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기획]비제이(BJ)와 시청자, 사이버레커와 기자, 대중과 독자가 만드는 악몽
여캠이 된 수희는 시청자의 욕망에 장단을 맞춰주라고 권하는 소속사를 통해 급성장한다.
웹툰 ‘수희0(tngmlek0)’의 한 장면. 네이버 웹툰 갈무리
‘인방’(인터넷방송)이라는 세계가 있다.
이 세계의 가장 큰 특징은 말과 감정의 직거래 아닐까. 콘텐츠 생산자(BJ·비제이)와 소비자 사이에 모니터 하나만 존재할 뿐이다.
BJ는 실시간으로 시청자 수를 살피며 방송하고, 시청자는 채팅과 후원(‘별풍선’)으로 곧장 반응을 전달한다.
‘관심경제’라는 말로 정리되는 이 세계는 시대에 따라 플랫폼을 달리하며 이어져오고 있다.
그중에서도 규모가 큰 하위 세계가 바로 ‘여캠’이다.
좁은 의미에서 여성이 자신의 외모와 몸매를 콘텐츠 삼아 방송하는 것인데, BJ의 리액션과 주로 남성인 시청자의 후원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거래된다.
이 세계는 시청자가 많지 않아도 한 사람당 후원 규모가 상당한 경우가 많다.
이런 구조상 여캠은 일종의 ‘성산업’으로 여겨져 ‘음지’ 취급을 받는다.
우연히 카메라에 잡힌 수희, 시청자의 욕망에 사로잡히고
되도록 모르고 싶은 세계다.
어쨌거나 이 세계의 파급력은 상당해서, 심심찮게 뉴스에 이 세계에서 발생한 사건들이 보도된다.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어떤 BJ가 범죄에 휘말리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에 누군가 검색해봤다가, 구독자가 수십만 명인 것을 보고 내가 애써 모르고 싶었던 이 세계의 심연에 고개를 젓는 일이 많았다.
웹툰 ‘수희0(tngmlek0)’(이하 ‘수희0’)은 바로 이 심연의 구조를 파헤치는 작품이다.
평범하게 회사를 다니던 한 여성이 어떻게 여캠이라는 세계에 편입되고 거기서 어떤 흥망성쇠를 경험하는지를 매우 현실적이고 지독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이 시청자와 다른 BJ들, 가족과 애인, 익명의 대중과 관계 맺고 갈등 빚고 화해하는 것이 이 작품의 주요 줄거리다.
주인공 조수희는 가족의 장녀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두 동생을 돌보며 회사에 다니고 있다.
어릴 적 가정폭력을 일삼던 아빠와 함께 살고, 엄마는 남편의 폭력과 가스라이팅에 시달리다가 결국 바람을 피우고 이혼해 따로 산다.
쭉 가난과 더불어 살아온 수희는 치열하게 일해도 박봉인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빠는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해 한동안 일할 수 없는 몸이 되어 수희가 두 동생과 아빠까지 책임져야 할 위치에 놓인다.
중학생 남자아이인 둘째 경민은 그 나이 또래 청소년들이 흔히 그렇듯 유명해지기를 갈망한다.
오늘날 일반인이 가장 쉽게 유명해지는 방법은 물론 인방이다.
게임 방송을 시작하지만 외모도 말솜씨도 별 볼 일 없는 경민은 극소수의 시청자로부터 조롱이나 당할 뿐이다.
그러다 수희가 우연히 경민의 카메라에 잡히고, 예쁜 외모의 수희는 곧 시청자의 주목을 받는다.
이를 계기로 수희는 자신의 채널을 열고 본격적으로 방송을 시작한다.
처음에는 무슨 콘텐츠를 해야 할지 몰라 가벼운 대화를 시도하는데, 당연히 별 호응을 얻지 못한다.
우여곡절 끝에 소속사에 들어가게 된 뒤로 방송 규모가 조금씩 커진다.
소속사는 수희에게 방송을 더 키우고 싶다면 노출 있는 옷을 입어보라거나, 시청자의 욕망에 어느 정도 장단을 맞춰주라고 권한다.
그럴 때마다 수희의 방송은 급성장한다.
어느새 수희는 전형적인 여캠이 돼 있었다.
작중 유명한 여캠이자 수희의 소속사 동료로 가까워진 주민아도 수희가 밟아온 경로를 먼저 밟았다.
구독자도 많고 그에 비례해 수익도 상당하지만, 여캠으로서 자괴감을 느끼며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민아가 상담에서 이런 말을 한다.
“그거 아세요, 선생님? 배꼽이 보이는 옷을 입으면 시청자가 100명이 늘어나고 짧은 치마를 입으면 300명이 늘어나요. (…) 근데 그런 애들 없으면 못 먹고 사는 제가 진짜 ×× 같아요.” 민아는 어느 날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사이버레커’의 먹잇감이 되고, 한때 자신을 응원했던 시청자가 자신에게 악플을 쏟아내자 결국 자살한다.
여캠 탈출을 시도하지만 돌아온 건 조롱과 불신
방송이 성장할수록 수희의 삶은 도리어 괴로워진다.
민아는 수희의 미래를 암시하는 듯하다.
여캠을 이어가는 한 수희도 결국 민아처럼 될 거라고. 실제로 수희는 애인과 헤어지는 불행을 시작으로 스토커가 붙고, 시청자의 반응 하나하나에 휘둘리기 시작하고, 사이버레커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막대한 후원으로 안정적 수익을 창출하지만, 그 수익을 유지하기 위해 점점 더 자신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수희의 삶은 점점 민아의 삶을 닮아간다.
우연한 사건으로 수희는 방송 콘셉트를 바꾸게 된다.
수희의 아빠와 동생들이 시청자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수희는 여캠 탈출을 시도한다.
일부 시청자는 불만을 표하고 비판을 쏟아냈으나, 수희의 삶은 이로써 조금은 건강해졌다.
헤어졌던 애인과도 다시 만난다.
하지만 한 가족이 전부 방송에 노출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수희가 여캠으로 활동한 영상은 인터넷 세계에 박제돼 떠돌았고, 아내에게 폭력을 휘둘렀던 아빠의 행적이 공론화되면서 수희 가족은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수희는 시청자에게 아빠가 좋은 방향으로 바뀌고 있음을 어필해보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조롱과 불신이었다.
결국 수희는 방송을 접기로 한다.
다시 회사원이 됐지만, 출퇴근길 시민들과 직장 동료들의 수군거림과 악의적인 시선에 공황장애를 얻고 만다.
수희의 이야기는 아직 결말이 나지 않았다.
수희는 어떻게 해야 이 위기를 극복하고 평온한 일상을 되찾을 수 있을까. 안쓰러운 마음으로 마저 지켜보고자 한다.
‘수희0’에는 인터넷 세계를 이루는 수많은 주체가 현실성 있게 등장한다.
BJ와 시청자, 사이버레커와 기자, BJ에 대해 이야기하는 온라인 커뮤니티 이용자, 오프라인 세계의 대중, 그리고 작품 속 주체들에 대해 댓글을 다는 독자인 우리가 있다.
웹툰 ‘수희0(tngmlek0)’의 한 장면. 네이버 웹툰 갈무리
무너진 사람을 더 무너뜨리는 데 열중하는 사람들
이 웹툰의 메시지는 바로 그 댓글에서 완성된다.
주인공인 수희에게 감정이입한 독자들은 수희를 궁지로 몰아가는 자들을 향해 원색적인 욕설을 쏟아내고, 때로 수희가 답답한 결정을 내리면 곧장 수희를 비난한다.
어떤 독자는 수희의 방송을 함부로 품평하는 작품 속 시청자처럼 작품을 함부로 품평한다.
‘수희0’은 온라인 세계에서 익명성 뒤에 숨은 이용자의 폭력성과 값싼 관심의 폐해를 밀도 있게 고발하는 작품인데, 수년간 이 작품을 즐겨온 독자가 어느 순간 작품 속 이용자처럼 댓글을 다는 풍경은 그야말로 기이하고 섬찟하다.
이처럼 수희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가 별반 다르지 않기에, 수희의 고난은 현실에서도 재현된다.
현실의 이야기를 웹툰으로 만들었으니 당연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작품 속 많은 묘사가 현실을 충실하게 재현했지만, 그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타인에 대한 냉소와 불신이다.
수희가 마지막 방송을 켠 시점에 수희는 이미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그러나 시청자는 그런 수희에게 일말의 동정조차 할 생각이 없었다.
이미 무너진 자를 더 분명하게 무너뜨리는 데만 열중했다.
수희가 울음을 터뜨리자 “감성팔이 하지 말라”며 조롱했고, 시청자의 위선을 비난하자 “벗방이나 하던 ×이”라고 모욕했다.
“여러분껜 행복한 일만 있길 바란다”는 인사로 방송을 종료하는 수희에게 누군가는 “돈 떨어지면 돌아올 게 뻔하다”고 쏘아붙였다.
현실 속 우리는 얼마나 다른가? ‘수희0’에서 우리는 수희와 그 가족의 삶과 변화를 알고 있으니 이들을 함부로 공격하는 작품 속 대중을 비판하지만, 현실 속 우리 또한 종종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들의 삶과 변화를 살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삶을 가만히 헤아려보기를 거부하고 변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는 사람만 넘쳐나는 사회에서, 우리는 가상세계에서 정의를 말하고 현실 세계에서 불의에 가담하는 행태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시청자들은 수희가 이미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은 상태에서 더 분명하게 무너뜨리는 데 열중한다.
웹툰 ‘수희0(tngmlek0)’의 한 장면. 네이버 웹툰 갈무리
“평범한 사람 살게 하는 건 작은 배려”
수희의 삶은 위태롭다.
행복과 절망을 내내 오르내린다.
이제 좀 평화를 되찾았다 싶을 즈음이면 어김없이 불행이 찾아온다.
오죽하면 독자가 작가에게 수희 좀 행복하게 해달라고 애원할 지경이다.
수희가 불행해질 때면 죽은 민아의 그림자가 다시 어른거린다.
그럼에도 수희는, 적어도 아직은 살아 있기를 택한다.
사이버레커에게 남아 있을지 모를 선의에 호소해보기도 했고, 사나운 시청자를 향해 마지막으로 용기 내어 자신의 말을 해보기도 했고, 방송을 접은 뒤로도 숨거나 도망치지 않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결단을 내릴 만큼 수희의 내면은 단단해졌다.
수희에겐 가족과 애인이 있었다.
그리고 초기부터 몇 차례 콘셉트를 바꾸는 동안에도 흔들림 없이 남아 수희를 응원해온 소수의 애청자가 있었다.
마지막 방송에서 수희가 온갖 조롱과 모욕에 폭격당할 때조차 끝까지 “고생했다”고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이다.
그런 관계들이 수희의 버팀목이다.
수희에게 인방은 불행의 원인이지만, 동시에 위로와 응원을 얻는 창구였다.
모니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직거래된 말과 감정은 칼처럼 날카롭다가도 햇볕처럼 따뜻하기도 했다.
‘수희0’ 작가 생일기분(필명)이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한 말도 이런 의미다.
“결국 평범한 사람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거대하고 특별한 계기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작은 배려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수희를 살아가게 만드는 것 역시 그런 작은 배려와 사랑 아닐까.”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지만 살릴 수도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관심이다.
그러니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누군가의 버팀목이 돼줄 준비가 돼 있는가. 누군가를 살릴 의향이 있는가. ‘수희0’의 이야기가 결말로 향해 가는 듯하다.
수희는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까.
강남규 ‘토론의 즐거움’ 멤버·‘지금은 없는 시민’ 저자
웹툰 ‘수희0(tngmlek0)’의 한 장면. 네이버 웹툰 제공
어느새 여캠이 된 회사원, 행복해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