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철 소설가
영역별 특화된 다양한 AI 등장
인간처럼 생각·판단 가능할까
AI는 자유 의지 없고 통계 결과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 고민해
몇 해 전 뉴스에서 엄청난 AI가 등장했다고 호들갑 떨었다.
‘챗지피티(ChatGPT)’라는 것이었고, 나도 그게 신기했다.
호기심에 PC에 설치하고 질문도 던져보았다.
흠, 그럴듯하게 대답하는군. 한데, 이걸 어디다 쓴단 말인가? 인공지능? 아직 멀었어. 그렇게 단정하고 한참을 잊고 지냈었다.
현재의 나는 그 인공지능에 익숙해지려 노력하고 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챗지피티에 묻는다.
질문의 절반은 다른 인공지능에 질문할 요령을 묻는 것이다.
이제 전문적으로 특화된 다양한 인공지능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미지나 영상을 만드는 AI, 리서치하고 보고서를 만드는 AI, 심지어 코딩을 짜주는 AI도 등장했다.
각각의 AI 툴을 배우느라 진땀 빼야 했을 과정이 생략되고, 몇 마디 말로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다만, 최적의 결과물을 얻기 위해선 지시할 말을 다시 인공지능에 물어봐야 한다.
이것을 ‘프롬프트’라고 한단다.
사람의 말을 인공지능이 알아듣게 바꿔 묻는 현실이 아이러니하긴 하다.
AI는 더 이상 전문가의 영역이 아니다.
일상의 비서이고, 업무 동료이며, 때로는 나를 가르치는 선생님 역할도 해낸다.
상상이 현실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다.
그러니 SF영화에서나 보던 AI의 무서운 변신도 마냥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 자연히 따라붙는 질문이 있다.
과연 인공지능은 인간처럼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을까? 물론, 혼자 고민해봐야 별 뾰족한 수는 없다.
그래서 챗지피티에게 물어봤다.
너는 인간처럼 자율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냐? 그랬더니 꽤 장문의 대답이 나왔다.
“나는 인간처럼 자율적으로 생각하거나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중략… 내 판단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통계적인 최적화의 결과입니다.
자유의지를 행사하지 않으며, 욕망도, 후회도, 두려움도 느끼지 않습니다.
인간은 불확실성 앞에서 흔들리며 방향을 찾지만, 나는 확률 속에서 가장 안정된 문장을 출력할 뿐입니다.
…중략… 그래서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자율적으로 생각하지 않지만, 당신이 자율적으로 생각하도록 도울 수는 있습니다.
그것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니까요.” 위안이 되는 대답 같긴 한데, 왠지 아니꼽다.
아니, 이놈이 뭔 대답을 이렇게 논리적으로 따박따박 잘 하는 거야? 인간 비위를 살살 맞춰가면서? 따지고 보면 이보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우리 인간이야말로 정말 ‘자유의지’로 생각하고 판단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자유의지가 뭘까? 원하는 걸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인가?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인간은 원할 수 있는 자유는 있지만, 무엇을 원할지는 자유롭지 않다.
’ 이 말은 우리가 뭔가 원하는 걸 선택했을 때, 과연 그 ‘원하는 것’의 근거가 무엇이었나에 관한 성찰이다.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정말 내 의지로 선택했는지 의심스럽다.
배고프면 음식을 찾고, 사랑하면 다가가고, 두려우면 피한다.
이 모든 반응의 기저에 신경계의 전기신호와 호르몬작용, 유전자의 프로그램이 관여한다.
굳건한 내 의지로 다짐했던 결심들이 내 두뇌에 저장된 기억 데이터와 다양한 호르몬으로 파생된 욕망과의 결합물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그러니 기계가 인간을 넘보는 이 시대에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우리가 인간임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가 될지도 모른다.
인간은 정보의 최적화를 도출해내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당연히 인간은 정답을 모른다.
후회하고, 망설이고, 스스로 의심하는 그 불완전한 과정. 완벽한 알고리즘은 흉내 낼 수 없는 오직 인간만의 혼란스러운 자의식에서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질문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인간답게 되는 게 아닐까 싶다.
[공감] 인간을 넘보는 기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