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오전, 산청군 산청읍 웅석봉로에 위치한 피해 주민 정씨의 자택 마당을 토사가 덮친 모습 photo 공주경 기자
"저수지에서 터진 물이 10초 만에 옆집을 뻥 때렸어요. 물이 범람하는 걸 보고, 나도 아내와 함께 지붕을 타고 마당으로 뛰어내렸지."
경남 산청군 산청읍 정곡마을에 사는 60대 남성 박씨는 전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의 집은 저수지 제방에서 300m나 떨어진 곳이었다.
저수지 인근 마을 주민들은 갑작스레 불어난 물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20일 오후 2시, 경남 산청군 제1터널 인근. 폭우에 나무들이 쓸려 내려가면서 산자락의 황토빛 속살이 드러나 있었다.
산청읍으로 들어서니 산사태와 침수 피해를 수습하는 구급차들과 포크레인들이 분주히 오갔다.
나뭇가지와 토사는 하수구에 씻겨 내려가지 못한 채 도로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지난 16일부터 쏟아진 '괴물 폭우'에 경남 산청군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됐다.
경남 산청군 산엔청 복지회관에 마련된 대피소로 몸을 피한 주민들은 휴게실과 소강당 곳곳에 간이 매트를 깔고 무거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산청읍 소재 부리마을에서 대피한 70대 남성 A씨는 전날 새벽의 긴박했던 상황을 떠올렸다.
그는 "새벽 6시쯤 마을 주민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대피하라'고 소리쳤다"며 "그 소리에 놀라 급히 짐을 챙기고 나왔다"고 말했다.
같은 마을에서 온 70대 여성 B씨도 "경황이 없어서 휴대전화 하나만 챙겼다"고 했다.
근처 내리마을에 거주하는 정씨(67)도 전날 아침의 악몽을 떨치지 못했다.
전날 오전 8시 30분께 산자락 바로 아래에 있는 자택에서 커피를 마시던 그는 뭔가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흙 사이로 물이 흘러내리는 게 수상했다"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순간 '꽝' 소리와 함께 산이 무너졌다"고 말했다.
정씨는 황급히 몸을 피하는 과정에서 왼쪽 다리에 찰과상을 입었다.
대피하는 주민들을 돕던 산청엔 복지회관 직원들도 전날 상황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한 직원은 복지관 주차장이 폭우로 물에 잠긴 사진을 보여주며 "주민 차량이 진입하기 힘들 정도로 물이 불었다"며 "오늘 오전 비가 그쳐 물이 빠지기 시작했지만, 어제는 민간 차량이 거의 다닐 수 없어 구급차와 경찰차만 주로 움직였다"고 말했다.
경남 산청군에는 지난 16일부터 20일까지 평균 632mm의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다.
이날 오전 11시 기준 사망자 8명, 실종자 6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으며, 농작물 520여㏊가 침수되는 등 막대한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피해현장을 찾아 "신속한 피해 복구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같은 날 행정안전부 재난구호과 관계자도 산청엔 복지회관에 마련된 대피소를 찾아 "양말이나 속옷 같은 기본 생필품부터 상비약까지 필요한 부분을 미리 파악해 조달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다만 피해 주민들이 일상으로 완전히 돌아갈 수 있을지는 요원한 상태다.
비가 그친 20일 오전, 일부 피해 주민들은 자택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집으로 향했다.
대부분 가정은 수도와 전기가 끊겼고, 진흙 범벅이 된 옷가지를 주워 당장 입을 옷부터 챙길 뿐이었다.
귀중품과 가전제품은 물과 흙으로 오염됐고, 냉장고 안 음식들은 모두 상해버려 버릴 수밖에 없다.
앞서 경남 산청군에서는 지난 3월 21일 대형 산불이 발생해, 여전히 많은 피해 주민들이 남아 있는 상태다.
화마가 남긴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수마가 덮치자 피해 주민들은 망연자실하는 모습이었다.
박씨는 "아직 산불 때문에 집에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이 폭염에 비닐하우스에서 지내고 있는데, 우리는 어쩌냐"고 말했다.
부리마을에 2년째 살고 있다는 A씨도 "산청이 참 살기 좋다고 해서 왔는데 산불에, 폭우까지… 이젠 옛말이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주간조선 온라인 기사입니다.
[현장] "산청살기 좋다는 말은 옛말"...산불 이어 폭우에 운 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