새롭고도 놀라운 풍경을 선물해 주었다.
하얀 바위 층으로 이루어진 산과 그 위에 남은 만년설, 끝없이 이어지는 알프스의 파노라마, 거대한 암봉들이 도열한 그 풍경은 산악지대의 진수를 온몸으로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함께 걸어준 산우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서로의 발걸음을 지지하며 버거운 길을 함께 건넜기에 완주의 기쁨은 배가되었다.
이제는 또 어떤 산길에서 어떤 풍경을 마주하게 될까. 맥주 한 잔과 따뜻한 덮밥, 그리고 웃음 섞인 수다 속에서 다음 여정을 그려보았다.
마음 깊이 남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여정이었다.
22일간의 돌로미티 트레킹이 마침내 끝나는 날. 피아즈산장에서 출발하는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기쁨으로 충만했다.
알타비아 No.1과 No.2, 무엇이 다를까?
알타비아 No.1은 '클래식 루트'라 불릴 만큼 돌로미티의 전형적인 풍광을 가장 느낄 수 있는 길이었다.
비교적 부드러운 능선과 잘 정비된 산장, 적당한 오르막과 내리막은 초보 트레커에게도 무리 없는 여정이었다.
길은 비교적 안전했고, 날씨 변수에 따라 큰 영향을 받지 않는 구간이 많았다.
알타비아 No.2는 돌로미티의 '심장부'를 관통하며, 더욱 거칠고 험준한 지형을 품고 있었다.
매일 하나 이상의 고개를 넘어야 했고, 초보자에게는 쉽지 않은 비아 페라타 구간이 많았다.
돌길, 진흙길, 바위길, 잔설과 낭떠러지 등 돌로미티의 거친 숨결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알타비아 No.1에 비해 산장수가 무척 적고 산장 사이의 거리가 길었다.
알타비아 No.1이 '걷는 즐거움'을 맛보게 해주는 길이라면, 알타비아 No.2는 '산과의 싸움' 속에서 나를 돌아보게 하는 길이었다.
No.1에서 만난 풍경이 그림엽서 같았다면, No,2에서 마주한 풍경은 웅장하고도 원시적인 힘이 느껴졌다.
특히 7일차, 파랑골레고개를 넘는 날과 9일차, 폭우 속에 코메돈고개를 오르던 시간은 돌로미티가 얼마나 장엄하면서도 냉정한지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두 루트 모두 각자의 매력이 뚜렷했다.
서로 다른 결을 가진 길이었다.
그 덕분에 돌로미티를 더 깊고 넓게 느낄 수 있었다.
월간산 7월호 기사입니다.
천사와 악마가 공존…두 얼굴의 돌로미티 [나홀로 세계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