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넘은 친구가 올겨울에 결혼한다.
언스플래시 P가 연인과 결혼하기로 했다고 말했을 때, 씹던 타코를 뱉을 뻔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언제 결심했냐, 둘이 얘기한 거냐 물었고 P는 짧게 답했다.
“그런데 언제쯤 하려고?” 이 질문에 다다랐을 땐 말 없이 웃기만 했다.
상황이 짐작돼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설마 식장 잡았어?”라고…. 그는 올겨울 결혼한다.
P와 나는 10년이 넘은 친구다.
요즘은 결혼적령기랄 게 없다곤 하지만, 그래도 주변 친구들이 우르르 결혼하는 시기는 있다.
그 시기를 꾹 참고 지나가면 비혼도 별것 아니라는 ‘꿀팁’을 여러 언니에게 전해 들었다.
P는 나보다 세 살이 많아 이미 그 시기를 지난 듯 보였다.
P의 친구들은 ‘아기 낳고 잘살고 있’거나 ‘한 번 갔다 왔’거나 나처럼 ‘할 기미가 없’는 줄 알았다.
P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살면 되겠다고 생각하던 차다.
각종 비혼 관련 기사나 책에 등장하는 나이 지긋한 이들보다 더 많은 용기를 줬다.
그와 평생을 느슨하게 돌보며 사는 인생을 꿈꾸기도 했다.
오늘 약은 챙겨 먹었는지 묻고, 아프면 서로 병원으로 실어나르는 노인이 돼야지 생각했다.
내가 사는 망원동으로 이사 오라고도 만날 때마다 꼬시고 있었다.
P는 엄마가 “너는 결혼 생각 없냐” 물으면 “걔도 안 하잖아. 나중에 걔랑 서로 돌보면서 살 거야”란 핑계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어쩌면 연인의 직장 근처인 경기도 모처로 이사할, 그리고 내가 아닌 곧 남편이 될 연인과 그의 가족을 돌보게 될 운명에 놓였다.
아니, 그런 운명에 놓였다기보단 그 운명으로 제 발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나는 어리벙벙한 상태에서 그에게 축사든지 축가든지 사회든지 시켜달란 말을 남기고 헤어졌다.
그에게선 아직 별다른 연락이 없다.
그는 내 반응으로 보아 뭔가를 맡겼다간 그의 배우자를 향해 ‘니가 사는 그 집’(박진영) 같은 노래를 부를 걸 염려하는지도 모르겠다.
결혼 소식으로부터 한 달여가 지나 내 생일이 다가왔다.
가장 이른 선물을 보내온 건 P다.
내게 필요한 걸 묻곤 직접 골라 곧장 우리 집으로 부쳤다.
상자에 담긴 부츠를 꺼내 신어 보면서 P에 대해 생각했다.
P가 결혼을 하지 않을 거란 건 나 혼자만의 바람이지 실은 P가 그렇게 선언한 적은 없다.
P는 결혼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는 누구보다 주변 사람을 돌보고 살피는 일에 진심이니까. P는 평소엔 별 표정이 없지만 내가 부당한 일을 당하면 불같이 화를 낸다.
세상이 원래 그렇게 돌아가는 거라거나 혹은 상대방에게도 사정이 있을 거라고 설명하지 않고, 내 마음만 들여다봐주는 흔치 않은 사람이다.
내가 대수롭지 않은 척 말해도 그의 표정은 이미 일그러져 있다.
그 표정을 보면 내게 일어난 많은 비극이 정말 대수롭지 않아지곤 했다.
그는 나를 만나는 날이면 직접 만든 것, 요즘 꽂힌 것, 어제 먹은 맛있는 것을 주렁주렁 품에 안고 와 건네준다.
그의 마음이 흘러넘친다는 것을 진즉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런 마음을 나 혼자 독점하기보다는 그도 그런 마음에 보답받을 수 있는 상대방이 생긴 것을, 그리고 안정된 관계 안에서 매일의 보살핌과 환대를 받을 수 있게 된 일을 축하해주는 것이 마땅하다.
다가오는 여름, 나는 P가 선물한 부츠를 신고 첨벙첨벙 빗길을 걸으며 앞으로 나아갈 계획이다.
또 P의 연인에게 P의 뒤엔 내가 있다고 적당히 겁을 주면서 둘의 앞날을 축복해줄 계획이다.
너의 결혼식[꼬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