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땡큐!]“그래도 나는 눈앞의 곤경에 처한 사람을 외면하고 싶지 않아.”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이 글은 애니메이션 ‘장송의 프리렌’ 전개에 대한 주요 정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최근 장혜영 전 의원이 애니메이션 ‘장송의 프리렌’을 좋아하는 이유를 웹진 ‘도모’에 기고했다.
나도 이 만화에 빠져 있기에 단숨에 읽었다.
먼저 세상을 떠난 동료들과의 모험을 되짚으며 인간의 마음과 사랑을 알아가는 엘프 마법사 프리렌의 여정에 자기 삶을 포갠 감동적인 글을 읽으니 내게는 이 만화가 어떤 의미였는지 돌아보게 됐다.
  ‘마왕 이후’를 상상한 마법사 프리렌 ‘장송의 프리렌’에는 여성 스승 셋이 등장한다.
주인공 프리렌, 그의 인간 스승 플람메, 그리고 플람메의 스승이자 엘프 대마법사인 제리에. 제리에가 마법은 특별한 재능을 지닌 자의 것이라고 믿는 데 반해, 플람메는 누구나 마법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교육제도를 만들고 마법 문화를 바꾼다.
프리렌은 그런 플람메에게 수련받고 훗날 용사 힘멜과 함께 마왕을 물리치고 평화로운 시대를 연다.
마왕이 건재하던 시절, 프리렌과 플람메가 제리에 앞에 선 장면이 있다.
거의 모든 마법을 통달한 제리에는 프리렌에게 원하는 마법을 하나 가르쳐주겠다고 한다.
프리렌은 망설임 없이 거절한다.
마법이란 스스로 탐구할 때 가장 즐겁다는 이유에서다.
‘야심’이 없다며 실망한 제리에에게 플람메는 이 아이가 언젠가 마왕을 쓰러뜨릴 거라 단언한다.
“평화로운 시대에 사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는” 자신들에겐 불가능한 일을 프리렌은 할 수 있을 거라고. 프리렌은 “평화로운 시대의 마법사”라 덧붙인다.
이 세계관에서 마법은 상상할 수 있을 때만 실현 가능하다.
이 세계의 가능성은 상상력에 달렸다.
이 대화를 듣는 순간, 마법은 내게 ‘정치’의 은유처럼 느껴졌다.
정치 혐오가 일상인 시대에 정치가 마법처럼 변화의 가능성을 열 수 있다고 믿는 내가 우습기도 했지만, 그 외엔 마법에 견줄 만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함께 상상하고 실현하는 정치 없이는 도달할 수 없다.
프리렌은 ‘마왕 이후’를 상상할 수 있었기에 다른 시대의 마법사가 된다.
플람메는 그런 가능성을 알아봤고 자신은 할 수 없는 일을 제자가 해낼 것을 안다.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다음 시대를 사는 이를 지지하는 자세. 어쩌면 좋은 스승이란 그런 존재일지 모른다.
프리렌 역시 자신의 인간 제자 페른을 가리켜 ‘인간의 시대를 열어갈 마법사’라고 말한다.
시대와 생애의 경계를 넘어서는 교육적 관계를 보며, 좋은 정치란 시민들이 서로를 스승 삼고 배우는 과정이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 나는 ‘전쟁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가 참 어렵다.
실패한 정치가 빚어낸 학살과 전쟁을 보며 자꾸 절망하고 평화를 상상할 힘을 잃는다.
하지만 책 ‘전쟁 없는 세상’을 쓴 마이켄 율 쇠렌센은 말한다.
“군사주의가 세력을 키워갈 때 전쟁 말고도 다른 길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려면” 벽에 부딪히는 느낌이 들더라도 평화주의와 비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야 한다고. 다양한 선택지를 끊임없이 제시하다보면 “사람들이 세상이 실제로 달라질 수 있다고 상상하기 시작”하며 거기서 변화가 일어날 거라고 말이다.
  ‘전쟁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정치 프리렌이 ‘마왕 이후’를 상상할 수 있었던 건 용사 힘멜과의 여정에서 이미 그 세상을 살았기 때문이다.
전투 마법이 아닌 “꽃밭을 만드는 마법”을 계기로 만나게 된 동료라 그런지 싸움만이 전부가 아닌 여행을 한다.
힘멜은 한시라도 빨리 마왕을 쓰러뜨리자고 채근하는 동료에게 말한다.
“그래도 나는 눈앞의 곤경에 처한 사람을 외면하고 싶지 않아.” 그들이 남긴 “하찮은 모험담”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건넨 작은 도움과 평화로운 순간들로 이뤄진다.
그 감각들이 쌓여 상상할 수 없던 세상을 상상하게 한다.
전쟁 없는 세상도 그렇게 올 것이다.
  김주온 BIYN(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활동가·작가
정치는 마법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