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관저의 100시간>·<힐마운트>·<시뮬라시옹>, 뮤지컬 <테슬라>·<보이스 오브 햄릿>
연극 <관저의 100시간>은 일본 도쿄 관저 관료들의 이해타산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 당시를 인간애로 연대해 버텨낸 서민들의 중첩된 공간과 삶을 표현한다.
FOTOBEE·서울연극협회 제공
에어컨이 고장 났다.
AS를 신청했지만 3주 걸린단다.
고온다습한 나날, 집에서 버티지 못하고 일찌감치 공연장 순례를 시작했다.
마침 46회 서울연극제와 19회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이 서울과 대구에서 열렸다.
일정에 맞춰 관람을 시작했는데 전기에너지와 AI 관련 작품들이 눈에 뜨인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이하 ‘원전’) 사건을 다룬 연극 <관저의 100시간>과 전기에너지를 대중화한 니콜라 테슬라를 다룬 뮤지컬 <테슬라>가 동시 상연 중이었다.
AI를 활용한 1인 콘서트 뮤지컬 <보이스 오브 햄릿>과 대단지 아파트 입주민 대화 내용을 AI 기반으로 텍스트 마이닝(비정형 데이터에서 의미 있는 패턴과 시야를 추출하는 과정)한 이머시브 연극 <힐마운트 더퍼스트 센트럴포레 로얄그랜드 스타파크 위례시티>(이하 ‘힐마운트’)가 재밌다고 소문났다.
필자가 이들 작품을 반복 관람하고 이 글을 쓰려는 와중에 <관저의 100시간>과 <테슬라>가 한국 공연예술계를 대표하는 서울연극제와 DIMF에서 각기 대상을 차지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작품성과 흥행성을 인정받았다는 의미다.
원전 경각심 드러낸 친환경 연출
연극 <관저의 100시간>(기무라 히데아키 원작·황나영 작·오세혁 연출·조민영 드라마터그·안지형 안무·남경식 무대·박성희 조명·전광표 사운드·네버엔딩플레이 제작) 무대는 대도구와 소도구 없이 단출하다.
정확히 말하면 나무 의자 예닐곱 개와 헌옷더미와 전단지가 나무 탁자 몇 개에 놓여 있다.
그나마 대도구라고 할 만한 것은 천장에 달린 기하학적 모양의 대형 조형물 정도다.
영상이나 사운드 증폭을 위한 배선이나 스크린 등 첨단 장치는 없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당시 일본 정부의 무능과 피해 당사자들의 사투를 담은 작품다운 친환경적 무대예술이다.
배우들은 넓은 극장 위아래층을 뛰어다니고 사방으로 흩어진 동선을 소화하면서도 핀마이크를 사용하지 않는다.
들리든 안 들리든 배우 본연의 발성만으로 120분 꽉 찬 서사를 땀 뚝뚝 흘리며 이끌어나간다.
매뉴얼에 없다는 이유로 골든타임을 놓친 일본 정부의 백태와 무능, 서민들의 절망과 연대를 여러 층위의 서사와 동선으로 교직해 입체적으로 재구성했다.
도쿄 관저에 모인 총리(최영우 분)를 비롯해 각료들은 총리의 비리가 도마 위에 오르자 진정성을 보이자는 경제산업성 대신(김대곤 분)과 약점을 보이면 안 된다는 관방장관(이경미 분)으로 양분된다.
슬랩스틱코미디 같은 의자 퍼포먼스 난투극은 이해타산에 여념이 없는 그들의 체면치레를 표면화하는 과정이다.
동시에 후쿠시마 낙농업 가정의 남편 쇼(박완규 분)와 아내 미사키(임찬민 분), 고등학생 딸 하나(이아진 분)의 평화로운 티격태격이 관저 정치인들 난투극과 교차한다.
동성 커플인 원전 직원 미오(김려은 분)와 화가 후미에(류아벨 분)의 일상적 동선과도 중첩된다.
보통의 여러 층위 서사는 공간을 분할해 진행되는 반면 오세혁 연출은 처음부터 이 모든 사건과 사연을 중첩했다.
마치 영화 <인셉션>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관객들은 전지적 관찰자 시점으로 도쿄와 후쿠시마의 다양한 삶을 조망하듯 들여다보며 당시의 불합리와 고통을 간접 체험한다.
탄소중립에 역행하는 AI
헝가리 뮤지컬 <테슬라>의 인문학적이면서 우직한 군무. 그 안에서도 사유하는 테슬라의 표정이 돋보인다.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제공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초연한 헝가리 뮤지컬 <테슬라>(졸탄 에그레시 작·아론 세베슈티엔 작곡·페테르 시아미뮐러 작사·데니스 라도 연출·아니코 사보 안무·예뇌키시 비주얼 애니메이션)는 교류(AC)전기를 발명한 니콜라 테슬라(1856~1943)의 삶과 철학, 직류(DC)전기로 시대를 풍미한 사업가 토머스 에디슨과의 전류 전쟁을 재현하고 있다.
아크로바틱 군무와 함께 테슬라의 생애 전체를 섬세하게 디자인한 인문학적 LED 영상이 이색적이다.
시간순으로 풀어나간 이야기의 구조와 쇼뮤지컬 같은 단순 전환은 세련되고 입체적인 한국 대극장 뮤지컬과 다른 우직함으로 다가온다.
테슬라(게르고 미콜라 분)는 평생 에너지의 나눔, 공공성, 인류애를 주창했으나 결국 직류전기의 창안자인 에디슨식 자본 논리에 밀려 고독한 최후를 맞이한다.
누구나 평등하게 전기에너지를 사용해 AI 같은 첨단 산업으로 거듭난 현대 첨단 세상은 테슬라의 교류전기 덕이다.
테슬라는 “모든 생명은 연결돼 있는 것”이라며 시공을 초월한, 자연에서 비롯한 전기에너지의 상생을 역설했다.
그러나 <관저의 100시간>에서 경고했듯이 전기 양산의 첨병인 원전은 인류 절멸의 위기를 내포하고 있음에도 확산하고 있다.
천문학적인 전력량이 있어야 하는 데이터센터 기반의 AI 산업으로 지구 전체가 질주하고 있어서다.
새로운 정부가 천명한 ‘AI 산업 100조원 투자’ 방향성도 같은 맥락이다.
지난 7월 8일 부천아트센터에서 열린 ‘인공지능과 문화산업의 현장 정책토론회’(부천국제영화제 주최·문화강국네트워크 주관)는 일반시민과 국회의원 및 각계 전문가들이 문화예술계 AI 활용 현장을 간접 체험하는 자리였다.
AI를 활용한 창작으로 화제를 모은 뮤지컬 <보이스 오브 햄릿>(오필영 프로듀싱, 이모셔널씨어터 작·작곡·무대예술, 김성수 편곡·음악슈퍼바이저, 박한근 연출, 홍유선 안무)과 죽은 아내와의 감정적 교류를 AI로 체험하는 <시뮬라시옹> 및 입주민 대화 내용을 AI 기반으로 텍스트 마이닝한 <힐마운트>(최양현 작·이태린 연출) 창작진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모두 AI 기술을 예술 창작에 활용하면서도, 인간 고유의 감정과 사고의 흔적을 역설적으로 부각시켰다.
토론자로 참여한 필자를 비롯한 창작진들은 이 세 작품을 통해 ‘AI는 기존의 영화나 연극을 대체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다움이라는 희소가치를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며 새로운 예술로 확장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연극 <힐마운트 더퍼스트 센트럴포레 로얄그랜드 스타파크 위례시티>는 AI를 활용한 텍스트 마이닝을 기반으로 제작했다.
예술창작공장 콤마앤드 제공
기술과 에너지는 언제나 정치와 결부된다.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CEO는 최근 “AI의 미래를 가로막는 것은 반도체가 아니라 전력이며, 전력은 사회적 허가(social permission)를 전제로 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반면 샘 알트먼 오픈AI CEO는 “AI를 지속 가능하게 확장하려면 ‘태양광+저장 기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발언한 바 있다.
전력에 대한 인식과 철학은 다르지만, 두 사람 모두 AI의 미래는 결국 에너지와 윤리라는 구조적 조건 속에 있다고 본다.
AI 산업을 상상한 대로 끌어올리기 위한 천문학적 전력 수급은 과연 합리적인 선택일까? 모두가 달려가는 그 길이 정말 맞을까? 모두가 기피한 그 결론이 과연 옳은 선택이었나?
<관저의 100시간> 마지막 장면, 여고생 하나의 울부짖음이 생생하다.
“당신들, 아무 책임 안 졌어. 여기 있는 사람들 아무도 감옥에 안 갔어. 단 한 명도 기소되지 않았어. (…) 도쿄는, 우리를 기억합니까?”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아포리아(해결 불가능한 난제)는 사유가 멈추는 곳이 아니라 윤리가 시작되는 지점”이라고 말했다.
모두가 달려가는 AI 산업에 대한 문화예술계의 질문은 이제 막 시작됐다.
<관저의 100시간>은 내년에, <시뮬라시옹>은 오는 11월 두 번째 시즌 공연을 시작한다.
다른 작품들은 유튜브에서 영상 클립을 검색할 수 있다.
전력 폭풍 흡입하는 ‘AI의 역설’[이주영의 연뮤덕질기](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