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세계여행] 이탈리아 돌로미티 (4)
아름다운 경치로 유명한 가르데치아산장 주변은 피크닉과 트레킹의 중요한 출발점일 뿐만 아니라 가족 단위 여행객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알타비아1을 끝내고 알타비아2를 앞둔 잠깐의 휴식 타임. 간단하게 간식만 넣은 데이배낭을 메고 렌트카로 들머리까지 이동해 가볍게 돌로미티 명소를 둘러보았다.
우연하게도 그곳에는 예부터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었다.
걷는 길마다 바람이 불었고 돌멩이 위로 시간이 스쳤고 그 사이로 전설이 속삭였다.
장미정원을 지키려 했던 난쟁이 왕의 분노, 무지개에 마음을 담은 마법사의 후회, 그리고 바위로 굳은 거인의 손바닥까지. 돌로미티는 단지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누군가의 이야기를 가만히 품고 있는 커다란 책 같았다.
나는 그 책의 페이지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말없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길이었다.
읽지 못한 페이지에는 어떤 길이 있을지 궁금해진다.
걷고 싶은 길이 늘어나서 행복해진다.
다섯 손가락 이야기, 사쏘 룽고 트레킹
돌로미티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사쏘 룽고Sasso Lungo(3,181m). 이탈리아어로 사쏘Sasso는 바위, 룽고Lungo는 길다는 뜻. 그러니까 '긴 바위' 혹은 '거대한 바위'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다.
사쏘 룽고(독일어로 랑코펠Langkofel) 산맥은 돌로미티산맥의 발 가르데나와 발 디 파사 사이에 위치한 산맥으로 동쪽으로는 거대한 셀라산맥, 서쪽으로는 로젠가르텐Rosengarten산맥과 접하고 있다.
마치 칼로 베어낸 듯한 바위 절벽군이다.
사쏘 룽고는 돌로미티산맥에서 9번째로 높은 봉우리이다.
사쏘 룽고에 전해오는 이야기는 조금 마음이 아프다.
이곳에는 선량한 거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 중 한 명이 랑코펠이었다.
그는 교활하고 거짓말을 일삼다가 드디어는 농작물을 훔치고는 숲속 동물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
결국 다른 거인들은 그의 죄를 밝혀내었고, 그를 땅속에 묻어버렸다.
하지만 랑코펠은 끝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의 손만이 땅 위로 남게 되었는데 바로 이 손이 바로 오늘날 사쏘 룽고산군의 '다섯 손가락Punta delle Cinque Dita'으로 알려진 바위 봉우리라고 한다.
바이올렛 타워 바로 아래에 위치한 바이올렛산장. 로젠가르텐을 파노라마뷰로 감상할 수 있고 다양한 트레킹 및 등반 루트의 중심지이다.
사쏘 룽고에서 세체다, 알페 디 시우시, 로젠가르텐 등으로 연결되는 파노라마 풍경이 참 장엄하다.
이미 세체다와 알페 디 시우시 등지에서 여러 번 바라보아서 익숙한 실루엣이지만 셀라고개와 사쏘 룽고 고개에서 마주하니 가슴이 탁! 막힐 정도로 엄청나다.
사쏘 룽고를 제대로 느끼기 위한 가장 멋진 트레킹은 사쏘 룽고 패스까지 곤돌라로 이동해서 525번 루트를 따라 몬테파나까지 걷는 코스이다.
거리는 약 11km. 넉넉하게 4시간 정도 소요된다.
사쏘 룽코 서킷 트레킹도 있지만 다음 기회를 엿보기로 한다.
이 루트는 웅장한 바위산과 부드러운 알프스 초원을 한 번에 경험할 수 있는 트레킹 코스로, 돌로미티에서 꼭 걸어봐야 할 트레일 중 하나이다.
사쏘 룽고 패스까지 텔레캐빈 곤돌라 리프트Telecabine Gondelbahn를 이용했다.
마치 전화부스를 닮은 아담한 곤돌라는 다소 아찔한 탑승감을 주지만, 생각보다 안전하고 흥미롭다.
특히 체구가 큰 서양인들에게는 꽤 비좁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곤돌라에서 바라보는 풍경만으로도 이곳에 온 이유가 충분하다.
아래 계곡에는 걸어가는 사람도, 자전거를 끌고 오르는 사람도 눈에 띈다.
각자의 방식으로 돌로미티를 즐긴다, 곤돌라를 타고 오르며 사쏘 룽고는 마치 나와 부딪칠 것처럼 점점 가까이 압도적으로 다가온다.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는 풍경이다.
바이올렛산장에서 내려다보면 대자연의 품안에서 걷는 사람들의 모습도 한 편의 풍경화이다.
곤돌라로 올라 도착한 사쏘 룽고 고개Forcella del Sassolungo. 이곳에 있는 토니 데메츠 산장Rifugio Toni Demetz(2,685)에는 이미 많은 관광객들은 사쏘 룽고뿐 아니라 마주보이는 셀라산군의 파노라마 풍경도 즐기고 있다.
주변 조망만 보고 다시 내려가는 사람들도 많지만, 트레킹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조금 더 걸어보기를 추천한다.
정상 산장 뒤편에서 시작되는 하산 루트는 약 7~8km. 525번 루트를 따라 사쏘 룽고의 허리를 도는 코스다.
지그재그로 이어진 길에는 이미 앞서간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걷고 있다.
초반은 눈이 녹지 않은 너덜길이다.
급경사 구간도 있고 돌이 많아 미끄럽기도 해서 살짝 긴장감이 감돈다.
이럴 때 등산용 스틱은 필수! 하지만 아이들도 꽤 많이 걷는 것을 보면 생각만큼 위험할 정도는 아니다.
트레킹 중간 중간,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는다.
바위와 눈, 꽃과 초원이 어우러진 풍경에 힘든 줄도 모른다.
고개를 돌리면 왼쪽으로 세체다, 오른쪽으로 로젠가르텐이 보인다.
눈도 마음도 시원해진다.
데메츠 산장 뒤로 사쏘 룽고의 허리를 도는 525번 루트.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부자의 모습이 참으로 따스하다.
사쏘 룽고의 허리를 돌아가면, 어느새 초원길이 펼쳐진다.
목장과 꽃밭이 이어지는 길은 조망도 뛰어나고 걷기에도 부담 없다.
특히 알페 데 시우시 방향으로 이어지는 꽃길은 산책하듯 걷기에 딱 좋은 길이다.
많은 이들이 걷기를 멈추고 풀밭에 누워서 쉼의 시간을 만끽하거나 주변 조망을 하며 힐링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금까지 걸었던 낯익은 길들의 풍경이 참으로 친근하다.
돌로미티와 정이 듬뿍 들어간다.
종일 이대로 머물러도 좋겠다.
마음과 몸을 추스르고 리프트 승강장으로 향하면서도 꽃길과 초원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바람까지 곁에 머물러 준다.
행복이라는 단어가 막힘없이 술술 공기 속으로 팝콘 터지듯 흩어진다.
곤돌라에서 마주하는 사쏘 룽고의 장엄한 풍경.
장미정원의 전설, 로젠가르텐 트레킹
로젠가르텐은 이탈리아어로 '치마 카티나치오Cima Catinaccio'라고 부르는데 '장미정원'이라는 뜻이다.
돌로미티의 대표 미봉 중 하나다.
단일 봉우리가 아니라, 길이만 약 8km에 이르는 거대한 암봉군으로 날카로운 톱니 모양의 바위 능선이 인상적이다.
해 질 무렵 붉게 물드는 모습은 보는 이의 숨을 멎게 한다.
로젠가르텐 이름에는 아름다운 전설이 담겨 있다.
오래전, 난쟁이 왕 라우리노는 이곳에 장미로 가득한 정원을 가꾸었다.
그러나 어느 날 인간 왕자가 그 정원에 침입해 요정 공주를 데려가자, 라우리노는 분노하며 저주를 내렸다.
"이 정원은 낮에도, 밤에도 아무도 볼 수 없게 하겠다.
"
하지만 그는 황혼을 잊었다.
그때부터 이 산군은 해 질 무렵마다 장밋빛으로 물들여진다고 한다.
이 장면을 가장 가까이에서 조망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바이올렛산장Rifugio Vajolet이다.
이 산장은 바이올렛 타워Vajolet Towers 아래, 카티나치오 지역에 위치해 있으며 다양한 트레킹 및 등반 루트의 중심지다.
바이올렛산장으로 오르는 길에서는 왼쪽으로 로젠가르텐, 정면으로는 바이올린을 세워둔 듯한 바이올렛 타워, 오른쪽으로는 페라타 델레 스칼레테Ferrata delle Scalette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사쏘 룽고 트레킹에서는 세체다, 알페 디 시우시, 로젠가르텐 등으로 연결되는 풍경이 펼쳐진다.
로젠가르텐 주변의 수많은 트레일 중에서 선택한 루트는 가르데치아산장에서 바이올렛산장까지 왕복 4km. 이 루트에선 바이올렛 타워를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다.
평소 걷던 길에 비하면 많이 짧지만 오늘은 쉬어가는 날이니까. 바이올렛 타워를 즐긴 후에는 카레차호수도 가야 하니 결코 짧은 거리는 아니라고 내 마음대로 판단을 한다.
트레킹의 시작점인 가르데치아산장까지는 자동차나 케이블카를 이용할 수 있다.
센티에로 델레 레겐데Sentiero delle Leggende에서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가르데치아산장까지는 1시간 정도 걸어야 한다.
차량을 이용할 경우에는 10시부터 16시까지 차량 진입이 제한되므로 시간 계획도 꼭 필요하다.
문시온Muncion에 도착해서야 차량 진입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차를 문시온에 주차하고 트레킹을 시작한다.
문시온부터 가르데치아산장까지 거리는 편도 4km. 산책 느낌으로 편하게 다녀오려던 길이 왕복 8km가 늘어났으니 제대로 트레킹을 하게 되었다.
사쏘 룽고의 허리를 돌아가면 마주하는 초원길. 목장과 꽃밭이 이어지는 길은 조망도 뛰어나고 걷기에도 부담 없다.
가르데치아산장까지는 이정표가 잘되어 있어서 길 찾기는 불편하지 않다.
걷는 내내 뒤로는 라테마르산군Latemar Group, 앞으로는 로젠가르텐이 펼쳐진다.
도로가 아닌 숲길로 들어서면 물소리가 청량하게 들려온다.
하늘이 맑으니 햇살은 따갑지만 바람은 선선해서 걷기엔 더 없이 좋다.
의도치 않게 트레킹이 길어진 것이 다행이다.
이런 멋진 길은 더 길게 걸어도 좋다.
카페 겸 레스토랑인 말가 쿨레르Malga Couler에서 맛있게 점심식사를 하고 출발한다.
조금 걸으니 주변에 넓은 주차장이 있다.
그런데 주차장이 만차이다.
모두들 이곳으로 들어오는 도로 통행 가능시간을 알고 있음이다.
이탈리아뿐 아니라 해외여행을 하다보면 특정 시간대에는 진입이 불가한 지역들이 꽤 많은데 미리 확인하지 않은 것이 실수이다.
식사를 하고 나오니 풀밭에 많은 사람들이 한가로이 누워 있거나 앉아 있다.
이미 트레킹을 마친 사람들도 보인다.
트레킹이 아니라 피크닉을 즐기러 온 이들도 많다.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편한 모습으로 쉬어가는 사람들을 보니 급 피크닉 모드로 전환하고픈 생각이 든다.
돌로미티 트레킹에서는 어린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산으로 향하는 길 입구에 있는 안내판에는 로젠가르텐산군의 수많은 트레일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다.
돌로미티는 걷는 이들에게 그야말로 천국 같은 곳이다.
어린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들, 반려견과 함께 걷는 이들, 노부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이 길을 걷는다.
바이올렛산장에 가까워질수록 돌길이 점점 거칠어진다.
자칫 조심하지 않으면 발 부상을 염려할 정도. 그런데 아이들도 참 잘 걷는다.
몇몇 아이들은 스틱도 아주 능숙하게 사용한다.
어려서부터 이런 길을 부모와 함께 다녔으니 당연하겠지.
바이올렛산장의 고도는 2,243m. 그 너머로는 바이올렛 타워가 우뚝 솟아 있다.
해발고도가 약 2,800m인 세 개의 바위 첨탑은 그리 높지 않지만, 날카로운 실루엣과 하늘을 찌를 듯한 존재감이 인상적이다.
칠레의 토레스 델 파이네와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닌다.
'바이올렛Vajolet'은 이 지역 계곡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날카롭고 남성적인 바위 능선 속에서도 바이올렛 타워는 우아하게 솟아 있고 해질녘에는 바위가 보랏빛을 띠기도 해서 부드러운 이미지로 기억된다.
멀지 않은 곳에 있지만 쉽게 닿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 아래 선 나는 한 점 작은 사람. 말없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황홀한 풍경, 바람 소리, 작은 종소리, 바위들이 들려 주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들. 줄지어 내려가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누구나 걷는 모습은 아름답고, 그 풍경 안에서 하나의 움직임이 된다.
되돌아가는 길엔 햇살이 한결 부드럽다.
걸음을 멈출 때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바이올렛 타워도, 로젠가르텐의 다른 봉우리들도 그렇게 자꾸만 눈에 아른거린다.
"다시 돌아갈 길 위에서, 나는 이미 또 걷고 싶어진다.
"
병풍처럼 호수를 둘러싼 나무와 그 뒤로 도열한 라테마르산군이 멋지게 어우러지는 카레차호수.
무지개가 빠진 에메랄드빛 거울, 카레차호수
카레차호수Lago di Carezza는 라테마르산군 아래 약 1,520m에 위치한다.
맑고 투명한 에메랄드 물색으로 유명하다.
날씨와 시간에 따라서 물색이 바뀐다.
작고 아담한 호수 안에 담긴 풍경은 너무도 크고 찬란하다.
에메랄드와 청록이 뒤섞인 물빛은 보는 순간 숨이 멎는 듯 아름답다.
그 자체로 예술 작품처럼 느껴진다.
돌로미티의 3대 호수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유를 단번에 알 수 있다.
병풍처럼 호수를 둘러싼 나무와 그 뒤로 도열한 라테마르산군이 멋지게 어우러진다.
맑은 날엔 호수 뒤로 펼쳐진 산군의 봉우리가 호수 수면 위에 거울처럼 비친다.
몽실몽실 떠다니는 구름과 함께 만들어내는 풍경은 그야말로 동화 속 한 장면 같다.
이 호수에는 아름다운 물의 요정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녀를 짝사랑하던 마법사가 무지개로 요정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했지만 실패하자 분노한 그는 자신이 만든 멋진 무지개를 파괴하고 라테마르산으로 돌아와 자신의 흔적을 완전히 숨겼다.
지금도 호수 속엔 무지개 색이 숨어 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호수 주변에는 다양한 산책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호수 둘레를 한 바퀴 도는 데 1시간 30분 정도 소요. 빨리 걸으면 1시간도 충분하다.
누구나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라 한 바퀴 돌아보는 것도 추천할 만하다.
다만 로젠가르텐 트레킹을 하면서 시간을 예상보다 많이 소요해서 호수 둘레 전체를 걷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 머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바람 따라 잔잔히 흔들리는 물결,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수면, 그리고 그 속에 잠긴 몽실몽실 하얀 구름. 오늘 하루도 참 즐겁게 놀았구나, 하고 웃으며 돌아설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방문시기
이탈리아 돌로미티의 하이킹 시즌은 6월 초에 시작되어 눈 상태에 따라 9월 말이나 10월 말까지 이어진다.
단 케이블카 운행시간은 승강장마다 상이하므로 미리 확인해야 한다.
월간산 5월호 기사입니다.
돌로미티는 변화무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