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가자의 참극]알바네세, 유엔 인권이사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아주 수지맞는 장사” 짚어… 트럼프 정부 제재에 “마피아식 위협에 굴하지 않겠다”
2025년 7월14일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 북부 가자시티에 마련된 무료급식소에서 굶주린 주민들이 배식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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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된 땅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유일한 숨통은 바다다.
수천 년 동안 광야를 지나온 이들이 가자의 오아시스에서 생명수를 얻었고, 그 앞바다인 지중해를 통해 다시 도처로 이동했다.
이제 그마저 막혔다.
물 부족 사태 속 한여름 찌는 더위를 피할 수도, 그나마 주린 배를 채워줄 물고기를 낚을 수도 없게 됐다.
아비차이 아드라이 이스라엘군 대변인은 2025년 7월12일 소셜미디어 엑스를 통해 이렇게 발표했다.
“가자지구 해안 지역에 엄격한 보안조처를 발령한다.
해변·해상 진입은 전면 금지된다.
수영은 물론 일체의 어로 행위도 금지된다.
가자지구 전역에서 해변·해상에 진입하면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
”
“바다에서 수영해도 목숨 위태” 위협한 이스라엘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의 최신 자료를 보면,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 면적의 82.6%를 군사작전 지역으로 지정했다.
가자지구 인구(약 210만 명)의 90% 이상이 간이 천막에서 피란생활을 하고 있다.
먹을 것도 없는 터에 물이나 전기는 사치다.
어린이와 노인을 중심으로 탈수와 열사병, 수인성 질환이 창궐하고 있다.
이스라엘 일간 하레츠는 7월13일 “위생 상황이 엉망이다보니 상당수 피란민은 바다에서 몸을 씻고 빨래를 한다.
일부는 생선을 잡아 약간의 먹을거리도 마련했다.
이제 그 선택지도 사라졌다”고 전했다.
신문은 두 자녀와 함께 가자지구 중부 데이르알발라의 해변에서 피란생활을 하는 라자 퀴데이(31)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배고파 현기증이 난다.
목이 마르고 너무 덥다.
가자는 최악의 기근 상황에 처해 있다.
한동안 먹지 못했다.
빵 한 조각도 구할 수 없다.
바다는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탈출구다.
바다에 들어간다고 우릴 죽인다면, 천천히 죽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그게 낫겠다 싶다.
그래도 아이들 때문에 두렵다.
큰애는 이제 겨우 9살이다.
아이에게 ‘바다에서 수영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해변에서 천막살이를 하는데, 바다 말고 어딜 갈 수 있겠나? 다음엔 숨 쉴 공기마저 금지할 텐가?”
프란체스카 알바네세(오른쪽) 유엔 점령지 팔레스타인 인권 특별보고관이 2025년 7월16일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에서 열린 ‘헤이그 그룹 긴급회의’ 폐막 직후 구스타보 페트로 콜롬비아 대통령을 얼싸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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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사회의 침묵 속에 이스라엘의 파상공세는 그칠 줄 모른다.
아랍 위성방송 알자지라는 7월17일 오전 “지난 24시간 동안 가자지구 전역에서 적어도 93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가운데 30명은 남부 칸유니스에 자리한 ‘가자인도주의재단’(GHF)의 식량배급소에서 차례를 기다리다 목숨을 잃었다”고 전했다.
2025년 5월 말부터 미국과 이스라엘이 위탁 운영 중인 가자인도주의재단 식량배급소 주변에선 사망 사건이 끊이질 않고 있다.
‘군중 통제’를 명분으로 이스라엘군이 총격을 퍼부어 숨지는 사례도 많지만, 위험을 감지한 피란민들이 한꺼번에 몸을 피하려다 압사사고로 이어져 목숨을 잃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살기 위해 식량을 구하러 나선 길이 ‘죽음의 덫’이 됐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한 나라, 한 지역의 평화를 구축하고 있다.
”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7월7일 미국을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국제형사재판소(ICC)는 2024년 11월 반인도적 범죄와 전쟁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요아브 갈란트 전 이스라엘 국방장관과 함께 네타냐후 총리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한 바 있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은 네타냐후 총리가 공공연히 추진 중인 가자지구 주민 강제 집단이주와 관련해 “주변 국가의 협조를 얻었다.
조만간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화답했다.
특정 인구를 강제 집단이주시키는 건 전쟁범죄다.
2025년 7월11일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파괴된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 남부 칸유니스의 피란민촌에서 한 여성이 망연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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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범죄 비판에 ‘반유대주의’ 색칠해온 미국
이틀 뒤인 7월9일 이번엔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이 나섰다.
루비오 장관은 대통령 행정명령 제14203호에 따라 프란체스카 알바네세 유엔 ‘1967년 이후 점령된 팔레스타인 땅 인권 상황에 대한 특별보고관’을 제재 대상으로 지정했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2기 행정부 출범 직후인 2월6일 서명한 해당 행정명령은 누구든 미국인과 미국의 동맹국에 대한 국제형사재판소의 수사에 협력하면, 미국 입국 금지와 미국 내 자산 동결 등의 제재를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미국은 6월5일에도 이 행정명령에 따라 국제형사재판소 재판관 4명을 제재 대상으로 지정한 바 있다.
이탈리아 출신 국제법 전문가로 2022년 5월 특별보고관으로 임명돼 3년 임기를 마친 뒤 2025년 재임명된 알바네세 보고관은 그간 이스라엘에 대해 날 선 비판을 지속해왔다.
“해괴망측한 주장이다.
마피아식 위협에 굴하지 않겠다.
” 알바네세 보고관은 7월10일 알자지라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내가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이유는 집단살해와 반인도적 범죄, 전쟁범죄를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라며 “국제법과 정의가 존중되는 세상을 향한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알바네세 보고관의 임명 직후부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반유대주의’로 색칠하며 비판해온 미국은 왜 이 시점에 제재에 나섰을까? 알바네세 보고관이 6월30일 유엔 인권이사회에 제출한 39쪽 분량의 최신 보고서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알바네세 보고관은 ‘점령의 경제에서 집단학살의 경제로’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정책을 ‘식민지 인종차별 자본주의’의 전형이라고 짚었다.
이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땅을 장악해 식민지화하고, 유대 정착민을 통해 인종분리(아파르트헤이트)를 제도화하고 있다.
지난 수십 년간 팔레스타인 주민의 자기결정권을 박탈했던 이스라엘은 이제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가자지구에서 주민들의 삶이 총체적으로 파괴되는 동안 요르단강 서안에선 팔레스타인 주민을 겨냥한 공세가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이스라엘의 집단살해가 지속되는 이유는 뭘까? 모두에게 아주 수지맞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
이번 보고서가 이전과 다른 점은 △군사 △감시와 통제 △민간 장비를 동원한 파괴와 건설 △금융자본 등 이스라엘의 집단학살로 이득을 취하는 8개 분야에 걸친 ‘학살의 경제’에 대해 심층 분석을 했다는 것이다.
군산복합체는 막대한 양의 무기를 판매하고, 안면인식과 인공지능 등 첨단기술은 감시·통제·표적살해 등에 활용된다.
굴착기 등 민간용 중장비는 팔레스타인 땅 파괴와 유대 정착촌 건설에 동원된다.
이들 기업에 대한 투자를 통해 금융자본은 막대한 이득을 취한다.
보고서는 록히드마틴과 마이크로소프트, 알파벳과 아마존 등 미국 거대 기업을 포함해 모두 48개 기업과 기관을 ‘학살의 경제’ 수혜자로 꼽았다.
미국이 이례적으로 유엔 고위 인사에 대해 제재에 나선 이유가 있었던 게다.
2025년 7월12일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 남부 칸유니스의 ‘가자인도주의기금’(GHF) 식량배급소 주변에서 주민들이 이스라엘군의 총격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수레에 실어 옮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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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개국 대표단 “이스라엘과 모든 교류 중단”
“이제는 세계 각국이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집단살해를 멈추기 위해 구체적인 행동에 나설 때가 됐다.
”
알바네세 보고관은 7월15일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에서 열린 ‘헤이그 그룹 긴급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이어 “이스라엘 경제는 점령을 지속하기 위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며 “각국은 즉각 대이스라엘 관계를 재검토하고 모든 교류를 중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헤이그 그룹은 “조율된 법적·외교적 노력을 통해 팔레스타인을 겨냥한 이스라엘의 심각한 국제법 위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콜롬비아와 남아프리카공화국 주도로 8개국이 1월31일 설립한 다자협의체다.
이틀 일정으로 열린 회의에는 30개국 대표단이 참석했다.
7월16일 회의를 마친 뒤 각국 대표단은 공동성명을 내어 이렇게 밝혔다.
“점령된 팔레스타인 땅에서 이스라엘의 공세를 중단시키고 국제법을 수호하기 위해 보고타에 모인 각국 대표단은 6개항의 외교적·법적·경제적 조치를 하기로 합의했다.
21개월 전 가자지구에서 집단살해가 시작된 이후 가장 의욕적인 다국적 행동이다.
이를 가속화하기 위해 볼리비아·인도네시아·이라크·나미비아 등 12개국이 먼저 나서 6개항 조치를 입법 등의 과정을 통해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또 제80차 유엔 총회가 개막하는 9월20일에 맞춰 나머지 국가들도 합의안을 이행하기로 했다.
”
성명이 밝힌 6개항은 이스라엘에 대한 전면 무기 금수 조처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땅 불법 점령과 관련된 각종 경제활동 중단, 전쟁범죄를 포함한 이스라엘의 국제법 위반에 대한 철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이 뼈대다.
구스타보 페트로 콜롬비아 대통령은 “역사를 만들기 위해 보고타에 모였고, 마침내 역사를 만들어냈다.
범죄를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는 시대를 끝내기 위한 공동행동이 시작됐다.
국제법 준수가 선택 사항쯤으로 취급받거나, 팔레스타인 주민의 목숨이 헌신짝 취급 당하는 것을 더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시”라고 강조했다.
세상이 조금은 나아질 수 있을까?
팔레스타인 보건당국은 2023년 10월7일 개전 이후 전쟁 649일째를 맞은 2025년 7월16일까지 이스라엘군 공격으로 가자지구 주민 5만8573명이 숨지고 13만9607명이 다쳤다고 밝혔다.
‘집단학살의 경제’ 파헤친 괘씸죄, 미국 제재 명단 오른 유엔 인권보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