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준의 다빈치스쿨] 대한민국 일으킨 진짜 힘… 우리 미래 더 풍요롭게 만들 원동력
2020년 제92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비롯해 4개 부문을 수상한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가운데)과 출연진. 한국 민주화는 콘텐츠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공식 트위터 계정
“우리가 피땀 흘려 일하는 동안 데모나 하며 방해한 놈들이 없었다면 한국은 지금보다 더 잘살게 됐을 거야.”
많은 어르신이 술자리에서 반복하는 말이다.
1960~1980년대 산업화 시기 고도성장을 ‘묵묵히 일한 이들의 성과’로 치켜세우고, 민주화운동은 혼란을 초래한 방해물쯤으로 간주하는 견해다.
하지만 필자는 산업화와 민주화, 질서와 저항, 성장과 창의라는 복잡한 요소가 뒤엉킨 대한민국 현대사를 이렇게 단순히 나눌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고도성장은 산업화 하나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산업화만 있었다면 오히려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1970년대 후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주도한 중화학공업화는 일시적인 고도성장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높은 물가상승과 외환 불균형, 과잉 투자와 정경유착이라는 부작용도 초래했다.
수출지상주의 압박 속에서 내수는 소외됐고, 유신체제는 권력과 자본이 얽힌 불투명한 구조를 만들었다.
1979년 최고 권력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오히려 구조 전환 계기가 됐다.
대한민국, 특정 세력 희생만으로 이뤄지지 않아
전두환 정부는 정치적 정당성이 부족했지만, 경제 정책 면에서는 그 나름 합리적인 조정을 시도했다.
1980년대 초반 긴축과 안정화 정책은 고통을 수반하긴 했어도, 물가 안정과 국제수지 개선에 기여했다.
1986년부터 시작된 ‘3저(저유가·저금리·저달러) 호황’은 한국 경제에 또 한 번의 도약 기회를 제공했다.
중요한 것은 이 호황이 오로지 외부 환경 덕만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선행된 경제 구조조정과 내부의 제도 변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경제 정책 전환은 산업화의 균열을 일정 부분 보완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에너지가 필요했다.
그것은 바로 국민의 자유에 대한 열망과 저항 정신이었다.
1979년 부산·마산, 1980년 광주에서 울려 퍼져 1987년 ‘6월 항쟁’으로까지 이어진 시민들의 외침은 단순한 정권교체 요구가 아니었다.
부패한 권력에 대한 견제였고, 특권 없는 공정한 제도를 향한 열망이었다.
무엇보다 다르게 살아가고자 하는 자유의 외침이었다.
이것이 없었다면 한국은 라틴아메리카의 수많은 국가처럼 ‘바나나 공화국’(Banana Republic: 미국 소설가 오 헨리가 바나나 생산 및 수출 관련 부정부패가 만연한 후진 사회를 풍자한 용어)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사실 한국인의 자유와 평등을 향한 열망은 갑자기 등장한 게 아니다.
19세기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사회에는 오래전부터 평등 사회를 추구해온 전통이 있다.
또 6·25전쟁이라는 극한의 경험을 거친 이후 한국인은 ‘복종하는 국민’에서 ‘질문하는 시민’으로 질적 변화를 이뤘다.
‘감정적 민중’에서 ‘합리적 주체’로의 전환은 곧 민주주의와 창의성의 토대를 이룬 문화적 기반이었다.
여기에 더해 한국이 처한 분단 상황의 중요성도 간과할 수 없다.
북한이라는 경쟁체제의 존재는 남한이 평등한 제도를 유지하고 토지개혁 같은 조치를 취하는 압력으로 작용했다.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개통을 축하하는 시민들.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의 창조적 긴장을 통해 고도성장을 이뤄냈다.
동아DB
질서와 자유의 조화
자유와 저항은 흔히 부패를 막고 권력을 감시하는 수동적 장치로 여겨지지만, 이는 반쪽 진실에 불과하다.
진짜 중요한 것은 ‘창조의 동력’이라는 점이다.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는 기술 영역에 국한된 개념이 아니다.
실험할 수 있는 사회적 공간, 실패를 감내할 수 있는 문화, 다르게 말할 자유 이 모든 것이 있어야 진짜 혁신이 등장한다.
한국 민주화운동은 권력 견제를 넘어 표현의 자유, 문화적 다양성, 새로운 기술과 산업에 대한 상상력을 여는 역사적 토양이기도 했다.
한국은 산업화로 질서를 세웠고, 민주화와 저항으로 자유의 공간을 만들었다.
그 균형이 있었기에 우리는 물질적 풍요뿐 아니라, 정신적 풍요도 함께 추구할 수 있었다.
문화예술 역시 단순한 사치가 아니다.
예술은 언제나 기존 질서에 균열을 내고, 세상을 다르게 보도록 만든다.
다름을 수용하는 감각이 있어야 새로운 산업이 태어난다.
K-콘텐츠와 한국의 스타트업 생태계는 바로 이 자유의 유산에서 자라난 것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특정 세력의 희생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역사적 우연과 필연의 결과물이며 산업화와 민주화, 질서와 저항, 성장과 창의라는 창조적 긴장이 만들어낸 복합적 성과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그 균형을 회복하는 일이다.
일만 열심히 하면 다 되는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다르게 생각할 자유, 도전할 수 있는 환경, 실패해도 괜찮은 사회가 필요하다.
끊임없는 감시에 저항하고 ‘다르게 생각할 자유’를 지켜내는 시민 의식이 모든 것의 중심에 있다.
이것이 진짜 대한민국을 일으킨 힘이며, 우리 미래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 원동력이다.
김재준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민대 경상대학장, 국민대 도서관장과 박물관장, 한국예술경영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민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다르게 생각할 자유’ 지켜내는 시민 의식의 중요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