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민주화운동을 했던 나조차도 갇힌 한계
나는 1965년~ 1967년 대구의 어느 사립 고등학교에 다녔다.
 집안 형편이 여의치 않아 근로 장학생이란 이름으로 학비를 면제받았다.
 고3 때 키가 크고 성실하게 보였는지 담임 선생님이 학생들의 형식적 동의를 얻어 나를 반장으로 임명했다.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런 때였다.

그해 5월에 대통령선거가 있었고 6월에는 총선이 있었는데 군인 출신 박정희와 그의 당이 압승했다.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는 기억에서 사라졌는데 대학이 시끌시끌했고 우리 고등학교도 3학년 임원들 중심으로 어느 친구 집에 모여 데모를 모의하고 준비했는데 거사 당일 정보 유출로 실패하고 정학 처분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 상황이 지금 되돌아보면 내 고등학교 때의 최대의 정치행위였는데 과정의 어설픔이나 결과의 참담함 때문인지 내 기억의 창고에 보관하기도 싫었던 일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교사가 된 뒤에도 학생들을 가르침이나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나도 모르게 가두어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스스로 의식화된 교사로 자처하면서도 말로는 자주적 어쩌고 하면서도 활동 영역을 아주 협소하게 제한했다.
 울타리는 아주 작게 견고하게 쳐 놓고 그 안에서만 뛰어놀아라 했으니 학생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고등학생 운동사> 출판기념회 축사를 요청 받으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생 운동'이란 말이 아직도 낯설고 줄임말 '고운'은 더욱 그랬다.
 기억하기 두려운 몇 명의 이름도 떠올랐다.
 이창진과 김소연.
▲ 1989년 5월 전교조 결성보고대회 및 전교조 탄압규탄대회
 89년 5월 연세대에서 경찰의 봉쇄를 뚫고 전교조 결성식이 있었고, 연세대에 진입하지 못한 교사들은 건국대에서 '결성보고대회 및 전교조 탄압규탄대회'를 열었다.

ⓒ 전교조
정치적 행동은 대학가서 해라: 징계와 오해가 싫었다
이창진이 신일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이 된 1986년은 나에게도 특별한 해였다.
 그해 나는 서울 YMCA 교사회 회장으로 교육운동에 참여하여 5월 10일 전국의 교육운동 동지들과 함께 교육민주화선언을 한 해였다.
 해직 위기에 몰렸으나 신일고 학생들과 동료 교사들의 도움으로 무사할 수 있었는데 그때 이창진은 내가 담당하고 있던 문예반 학생이었다.
 그 당시 국어 교사로는 영화 평론하는 변인식 선생, 뒤에 영화감독이 된 이창동 선생 등 있어서 학생들에게 영향이 많았던 것 같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과 이어 펼쳐진 노동자 대투쟁 시기를 거치며 나는 자주적 교원단체인 전국교사협의회를 결성하는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는데 창진이 등 문예반 학생들도 나름 고등학생 차원에서의 민주화운동을 고민했던 것 같다.
 어렵게 창진이를 비롯한 몇몇이 나를 찾아와서 조언을 구했던 것 같은데 내 코가 석 자라 많은 시간을 내서 성실하고 진지하게 대해 주지 못했다.
 오히려 당시 제도나 분위기에서 고등학생으로서의 사회 활동의 한계와 어려움을 얘기하며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어쩔 수 없으니 먼저 대학 갈 준비를 착실히 하고 그런 사회 정치적 문제는 대학 가서 제기하고 행동해도 되지 않겠냐며 은근히 자제하도록 설득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학생들이 행동으로 나설 경우 필연적으로 닥칠 학생들에 대한 불가피한 징계 등 불이익이 걱정이 됐고, 그보다도 일부 운동권 교사가 부추기고 선동해서 학생들이 움직인다는 오해를 받기 싫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교육의 주체는 교사 학생 학부모라고 하면서도 학생의 주체성을 너무 무시했던 것 같다.
 참교육 운동에 모든 교사가 나서지 못한 것처럼 학생들도 먼저 각성한 학생들이 선진적으로 나서는데 그것마저 무시하고 인정하지 못한 것 같은 아쉬움이 남는다.

당시 고등학생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학생들과 더 진지하게 고민하며, 교사 학생 학부모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며 적절한 역할을 담당하며 함께 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결국은 고등학교 학생운동만 무시당하고 외면당하며 사회적 인정도 받지 못하고 결국 그 과정과 결과도 망각의 늪에 깊이 수장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 사학비리척결과 학내 민주화를 위한 정화여상 투쟁
 정화여상은 1987년 사학비리척결과 학내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전개했다
ⓒ 김소연
고작 서른다섯에 떠난, 나의 제자 창진
창진이는 내가 전교조 결성과 함께 감옥으로 간 그해 공장으로 갔고 고운 활동을 함께하던 다른 친구들은 대학을 가기도 하고 재수를 하기도 했는데 실낱같이 이어져 있던 우리의 연결망도 거의 끊어지고 말았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들었고 그때 나는 민주노총 위원장으로 조직 추스르기나 투쟁 사업을 진행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래도 더 확인하고 챙겼어야 했는데 후회로 남았다.
 그리고 이번에 출간된 <고등학생 운동사>에서 전성원씨가 쓴 글 속에서 다시 만났다.
 아찔했다.

"고작 서른다섯 살에 죽은 남자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내 기억 속의 그는 시인 윤동주를 닮았다.
 해맑게 잘 생겼고, 겸손했으며 누구보다 헌신적인 인간이었다.
 그를 평생 잊을 수 없는 벗이자 동지로 여겼지만 나는 그가 바흐와 비틀즈 중 누구를 더 좋아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의 이름은 이창진, 닉네임은 이스크라(ISKRA)였다.
 그와 처음 만났던 1987년, 우리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
교사와 학생으로 만났던 그때를 되돌아보며 우리는 당시의 고등학생 운동에 대해 얼마나 진지했으며 최선을 다했던가 생각해 본다.
 창진이에 비해 나는 많이 부족했던 것 같다.

같은 1987년이지만 학생들이 주도한 사립학교 비리 척결을 위한 정화여상 학내민주화 투쟁은 여러 면에서 달랐다.
 당시의 일부 사립학교는 학교의 운영에 설립자나 재단이 과도하게 개입하며 온갖 비리를 저지르던 때여서 사회 민주화에 발맞추어 교사나 학생들이 일어나던 때였다.
 정화여상도 그 중 한 학교로 일부 교사와 학생들이 같이 힘을 모아 싸웠는데 김소연은 학생의 중심 역할을 했다.
 나는 그 무렵 전국교사협의회 건설에 주력하며 전국의 교육운동을 조직하고 있었는데 공립과 사립, 인문계와 실업계는 내용 면에서 많이 달랐다.

정화여상 투쟁은 학생들이 주도한 실업계 사학민주화 투쟁의 전범이었다.
 일반적 고등학생 운동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운동은 바로 직장 중심의 노동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는데 김소연이 대표적 인물이었다.

고등학생 운동으로 시작한 김소연의 운동적 삶은 가장 모범적이고 빛나는 삶이다.
 역할이 다른 노동운동 선상에서 그를 만날 수밖에 없었지만 그때마다 나는 부끄러웠고 그는 자랑스러웠다.
 고등학생 운동의 맑고 싱싱한 피가 그의 혈관 속에 끝없이 흐르고 있다.

#순결하고 따뜻했던 고등학생들을 기억하라!
나는 1990년에는 민자당 노태우 정권에 대항하며 만들어진 국민연합의 집행위원장을 맡아 민주화 전선 투쟁의 앞자리에 서서 활동한 적이 있는데 1991년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가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하자 전 국민적 저항이 시작되고 거의 한 달 동안 10명이 넘는 분신, 투신 등 극단적 저항이 있었다.
 이때를 전후로 공주 한일고 정성묵, 대구 경화여고 김수경, 대전 충남고 심광보, 전남 보성고 김철수 등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 열사는 모두 고등학생 운동 출신으로 확인되고 있다.

▲ 김수경 열사 추모제
 1991년 대구 경화여고 학생 김수경은 학생회 활동과 전교조 지지 등을 이유로 학교에서 탄압 받다가 유서를 남기고 투신했다.
 고운 활동가를 중심으로 교사, 학부모 등 수 많은 시민들이 학생인권유린을 규탄하며 추모제가 열렸다
ⓒ 김수경열사추모사업회
이들의 주장 중에는 전교조 참교육 사수, 해직교사 복직 등도 포함되어 있어 이른바 전교조 1세대라 불리는 전교조 교육운동과 직접적 연관이 되어 있어 더욱 마음이 아프고 책임감이 밀려오고 있다.

이러한 고등학생 운동은 전교조 합법화와 민선 교육감의 진출 등으로 합법 비합법 교내 또는 연합, 연대 대중투쟁으로 발전하여 자주적 학생회 건설, 교복, 두발 자유화나 학생 인권 조례 제정 운동으로 발전하여 많은 성과도 거두고 있으나 입시 경쟁 중심의 현 체제에서 한계를 보이기도 하는 것 같다.

이 글을 어렵게 쓰면서 고등학교 교실에서 만났던 수많은 꽃다운 얼굴들을 떠올리며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 가누기가 힘들다.
 우리 어른들이 아니 나 같은 교사가 좀 제대로 해서 학생들이 사회나 나라를 위한 고민이나 걱정하지 않고 자신과 이웃을 위한 교육적 삶에 열중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또 그런 고민을 하며 힘들어 할 때 더 가까이 있어 주지 못한 잘못이 부끄러울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결하고 따뜻했던 그 시기 고등학생 운동을 참여했던 학생들의 이름과 함께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고등학생 운동사 출판기념회 때 참석한 많은 당사자들을 보며 많이 놀랐다.
 사회 여러 곳에서 올바른 관점과 태도로 이 혼란스러운 사회를 바르게 끌고 가고 있는 분들이었다.
 고등학생 운동의 성과요 현실이었다.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고맙고 고마울 따름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이수호님은 전 전교조위원장이며, 현재 노동공제연합 (사)풀빵 상임이사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