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절벽 한켠에 위치한 미륵좌상 암굴.현재 미륵좌상의 흔적은 없지만, 전망이 수려해 동석산을 찾는 등산객들은 꼭 들러야 하는 필수 코스가 됐다.
나보다 한참 어리지만 항상 친구 같고 때로는 언니 같은 김혜연은 10여 년을 함께 걸어 온 나의 백패킹 동무이다.
그만큼 생각도 깊고 배려가 많은 동생이다.
국내는 물론 해외원정도 함께 다니며 지내 온 시간만큼 어쩌면 가족보다도 더 서로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를 잘 알고 있다는 자만이 오히려 서로에게 오해와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걸 간과했다.
혜연이의 사소한 행동 하나를 곡해하며 국어사전에만 있고, 내 인생 사전에는 없을 것 같았던 '밴댕이 소갈딱지'를 몸소 실천했다.
속절없이 시간은 흐르고, 혜연이를 마음 한구석에 간직한 채 유치함의 끝판왕을 갱신하던 어느 날 그녀에게 메시지가 왔다.
네팔 원정 소식을 듣고 '안전하게 잘 다녀오라'는 것이었다.
메시지를 읽으며 그녀가 얼마나 숙고하며 써내려 갔을지 짐작이 갔다.
안심과 반가움이 컸지만 그만큼 어색함도 짙어 단박에 회신을 하지는 못했다.
몇 번을 썼다 지웠다.
결국 '다녀와서 보자'는 말을 한 페이지 가득 담아 회신을 했다.
그리고 또 두 달을 보내고 나서야 용기를 냈다.
"김혜연! 우리 헤어진 지 1주년 기념으로 전화했어!"
그녀 특유의 절제된 웃음과 투정이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다.
그동안 서로가 고팠던 만큼 당장 '우리들의 고해성사' 백패킹을 가기로 했다.
아끼고 아껴 두었던 민미정의 백패킹 리스트 폴더를 열었다.
암릉을 좋아하는 우리의 취향에 맞게 전남 진도 동석산으로 정했다.
혜연이는 낙조를 보며 비박하자고 했다.
날도 더우니 좋은 생각이었다.
텐트가 없어서 물 외에 장비와 음식을 최소화했다.
삼각점봉에서 바라 본 동석산 바위능선. 급경사와 칼바위 능선 등 위험 구간에는 안전 난간과 우회로가 있어 초보자도 안전하게 동석산을 감상할 수 있다.
세방낙조 전망대 '출입금지'
기차역에서 만난 혜연이는 그대로였다.
멋쩍게 안부인사를 나누었다.
처음엔 살짝 어색했지만, 이내 전처럼 웃음 섞인 편안한 대화가 오갔다.
택시를 타고 달리다 보니 진도 평야 위에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 능선이 눈에 들어왔다.
동석산은 높이 219m로 낮지만, 군더더기 없이 깎아지른 기암 절벽이 능선으로 이어졌다.
설악의 공룡능선과 다르게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면서도 기세 등등한 위엄이 느껴졌다.
들머리인 종성교회 앞에서 내렸다.
잠깐 서있었을 뿐인데,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진도는 이미 한여름이었다.
교회를 지나 오솔길로 들어섰다.
강렬한 태양을 가려주는 것도 잠시 오솔길을 벗어나자 암릉이 나타났다.
숨이 턱 막혔다.
조잘대던 우리는 말이 없어졌다.
따끈따끈하게 달궈진 철제 난간에 의지하며 가파른 암릉을 올랐다.
뒤로 논밭이 모자이크처럼 펼쳐진 진도 평야가 한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풍광도 잠시, 한자리에 머물러 있기엔 너무 뜨거웠다.
거대한 낙타 등 같은 바위산은 둥글둥글하지만, 호락호락하지도 않았다.
계단을 따라 오르내리다 반대쪽에서 오는 어르신 두 분을 만나 인사를 나눴다.
종성교회 들머리에서 올라가면 금세 암릉과 마주한다.
시원스레 펼쳐진 평야를 곳곳에서 감상할 수 있다.
"세방낙조 전망대가 멋있나요?"
인사만 하기 멋쩍어 물었는데, 귀한 정보를 얻었다.
"어!? 거기 전망대 지금 막아 놨던데요?"
보수공사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막아 놨다면 그곳에서 비박은 못 할 것이다.
우리는 미륵좌상 암굴에서 비박하기로 했다.
낙타 등 같은 바위 하나를 넘고 나니 암굴이 보였다.
반을 자른 거대한 식빵 같은 암벽 한 구석에 구멍 하나가 덩그러니 파여 있었다.
누가 봐도 영험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암굴 안 양쪽으로 검게 그을린 자국이 있어 해골 같기도 했다.
가파르지만 오밀조밀 붙어 있는 빨간 계단을 내려갔다.
암굴은 보기보다 더 넓었다.
옛날에는 미륵좌상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해골의 눈처럼 보였던 그을림은 아마 그때 켜 놓은 촛불에 그을린 자국인가보다.
음침하거나 무섭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늑했다.
이미 오후 2시를 훌쩍 넘었지만, 늦게 방문하는 관광객에게 민폐가 되지 않도록 배낭은 암굴 입구 한쪽 구석에 내려놓았다.
해가 길어졌으니 배낭 없이 왕복 5시간이면 충분할 듯했다.
물과 드론만 챙겨 들고 세방낙조 전망대로 향했다.
삼각점봉을 오르는 김혜연씨. 위험 구간마다 계단이 놓여 있어 쉽게 오를 수 있다.
계단과 난간이 없었다면 난이도는 공룡능선 못지 않았을 것이다.
칼바위를 지나 급경사에 놓인 계단을 올라섰다.
앞에는 까마득히 내려가는 철계단이 있었다.
오른쪽으로 사람들의 흔적이 짙은 샛길이 하나 더 있었다.
바위 능선을 타는 길이다.
하지만 그곳에는 경고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안전사고 예방 및 자연 생태계 보호를 위해 출입을 통제'한다는 것이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낙하하는 롤러코스터처럼 곤두박질치듯 철계단을 내려갔다.
길은 숲으로 이어졌다.
따가운 햇살은 피했지만 바람 한 줄기 없는 숲 속도 덥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하산인가 싶을 정도로 계속 내려갔다.
우회길이라고 녹록하지는 않았다.
속살까지 매콤한 동석산 정상에 도착했다.
잠시 바람에 쉬어 갈 겸 앉아서 드론을 띄웠다.
타 들어가는 현실과 달리, 모니터 속의 동석산은 푸른 초록이 시원스레 펼쳐져 있었다.
잠시 머물렀을 뿐인데, 뜨겁게 달군 프라이팬에 올려진 달걀 마냥 익어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해가 지고 나서야 암굴에 도착할 것 같았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미륵좌상 암굴에서 비박하고 맞이한 새벽녘. 해가 뜰 무렵 세상을 뒤덮은 여명이 진도 평야와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그려냈다.
드론으로 보았던 거대한 칼바위를 지나는가 싶었는데, 우회길이 있었다.
쉬운 듯 가파른 숲길을 지나 다시 암릉을 마주했다.
철제 난간에 의지한 채 절벽을 올라섰다.
매끈한 고래 같은 거대한 암릉 덩어리가 나타났다.
고래등을 올라타기 위해 가파른 수직 계단을 올랐다.
사방이 산과 바다, 논밭으로 볼거리가 풍부했다.
무엇보다도 동에서 서로 장쾌하게 펼쳐진 암릉들이 압권이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살필 겸 드론을 띄웠다.
암굴에서 솔직 담백한 시간
세방낙조까지는 숲길로 이어졌다.
이미 4시가 훌쩍 넘었다.
가볍게 생각하고 물 한 병만 들고 왔던 터라 더이상 마실 물도 없었다.
1.3km의 바위 능선을 너무 얕잡아봤다.
아니 어쩌면 물은 핑계였는지도 모른다.
수도꼭지처럼 쏟아지는 땀과 스테이크처럼 익어가는 몸뚱아리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어차피 낙조는 포기했으니, 이만 돌아가기로 했다.
대신 혜연이가 좋아하는 바위를 맛볼 시간은 벌었다.
주의 팻말이 있던 거대한 칼바위 능선 전까지는 올라도 될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드론을 띄웠다.
혜연이는 우리가 올라왔던 철제 난간을 지나 거대한 낙타 등 위에 올라탔다.
작은 기체는 혜연이를 따라 비행했다.
여유롭게 걷는 혜연이의 모습을 지켜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녀가 안전하게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드론을 회수했다.
우회길을 따라 잰걸음으로 혜연이가 기다리는 곳으로 갔다.
둘 다 땀 범벅이 된 채, 왔던 길을 되돌아가 암굴에 도착했다.
덥지만 맑은 날씨 덕분에 우리가 잠든 동안에도 밤새 움직이는 수많은 별을 담을 수 있었다.
혜연이가 갓 녹아 딱 먹기 좋은 생과일 디저트를 꺼냈다.
온몸에 청량감이 퍼졌다.
뒤쪽 서편 하늘이 불그스레 물들고 있었다.
저녁식사로 봉지 만두와 말린 통밀빵을 차렸다.
혜연이는 파우치에 봉지 만두와 발열팩을 넣고 물을 부었다.
뚝딱이었다.
내가 챙겨온 발열쿡은 꺼낼 필요도 없었다.
간소하게 차린 저녁식사를 하며 그동안 오래 묵혀 발효된 지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 어느때보다 솔직 담백한 시간이었다.
어둠이 내리고, 잠자리를 만들었다.
혜연이는 침낭과 침낭 커버를 준비했다.
나는 비비색 안으로 들어가 메시만 남기고 지퍼를 잠갔다.
바로 눈앞에 북두칠성이 떠있었다.
"오!! 혜연아! 우리 위에 북두칠성 보여?"
"네! 근데 언니. 저 밤새 모기랑 싸워야 할 것 같아요!"
침낭 커버에는 메시가 없었다.
버그용 메시를 따로 준비했지만, 메시가 얼굴에 닿는 부분만 골라 모기가 공격을 하는 것이었다.
하필 둘 다 버그 스프레이 챙길 생각은 못 했다.
"혜연아! 비비색으로 들어와. 꼭 끌어안고 같이 자자!"
"거길 어떻게 둘이 들어가요!"
혜연이는 특유의 웃음 섞인 말투로 투덜댔다.
"뭐 어때! 모기한테 헌혈하는 것보다 낫지~!!"
결국 혜연이는 밤새 쏟아지는 별만큼 얼굴에 모기의 키스마크를 새겨야 했다.
동석산은 높이가 낮지만, 등산로가 급경사로 이어져 있어 체력안배와 안전사고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절 근처 고양이 100마리
다음날 해가 뜨자마자 자리를 정리하고, 천 개의 종을 매달았다는 천종사로 하산했다.
마파람이 불면 은은한 종소리를 낸다고 하여 암굴에서 내려오는 골짜기를 종성골이라고 한다.
동석산을 등지고 있는 천종사는 절경이었다.
부드러운 바람에 울리는 종소리를 따라 고양이들이 아침손님을 맞이하러 나왔다.
우리를 둘러싼 고양이들에게 당황하고 있던 순간, 스님이 다가오셨다.
고양이가 100마리 정도 있는데, 모두 유기묘라는 것이다.
마침 스님은 길가에 고양이들의 먹이를 뿌려주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수많은 고양이의 먹이는 동네 사람들이 조금씩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스님은 영험한 곳에서 하룻밤을 잘 보냈다며 다음엔 여유롭게 절에 들르라고 했다.
동물을 좋아하는 혜연이는 다음 방문할 땐 고양이들을 위한 '츄르'(고양이들의 최애 간식)를 잔뜩 준비하겠다고 다짐했다.
역시 혜연이는 여전히 혜연이 다웠다.
민미정 깨알 팁
<아무도 묻지 않아도 알려주고 싶은 정보>
산행정보
산행코스 종성교회(들머리) → 미륵좌상 암굴 → 동석산 정상 → 가학재(회귀) → 동석산 정상 → 미륵좌상 암굴(비박) → 천종사(날머리)
산행거리 및 시간 총 거리 왕복 4.5km, 소요시간 3시간(휴식시간 제외)
비화식 백패킹 팁!
발열 도시락
장점
겨울처럼 오랜 시간 보온을 유지한 채 먹어야 할 경우 사용하면 좋다.
단점
도시락을 설거지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패킹 시 공간을 차지한다.
발열 파우치
발열 파우치
장점
인스턴트 음식을 가볍고 빠르게 익히거나 데울 수 있다.
패킹 사이즈가 작고 가벼워 BPL에 최적이다.
단점
음식을 섭취하는 동안 보온을 유지할 수 없으므로, 겨울 백패킹에는 빨리 먹어치워야 한다.
월간산 7월호 기사입니다.
바위굴에서 하룻밤, 스님이 말했다 "영험한 데서 잘 잤군요" [낭만야영 동석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