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어른]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의 업적
세종대왕과 주시경의 계보를 이어 한글을 사수하고 대중화시킨 외솔 최현배(1894~1970)는 꼬장꼬장하고 강직했다.
그가 일제 치하에서 한글을 지켜낸 것은 선비 스타일의 강인한 성품에 일차적으로 기인했다.
1942년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됐을 때 그는 온갖 고문을 겪었다.
1961년 9월 24일자 <조선일보> 4면 인터뷰에서 그는 "1년 동안의 독방살이도 했고 두들겨 맞고 비행기도 타보고 겨울에 물도 먹었고"라고 회고했다.
'비행기'는 양손이 뒤로 묶인 채 천장에 수평으로 매달리는 고문을 의미한다.
한자·일본어·영어는 한국 땅에서 단순한 외국어가 아니다.
이 언어들이 한국에서 갖는 의미는 불어·독어·서반어 같은 것들과 차원을 달리한다.
한자·일본어·영어는 한국에 최대 영향력을 행사했거나 한국을 지배한 국가들의 언어다.
한자는 중국의 영향을 받던 시절, 일본어는 일제강점기 시절, 영어는 미군정을 배경으로 이 땅에서 힘을 갖게 됐다.
우리 말을 지키기 위해 일본 유학을 간 최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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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중구 동동 외솔 최현배 선생 기념관에 있는 외솔 선생의 동상
ⓒ 연합뉴스
최현배가 지금의 울산시 중구 동동에서 출생한 1894년 10월 19일은 청일전쟁 발발을 계기로 중국과 한자의 영향력이 이 땅에서 급감하던 때였다.
이런 시기에 태어난 그는 한자-일본어-영어가 번갈아가며 영향력을 발휘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세 언어와의 사투를 거쳐 우리말글을 지켜냈다.
선비 스타일의 성격적 특성은 그런 싸움에서 우리 것을 끝끝내 지켜내는 데 기여했다.
그런데 그는 우리말글을 지키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때로는 '두 얼굴의 사나이'로 변신하기도 했다.
공부하던 서당이 1907년에 폐쇄되자 그해에 일신학교에 진학하고 1910년 4월에 관립한성고등학교(이듬해부터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16세의 최현배는 사촌 형의 친구인 김두봉의 소개로 주시경의 조선어강습원에서 한글을 공부했다.
<역사비평> 2008년 봄호에 실린 이준식 당시 성균관대 초빙교수의 논문 '최현배와 김두봉'은 "두 사람은 나란히 주시경이 가장 사랑하는 제자로서 주시경의 문법이론과 언어민족주의를 배우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학교 수업과 별도로 한글 공부에도 매진한 그는 일생을 한글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언어학 지식이 필요한데, 식민지 한국에는 그것을 가르쳐줄 학교가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식민지 한국 최초의 관비 유학생은 바로 그였다.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1915년에 입학한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문과 제1부는 일본어와 한문을 전공하는 곳이었다.
이계형 국민대 특임교수의 책 <우리 말글을 목숨처럼 지킨 최현배>는 "그가 사범학교에 진학하게 된 것은 당시 일제가 유능한 교원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에서 일본으로 유학 보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유학생으로 선정되기 전, 그는 총독부 학무국장과 인터뷰를 했다.
학무국장은 그의 이력을 살피더니 조선어강습원은 뭐 하는 곳이냐고 물었다.
'뜻' 있는 사람들이 조선어를 배우는 곳이라고 답했더니, 학무국장은 깜짝 놀라며 무슨 '뜻'을 말하는 거냐고 되물었다.
그는 '학문 연구를 위한 뜻'이라고 둘러대고, 일본어와 한자를 배운다는 조건으로 장학생 자격을 얻어냈다.
그때 이미 주시경의 애제자였던 한글민족주의자가 언어 연구를 위해 그런 '트릭'을 썼던 것이다.
그는 일본에 가서 학교 공부 외에 한글 공부도 열심히 하고 일본인들에게 한국어 강의도 했다.
그런 뒤 3·1운동이 벌어진 1919년에 25세 나이로 교사자격증을 들고 귀국했다.
관비 유학이 끝나면 공립학교에서 근무해야 했지만, 그는 일본 정부와의 약속을 지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논밭을 팔아 장학금을 돌려줬다.
유학하기 전에도 약간의 논밭이 있었지만 그때는 그것을 팔 수 없었다.
교사자격증을 취득한 뒤에는 사립학교 교사가 되어 생활비를 벌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땅을 팔아도 무방했다.
그는 28세 때인 1922년에도 일본 유학을 떠나 교토제국대학 등에서 공부했다.
교토대학에서는 대학원 과정을 밟았다.
이때는 일본 돈을 이용하지 않았다.
이 같은 유학 경력을 토대로 1926년부터 연희전문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하고 그 뒤 이화여전으로 옮겼다.
'가로쓰기'도 최현배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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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배 <우리말본> 겉표지
ⓒ 한국학연구원
두 차례의 일본 유학을 통해 언어학의 토대를 튼튼히 한 그는 강습이나 신문 기고를 통해 한글 전파에 힘썼다.
일본에서 군국주의 내각이 들어선 것은 그가 33세 때인 1927년이다.
그런 정세 변화로 인해 한글 운동이 한층 어려워진 시기에 이 운동을 본격화했던 것이다.
그는 한글 연구에도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다.
그 결실 중 하나가 <우리말본>이다.
한글 문법서인 이 책을 1925년부터 집필해 중일전쟁이 벌어진 1937년에 출판했다.
혹시라도 원고지가 없어질까봐 땅속 장독에 원고를 차곡차곡 모아뒀다.
출판 전에는 최대 12년 묵은 원고지들을 꺼내 80번이나 읽었다.
그런 뒤 일본 돈이 아닌 자기 돈으로 출판 비용을 만들었다.
이번에는 그 당시의 주택담보대출 제도를 활용했다.
끈기와 더불어 용기와 신념이 요구되는 연구를 통해 그는 한글 대중화에 유익한 각종 장치를 개발했다.
그중 하나는 자음과 모음의 명칭 개정이다.
지금 우리는 한글 자음을 기역·니은·디귿 하는 식으로 읽는다.
이것은 최현배의 연구 성과다.
그 이전에는 기역과 이응까지는 지금과 똑같이 읽지만 지읒부터는 달랐다.
지·치·키·티·피·히로 읽었다.
최현배는 이것을 지읒·치읓·키읔·티긑·피읖·히읗으로 개칭했다.
기역에서부터 히읗까지 일관성을 부여한 것이다.
지금 우리는 한글을 가로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쓴다.
이것도 최현배의 작품이다.
한글을 쉽게 쓰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위의 이계형 책은 "최현배는 끊임없이 가로쓰기를 주장했다"라며 "1938년 2월부터 5월까지는 4차례에 걸쳐 '가로쓰기의 이론과 실제'라는 글을 연재했다"고 말한다.
그가 가로쓰기를 완성한 곳은 일제가 제공한 이불 속에서다.
감옥에서 간수의 눈을 피해 이불 속에서 가로쓰기를 궁리하다가 거기서 '득도'했다.
가로쓰기에 맞게 글자 크기나 모양을 조정하는 일들이 그 이불 속에서 마무리됐다.
표준어 확립에도 그의 공이 컸다.
학생들과 함께 각 지방 사투리를 수집하고 표준어를 가려내는 작업이 있었다.
이 역시 우리말글을 쉽게 쓸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그런 최현배를 일제가 그냥 둘 리 없었다.
'비행기'를 태워주는 것은 물론이고, 교수 생활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말기에 그는 실업자가 됐다.
그러나 학교 도서관 직원으로 취직해 한글 연구와 한글 운동을 계속했다.
운동이라기보다는 투쟁이라고 불러야 할 삶의 자세였다.
그의 투쟁은 미군정과 함께 영어가 쇄도하던 해방 뒤에도 계속됐다.
그는 영어의 침투가 대세가 된 시기에 일종의 역주행을 했다.
미군정 하에서 한글 교과서 편찬을 주도하고 공무원들에게 한글 교육을 시켰다.
수많은 영어의 화살 앞에서 한글 방패를 세운 셈이다.
그는 우리말 되찾기 운동도 벌였다.
한자가 들어가지 않은 낱말인 도시락·단팥죽·메밀국수·세모꼴·사다리꼴·반올림표 등은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또 한글 기계화 운동도 벌였다.
타자기로 한글을 칠 수 있게 함으로써 한글을 대중화시키는 운동이었다.
한글을 한국 땅의 제1문자로 만들기 위해 온갖 궁리를 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한글을 당연한 듯이 사용하지만, 한글이 제1문자가 된 것은 해방 이후 80년 정도밖에 안 된다.
최현배처럼 한글을 사랑하다 못해 한글에 미쳐버린 사람들이 없었다면, 해방과 함께 영어가 훨씬 강력하게 확산됐을 수도 있다.
그런 흐름에 제동을 걸고 한글을 정착시키는 데 앞장선 인물이 최현배다.
그는 한글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때로는 두 얼굴의 사나이가 되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글을 연구하고 전파했다.
그가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 어른인지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도시락, 단팥죽... 이 사람 없었다면 존재하지 못했을 말들 [김종성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