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 심리 통해 ‘트럼프 구원자’ 역할…트럼프와 은밀한 동거
미국 워싱턴의 연방 대법원 건물 앞에 성조기가 걸려 있다.
게티이미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곤경에 처할 때마다 등장하는 구원자가 있다.
바로 미국 연방 대법원의 ‘긴급 심리제’다.
본안 심리와 달리 판결문이나 구두 변론 같은 통상의 공개적 절차 없이 진행돼 ‘그림자 심리’라고도 불린다.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한 행정명령이 연방 지방법원에 의해 가로막히는 순간마다 연방 대법원은 긴급 심리를 등에 업고 나타났다.
‘트럼프 2기’ 취임 이후 연방 대법원은 회기 마지막 날인 지난 6월 27일(현지시간)까지 보류 상태인 4건을 제외한 총 15건의 긴급 심리 안건을 처리했다.
그중 12건의 판결이 트럼프 대통령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장 포함 대법관 9명 가운데 보수파 6명, 진보파 3명으로 평가되는 오늘날의 ‘보수 우위’ 미국 대법원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은밀한 동거를 이어가고 있다.
트럼프의 ‘구원자’, 대통령 권한 강화
올해 1월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발표된 주요 행정명령은 늘 유사한 전철을 밟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갑작스러운 행정명령을 내리면, 연방 지방법원은 이내 효력 정지 판결을 내린다.
이어진 연방 항소법원에서도 하급심의 판결이 유지되면 트럼프 행정부는 연방 대법원에 긴급 심리 ‘SOS’ 신호를 보낸다.
이런 방식으로 대법원은 지난 5월 6일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를 전면 금지했고, 지난달 6일 정부효율부가 사회보장국 시스템에서 개인의 민감 정보에 접근하도록 허용했다.
지난달 27일 연방 대법원은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시민권을 갖는 ‘출생 시민권’을 금지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을 허용했다.
이 역시 하급심을 뒤집은 결과였다.
다만 행정명령에 대해 효력 정지 가처분 소송을 제기한 22개 주에서만 효력 중지를 인정했다.
연방지법 중 한 곳이 대통령령에 대한 가처분 결정을 내리면 그 결정의 효력이 전국적으로 적용되도록 하는 미국 연방 지법의 ‘보편 금지 명령’ 권한을 부정한 것이다.
즉 대법원은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 추진에 걸린 하급심이라는 브레이크를 제거하다 못해 하급 법원의 권한을 제한하기에 이르렀다.
트럼프 대통령은 “연방 대법원 결정 덕분에 우리는 수많은 정책을 신속하게 집행할 수 있게 됐다”며 “거대한 승리”라고 밝혔다.
미국 온라인 매체 슬레이트는 “연방 대법원은 트럼프 대통령이 꿈꿔왔던 승리를 안겨주었다”고 평가했다.
미국 더 불워크는 “트럼프의 파시스트적 정권 장악을 막는 우리의 마지막 방어 수단 중 하나가 무력화됐다”고 짚었다.
‘이민자의 나라’ 미국에 드리운 ‘그림자’
미국에서 대법관은 판사를 의미하는 용어인 ‘judge’가 아닌 정의를 뜻하는 ‘justice’로 불린다.
미국 사회가 ‘사법의 최후 보루’인 연방 대법원에 기대하는 정의와 신뢰의 크기를 엿볼 수 있는 표현이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 대법원은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를 전면 부정하는 트럼프 대통령에 동조하는 판결을 내놓고 있다.
1960년대 시민권 운동과 1970년대의 여성 운동을 거쳐 발전해온 DEI는 누구나 인종·출신·성별 정체성에 따라 차별받지 않도록 한다.
17세기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인 미국을 오늘날까지 지탱해온 정체성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연방 대법원은 지난 7월 3일 미등록 이주민 8명을 연고도 없는 남수단으로 추방하는 결정을 내렸다.
남수단은 미국 국무부가 범죄, 납치, 무력 충돌을 이유로 여행 자제를 권고하고 있는 국가다.
앞서 매사추세츠 연방 지법은 “미등록 이주민을 제3국으로 추방할 때 고문당할 위험이 있다는 주장을 입증할 기회는 보장해야 한다”라며 트럼프의 행정명령에 제동을 걸었지만, 대법원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그 가운데 톰 호먼 백악관 국경 차르는 “추방된 남성 8명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른다”라고 말해 인도주의적 비판은 거세졌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추방자들의 변호를 담당하는 트리나 레알무토 변호사는 “추방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것은 공포심을 조장하고 그들의 가족을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빠뜨린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연방 대법원의 허용 결정으로 이제 트럼프 행정부는 더 광범위한 규모로 이런 일을 전개할 용기를 얻을 것”이라며 재판부를 비판했다.
‘그림자 심리’에 숨은 은밀한 함정
지난 6월 2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연방 대법원 앞을 한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게티이미지
트럼프 대통령과 연방 대법원의 동거 뒤에는 ‘그림자 심리’라고도 불리는 긴급 심리 제도의 함정이 숨어 있다.
그림자 심리는 윌리엄 보드 시카고대학 교수가 2015년 처음 사용한 용어다.
행정부의 긴급 심리 요청에 따라 진행되는 판결의 경우, 대법원의 서명도 없고 다수의견도 공개되지 않는다는 제도적 함정이 있다.
블라덱 텍사스대학 로스쿨 교수는 “어느 대법관이 투표했는지, 왜 투표했는지조차 알 수 없다”라며 “대중을 어둠 속에 남겨둔다”라고 그의 저서 <섀도 도켓>에서 지적했다.
블라덱 교수에 따르면 조지 W. 부시와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 도합 16년간 단 8번의 긴급 심리 요청이 있었던 반면, ‘트럼프 1기’ 시절에만 41번의 긴급 심리 요청이 있었다.
그는 “모호한 절차를 통해 미국 판례를 우경화시켰다”라고 제도를 비판했다.
최근 진행된 일련의 긴급 심리에 대해 폴 쉬프 버먼 조지 워싱턴대학 법학 교수는 미국 CBS 인터뷰에서 “대법원의 결정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피해의 균형이 반대로 향하고 있다는 점이 명백히 보였음에도 대법원은 여러 하급심 판결을 뒤집었다”며 “대법관들은 하급 법원들이 어떤 최종 판결을 내려야 하는지를 시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10월 재개되는 새 회기에서도 트럼프 행정부가 긴급 심리 요청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버먼 교수는 “대법원이 (트럼프 대통령의) 우회책을 단속하는 데 얼마나 적극적으로 나설지, 그리고 비상 상황 초기에 개입하려는 의지가 있는지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방 대법원은 지난달 공식 회기가 끝났음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긴급 심리건을 처리하고 있다.
지난 7월 8일과 14일 각각 연방 정부와 교육부의 인력을 대량 감축해도 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꿈꾸는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제국은 현재 진행형이다.
미 대법원 ‘그림자 심리’의 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