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낙태죄’ 위헌 이후 대체입법 없이 허송세월… 건강보험 전면 적용·유산유도제 도입 등 행정조치 가능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가 2025년 5월22일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거 사무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2년 대선 때 임신중지 의료행위 건강보험 보장 강화를 약속했던 이재명 후보가 이번 대선에서는 침묵하자 시민단체들이 비판했다.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 제공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을 떠올릴 때 많은 사람이 경찰관과 소방관을 먼저 꼽는다.
2023년 기준으로 공무 수행 중에 얻은 부상이나 질병으로 목숨을 잃은 경찰관은 전체 경찰공무원 13만1046명 중 11명이다.
이를 토대로 환산한 경찰관 10만 명당 순직률은 8.4명이다.
같은 해 소방관은 전체 6만6797명 중 2명이 사망해 10만 명당 3명의 순직률을 보였다.
그러나 같은 2023년 기준으로 10만 명당 사망률이 10명에 달하는 사람이 있다.
임신부, 바로 여성이다 . 이는 여성이 임신과 출산으로 사망할 확률이 소방관 또는 경찰관이 근무 중에 사망할 확률보다 높다 는 뜻이다.
여성이 임신과 출산 중에 사망할 확률은 도로교통사고 사망률(2023년 기준 10만 명당 4.9명)보다도 높다.
임신·출산 중 사망률, 소방관·경찰관보다 높아 이처럼 임신과 출산은 위험한 일이다.
누군가에겐 가슴이 벅차고 감격스러운 일일 수 있다.
동시에 임신과 출산은 여성 몸에 손상을 초래하고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일이다.
결코 모험일 수 없다.
남성에 의해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한 여성일수록 임신·출산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 이처럼 원치 않는 임신 유지를 강요받지 않고 임신·출산 여부와 그 시기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권리 등은 ‘성·재생산권’이라는 이름으로 국제사회에서 인권으로 인정된 지 오래다.
(1994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유엔 국제인구개발회의) 하지만 임신중지를 처벌하던 형법상 ‘낙태죄’ 조항에 대해 헌법재판소(헌재)가 2019년 4월11일 헌법불합치(위헌) 결정을 한 날로부터 햇수로 6년이 지났는데도 안전한 임신중지가 불가능한 현실은 그대로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며 6·3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남성 대선 후보들은 이 문제에 조금도 관심이 없다.
권영국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만이 ‘안전한 임신 중단과 여성의 성·재생산 권리 보장법 도입’을 주요 공약으로 제시했다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2025년 5월14일 부산 유엔기념공원을 방문한 자리에서 ‘헌재 결정 취지에 맞게 법을 개정할 의사가 있는가’라는 취재진 질문을 받았다.
“그렇게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이면 헌법재판소 판결이 난 즉시 입법이 이뤄졌을 것”이라며 “지금까지 입법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사회적 합의에 이르는 것이 매우 어려운 주제라는 뜻이다”가 이재명 후보가 한 말이다.
이 말만 보면 마치 국회에서 그동안 치열하게 법률 개정 노력을 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반대로 국회가 입법 책임과 의무를 방기한 것이 진실에 가깝다 . 헌재의 ‘낙태죄’ 위헌 결정 이후 제21대 국회(2020~2024년) 때 모자보건법 개정안 7건이 발의됐다.
유산유도제를 도입해 약물에 의한 임신중지를 허용하는 법안과 임신중지에 관한 정보·상담 서비스를 제공하는 지원기관을 설치하는 법안, 임신중지에 보험급여를 적용하거나 의료비를 지원하는 법안 등이 포함돼 있었다.
이 법안들은 헌재가 제시한 법률 개정 시한(2020년 12월31일)을 훌쩍 넘긴 2023년 9월20일∼12월18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법안 내용을 구체적으로 심사하는 회의)에서 세 차례 심사가 진행됐을 뿐이다.
정부·여당(국민의힘)과 야당(민주당 등) 간 이견이 좁혀지지 않으면서 논의가 멈췄고, 개정안들은 제21대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제22대 국회가 임기를 시작한 2024년 5월30일부터 2025년 5월29일까지 안전한 임신중지를 보장하는 모자보건법 개정안은 발의되지 않았다.
종합하면 지난 국회에서는 치열하게 법률 개정 노력을 하지 않았고, 이번 국회에서는 아예 노력 자체를 하지 않고 있다.
2025년 5월23일 서울 영등포구 한국방송(KBS) 본관 스튜디오에서 열린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 주관 제21대 대통령 선거 2차 후보자 토론회 시작에 앞서 대통령 후보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왼쪽부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 권영국 민주노동당 후보,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 국회사진기자단 이재명 “합의 어려운 문제” , 김문수·이준석은 ‘딴소리’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공약집에서 ‘여성희망복무제 도입’을 공약으로 제시하며 여성을 권리의 주체로 보지 않고 가용자원으로만 보고 있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선 후보 공약집에는 ‘여성’이라는 존재가 아예 지워져 있다.
사실 지금도 안전한 임신중지가 가능한 환경을 만들겠다는 정부의 의지만 있다면 최소한의 안전망을 깔 수는 있다 . 미페프리스톤 같은 유산유도제의 도입, 임신중지 의료행위에 건강보험 전면 적용, 임신중지가 가능한 의료기관 정보 제공, 보건소와 국공립 의료기관, 대학병원을 연결한 지원체계 구축 등은 법률 제·개정 없이도 할 수 있는 일들이다.
이 말인즉, 6·3 대선에서 선출될 행정수반인 대통령이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뜻인 ‘사회적 합의’를 들먹이지 않고 집행 의지만 충분하다면 여성의 성·재생산권 보장을 위한 입법 부재의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다는 의미다.
특히 세계보건기구(WHO)가 미소프로스톨 과 함께 필수의약품(우선순위가 높은 의료 요구를 효과적이고 안전하게 충족하는 의약품)으로 정한 미페프리스톤 은 1988년 프랑스와 중국을 시작으로 미국, 영국, 독일, 일본 등 현재 100개국(2024년 기준)에서 사용할 만큼 안전성이 확인된 약물이다.
책 ‘책임감 있게 사정하라’의 저자 가브리엘르 블레어는 남자가 원치 않는 임신을 유발했을 때 여자가 이를 어떻게 수습할지를 두고 빠지는 고민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어쨌든 여자는 숱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임신을 유지하고 아이를 낳아야 하나? 직장에 계속 다닐 수 있을까? 가족에게 버림받지는 않을까? 병원비는 어떻게 마련하지? 내가 아이를 키울 형편이 되나? 임신 중단 수술을 받을 수는 있나? (…) 원치 않는 임신을 유지하거나 중단하거나 임신 합병증으로 고생하거나 산고와 분만을 겪는, 그로 인해 죽음에 이르는 남자는 없다.
남자는 원치 않는 임신에서 가볍게 벗어날 수 있고 실제로 그러고 있다.
하지만 여자는 그럴 수 없다.
”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 주최로 2023년 4월9일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열린 집회에서 참석자들이 ‘임신중지는 건강권’ ‘유산유도제 도입하라’는 문구가 적힌 머리띠를 착용했다.
한겨레 김혜윤 기자 “임신중지도 삶의 질 좌우하는 문제”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의 나영 대표는 “현재 캐나다, 뉴질랜드를 비롯한 여러 국가는 임신 몇 주 차에 어떤 임신중지 방법이 안전하고 임신 기간(주수)에 따라 어떤 전문 보건의료인이 필요한지, 시기마다 어떤 정보와 상담, 지원이 필요한지에 관해 아주 구체적인 지원체계를 마련해두고 있다 ”며 “출산과 양육만큼 임신중지도 고용, 학업, 경제적 여건, 주거 등에서 매우 중요하고 삶의 질을 좌우하는 문제다.
이제는 정부와 국회도 ‘안 된다’ ‘어렵다’고만 하지 말고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실질적인 시스템을 구축해나가야 한다.
대선 후보들도 마찬가지다”라고 밝혔다.
임신중지 ‘안전망’ 6년째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