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해 10월 14일 서울 서초구 고등법원에서 열린 삼성 회계 부정과 관련한 항소심 2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지금부터 정확히 10년 전인 2015년 7월 17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사실상 에버랜드)의 합병 주주총회가 열렸다.
이 총회에서 합병안은 국민연금의 찬성에 힘입어 가결됐다.
이재용의 승계가 실현된 순간이었다.
그 후 10년이 흐른 지난 7월 17일, 이 합병이 분식회계에 근거한 부당한 합병이었다는 문제 제기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 판단이 나왔다.
무죄. 조금도 놀랍지 않다.
이 합병이 정당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우리나라가 썩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부당 합병의 근저에는 삼성바이오로직스(이하 삼바)의 분식회계 논란이 있었다.
삼바는 미국의 바이오젠과 합작해 설립한 삼성바이오에피스(이하 에피스)를 줄곧 종속회사로 간주해 에피스 주식을 원가법으로 회계 처리를 해오다, 느닷없이 2015년 12월 에피스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했다고 주장하면서 에피스를 관계회사로 간주하고, 그 주식은 지분법으로 평가하는 등 회계 처리 방식을 변경했다.
이 과정에서 삼바 장부에 기재된 에피스 주식 평가액은 3000억원에서 4조8000억원으로 수직 상승했다.
오직 삼성만이 부릴 수 있는, 아니 부리고도 무사할 수 있는 요술이었다.
이 글에서 이 복잡한 논쟁을 다시 되풀이할 생각은 없다.
다만 삼바 사건은 우리나라에서 회계원칙이 얼마나 왜곡되기 쉬운 것인지를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보험료로 삼성전자 지배’ 문제 미해결
이번 대법원 판결로 이재용 회장은 법의 단죄를 피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그것으로 삼성 지배구조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삼성그룹의 핵심 골격인 ‘삼성생명 유배당 계약자들의 돈을 이용한 삼성전자 지배’라는 본질적인 문제는 아직도 정의롭게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이 눈에 띈다.
대법원 판결이 있기 하루 전날인 지난 7월 16일, 한국회계기준원은 ‘보험회사 관계사(계열사) 주식 회계 처리의 문제점 검토’라는 난해한 제목의 정책토론회를 개최했다.
마치 양자암호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제목을 내건 이 토론회가 다루는 보험회사는 다름 아닌 삼성생명이었다.
분석의 대상이 삼바에서 삼성생명으로 바뀌었을 뿐, 핵심 논점은 또다시 지배력(또는 유의미한 영향력)과 관련한 회계 처리 문제였다.
그리고 그 함의 역시 무시무시하다.
삼바 분식회계 문제가 이재용의 승계를 송두리째 부정할 수 있었던 것처럼 삼성생명의 계열사 주식 회계 처리 문제도 그 결론에 따라 삼성생명에 기존 유배당 계약자에 대한 막대한 규모의 배당 의무를 발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생명의 회계 처리 문제는 ‘밸류업’이라는 이름으로 금융위원회가 쏘아 올렸던 작은 공에서 비롯됐다.
우리나라에서 밸류업이란 사실상 ‘즉각적인 주가 상승 재료’를 말한다.
그중 가장 자주 등장하는 수단이 자사주 소각이다.
주식 수가 줄어든 만큼 주가는 상승하고 기존 주주들의 지분율도 올라간다.
삼성생명과 끈끈하게 연결된 삼성전자와 삼성화재도 밸류업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자사주를 매입해 소각했다.
논란은 여기서 시작됐다.
동일한 계열사지만 삼성전자와 삼성화재에 대한 삼성생명의 대응은 달랐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말부터 올해 2월 사이에 약 3조원의 자사주를 소각했다.
이 소각에 의해 삼성생명과 삼성화재의 삼성전자에 대한 합산 지분율은 기존 보유 비율인 10%를 초과하게 됐다.
이는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에 의한 규제 비율인 10%를 초과하는 것이었는데, 삼성생명과 삼성화재는 삼성전자 주식을 매각해 다시 합산 지분율을 10%로 회귀시켰다.
그런데 삼성화재의 경우는 달랐다.
올해 4월, 삼성화재가 자사주를 소각함에 따라 삼성생명의 화재 지분율은 기존의 14.98%에서 15.43%로 상승해 보험업법상 규제 기준인 15%를 초과하게 됐다.
보험회사는 보험업법에 따라 다른 회사의 주식을 15%를 초과해 보유할 수 없으며, 굳이 보유하려면 그 다른 회사를 자회사로 편입시켜야 한다.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사례처럼 초과분 일부를 시장에 매각하거나, 삼성화재를 자회사로 편입시켜야 했다.
삼성생명은 이중 후자를 선택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자회사 편입에 따라 삼성생명이 삼성화재에 대해 ‘유의미한 영향력’을 획득했다고 볼 여지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영향력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보험회사의 회계 처리는 크게 달라진다.
앞에서 말한 회계기준원의 정책토론회는 ‘삼성생명’이라는 단어만 사용하지 않았을 뿐 정확히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이었다.
삼성생명은 아마도 자회사 편입 이후에도 삼성화재에 대한 유의미한 영향력이 없다고 주장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회계기준원 정책토론회의 주된 기조는 그게 아니었다.
토론회 참가자들이나 토론회에서 공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회계전문가들의 다수 의견은 영향력이 생겼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배당 계약자에 대한 정당한 보상 결단할 때
그럼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거두절미하고 결론만 제시하면 막대한 규모의 보유지분 평가이익 누적액을 유배당 계약자에게 배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보유지분의 공정가치 변동에 따른 계산상의 손익은 ‘기타포괄손익’이라는 창고에 넣어두고, 유배당 계약자에 대한 배당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유의미한 영향력을 획득하게 되면 공정가치 평가가 아니라 지분법을 사용해야 한다.
이때 지분법 관련 손익을 실현된 손익으로 인식해 배당 재원에 포함할 뿐만 아니라 기타포괄손익으로 잡아뒀던 과거 평가손익의 누적액까지 모두 이익잉여금으로 전환해 계약자 배당의 재원으로 사용해야 한다.
삼성 입장에서는 이런 이슈가 불거진다는 것 자체가 전혀 달갑지 않을 것이다.
이번 회계 처리 이슈는 삼성의 지배구조라는 해묵은 숙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삼성 문제의 핵심은 ‘유배당 계약자의 돈으로 그룹 지배구조를 구축하고도 정작 유배당 계약자에 대해서는 정당한 보상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삼성생명의 상장 때도 이 문제가 논란의 핵심이었고, 삼성전자 주식을 공정가치로 평가해 총자산의 3%를 초과하는 부분은 매각하라는 보험업법 개정 때도 이 문제가 중요한 논점이었다.
순전히 유배당 계약자 배당의 규모로만 보면 삼성전자 주식 매각의 효과가 삼성화재 주식 회계 처리에 따른 배당 규모보다 훨씬 더 크다.
이제 대법원 무죄 판결을 받은 이재용 회장은 자기 앞에 놓인 해묵은 숙제를 해결해야 할 때가 됐다.
중요한 것은 유배당 계약자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다.
보험업법 개정도 받고 삼성화재 회계 처리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옛 삼성물산 주주의 이익을 훼손했다는 비판에 더해 유배당 계약자의 이익마저 저버렸다는 비판까지 감수할 것인가. 금융감독당국과 이재명 대통령도 사태를 주시해야 한다.
10년의 재판, 그러나 여전히 남겨진 이재용의 숙제[전성인의 난세직필](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