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온·폭염으로 생산량 감소… 독점적 유통구조도 원인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쌀값을 5㎏당 3000엔(약 2만8500원)대로 낮추겠다”며 ‘쌀값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뉴시스
일본 관광객들이 최근 한국 마트에서 쌀을 대거 사 가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일본에서 쌀값이 폭등한 데다 구입도 어려워지자 관광차 한국을 방문한 일본인들이 한국 쌀을 사서 귀국하는 것이다.
4월에는 한국 쌀이 일본에 수출되기도 했다.
한국 정부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재해 상황 때 인도주의 명목으로 일본에 쌀을 지원한 적은 있지만 공식적으로 수출한 것은 1990년 대일(對日) 통계 집계 이래 처음이다.
1년에 2배 올라
일본에서 ‘레이와(令和)의 쌀 소동’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쌀값이 폭등하자 일본 국민의 민심이 크게 악화하고 있다.
레이와는 나루히토 국왕의 연호를 가리킨다.
이 같은 사태는 1993년 아키히토 전 국왕의 연호인 ‘헤이세이(平成)의 쌀 소동’ 이후 32년 만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냉해로 쌀 부족과 함께 가격 폭등 사태가 발생했다.
일본에서 ‘소동’이라는 표현은 국가 재난급 상황이 일어났을 때 사용한다.
현 상황도 당시와 유사하다.
일본에서 쌀값은 7개월 연속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일본 총무성에 따르면 신선식품을 제외한 4월 소비자물가지수(CPI·2020년=100)가 전년 동월보다 3.5%나 올랐다.
일본 언론은 쌀을 비롯한 식품 가격 급등이 물가상승에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4월 가격이 인상된 식품 품목 수는 18개월 만에 처음으로 4000개를 넘었다.
특히 쌀값은 98.4%나 오르며 관련 집계를 시작한 1971년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초밥 등 쌀 관련 품목도 모두 지난해 대비 60% 이상 가격이 급등했다.
일본 농림수산성에 따르면 5월 12∼18일 전국 슈퍼에서 쌀 5㎏ 평균 가격은 4285엔(약 4만800원)을 기록했다.
한국에서 쌀 5㎏이 1만6000원 정도에 판매되는 점을 감안하면 2.5배가량 비싸다.
일본 국민은 주식인 쌀이 비싸지자 식비를 절약하고자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일부 식당은 공깃밥 가격이나 음식 가격을 인상하고 있다.
실패한 쌀 감산 정책
일본 쌀값 폭등에는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다.
가장 큰 원인은 기후변화에 따른 지구온난화다.
2023년과 2024년 기후변화로 일본에서는 고온과 폭염이 기승을 부렸다.
일본 벼 품종은 대부분 냉해에는 강하지만 고온에는 약한 편이다.
특히 일본의 대표 고급 쌀인 ‘고시히카리’가 높은 기온에 취약하다.
일본의 연평균 쌀 생산량은 700만t(세계 10위)이지만 2023년과 2024년 쌀 생산량은 5%가량 줄어든 662만t, 679만t으로 집계됐다.
또 다른 원인으로는 농업 인구 감소와 초고령화를 들 수 있다.
일본 쌀 재배농가의 농업 인구 평균 연령은 71세로, 은퇴 농부가 급증하는데도 젊은 후계자는 없는 상태다.
최근 10년간(2010~2020) 일본 농업인구는 650만 명에서 348만9000명으로 줄어 46.3%나 감소했다.
정부의 쌀 감산 정책도 부작용을 낳고 있다.
일본 정부는 1971년부터 ‘감반(減反)’으로 불리는 쌀 감산 정책을 시행했다.
지역별로 감축 목표량을 할당한 뒤 보조금을 주고 수확량을 높일 수 있는 벼 품종 개량도 금지하는 식이었다.
정부는 2018년 쌀 감산 정책 폐지를 공식 선언했지만 지금도 주식인 쌀 대신 전략작물(밀, 대두, 사료용 쌀)을 재배하는 농가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정부는 쌀 생산량을 억지로 낮추면서 쌀값은 높게 책정해왔다.
일본 쌀 농가 중 재배면적이 1㏊(1만㎡)가 안 되는 영세소농 비중이 52%인 것도 이 때문이다.
농촌에 지역구를 둔 정치인들도 유권자 표를 얻으려고 쌀 생산구조 개혁에 반대해왔다.
쌀값 폭등의 또 다른 원인으로 독점적인 유통구조 문제가 꼽힌다.
일본 농촌 전문가들은 이번 쌀 가격 파동의 핵심 원인으로 전국농업협동조합연합회, 이른바 ‘JA 전농’으로 대표되는 일본 농협의 독점적 유통구조를 지목했다.
JA 전농은 일본 내 비료 판매 80%, 쌀 유통 50%를 장악하고 있다.
JA 전농은 정부가 쌀값을 통제하던 시절부터 생산자 보호를 명분으로 매년 꾸준히 쌀 매입가를 인상했다.
이 인상분은 고스란히 소비자가격에 전가됐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JA 전농이 주도하는 경직된 쌀 유통 시스템이 공급 부족 상황에서 가격 변동성을 키웠다”고 지적했다.
미국 CNN은 “JA 전농 중심의 폐쇄적인 유통구조가 공급 경직성을 키우면서 가격 파동을 초래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3월 비축미 23만t을 풀었지만 JA 전농이 이를 낙찰받은 뒤 가격 안정을 이유로 시장에 내놓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가격을 낮추려고 비축미를 푼 효과가 완전히 사라진 셈이다.
일본 도쿄 신오쿠보의 한국 상점 매대에서 팔리고 있는 한국 쌀. 동아DB
쌀값 폭등 때문에 전전긍긍하던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쌀값을 5㎏당 3000엔(약 2만8500원)대로 낮추겠다”며 ‘쌀값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총력전에 나섰다.
이시바 총리는 5월 21일 쌀값 폭등과 관련된 망언으로 여론의 질타를 받은 에토 다쿠 농림수산상을 전격 경질하고 고이즈미 신지로 전 환경상을 새 수장으로 임명했다.
에토 전 농림수산상은 5월 18일 사가현에서 열린 집권 자민당 정치자금 행사에서 “나는 쌀을 산 적이 없다.
지지자들이 많이 주신다.
집에 팔 정도로 있다”고 발언해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다.
에토 전 농림수산상은 지난해 10월 이시바 총리 내각 출범 이후 처음으로 경질된 인사다.
고이즈미 신지로 일본 농림수산상.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차남이자 자민당 소속 6선 중의원 의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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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 총리 후보 중 1명인 고이즈미 농림수산상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2001~2006년 재임)의 차남이자 자민당 소속 6선 중의원 의원이다.
2019년 38세 젊은 나이에 아베 신조 전 총리 내각에 환경상으로 기용돼 처음으로 입각했다.
지난해 9월 자민당 총재 선거에도 출마해 결선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1차 투표에서 가장 많은 의원 표를 얻어 전체 3위에 오르는 등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시바 총리는 고이즈미 농림수산상에게 쌀값 인하를 비롯해 농업 분야의 대대적인 개혁을 지시했다.
특히 이시바 총리는 기존 쌀 감산 정책을 증산 정책으로 바꾸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시바 총리가 이처럼 강력하게 쌀값 내리기 방안을 추진하는 이유는 6월 22일 도쿄도 의회 선거, 7월 20일께로 예상되는 참의원(상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패배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 ‘지지통신’이 5월 16∼19일 117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대면 면접 방식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시바 내각 지지율은 전달 대비 2.2%p 하락한 20.9%로 지난해 10월 내각 출범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시바 총리의 저조한 지지율은 쌀값 폭등이 주요 원인인 셈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고공 행진을 계속하는 쌀값이 2개 선거 결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쌀값에 이시바 총리의 정치적 명운이 걸린 것이다.
고이즈미 존재감 드러내기
차기 총리에 야심이 있는 고이즈미 농림수산상도 ‘쌀값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자 과감한 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나섰다.
고이즈미 농림수산상은 ‘공급 가능한 쌀의 무제한 방출’로 쌀값을 잡겠다면서 “국민이 정부 비축미를 시세 절반 가격에 구입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비축미를 5㎏당 세금 포함 2160엔(약 2만500원)에 공급하겠다는 것이다.
이시바 총리가 내세운 목표치보다 1000엔가량 낮은 가격이다.
고이즈미 농림수산상은 또 입찰로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한 업자에게 비축미를 판매하던 기존 방식을 변경해 앞으로는 수의계약을 통해 복잡한 유통 경로를 거치지 않고 대형 소매업자 등에게 직거래 형태로 판매하겠다고 밝혔다.
‘반값 쌀 공급’ 방침은 일단 정치적 효과를 나타내는 모양새다.
자민당은 “고이즈미 농림수산상의 돌파력으로 쌀값이 하락하면 자민당에 대한 비판이 수습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연립여당인 공명당의 사이토 데쓰오 대표도 “이번 조치의 효과가 참의원 선거 이전에 나타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일본 정치권에선 고이즈미 농림수산상이 중책을 맡은 만큼 정치적 존재감을 내세울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32년 만에 ‘쌀 파동’ 난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