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사베이
유리병 속에서 쉼 없이 날갯짓하는 초파리, 라틴어 학명으로 Drosophila melanogaster, 이슬을 사랑하는 노란 곤충이라는 이름의 이 작은 생명체는 단순한 실험 대상이 아니라 현대 유전학의 탄생을 증언한 살아 있는 역사이자 수많은 노벨상 연구의 산실이다.
20세기 초, 토머스 헌트 모건이 뉴욕의 ‘플라이룸’에서 초파리와 함께 시작한 여정은 인류 생명과학의 지도를 완전히 다시 그렸다.
유전자가 염색체에 실려 있다는 사실, 성염색체 연관 유전, 돌연변이 메커니즘 등 혁명적 발견은 모두 초파리의 눈 색깔과 날개 모양 등을 통해 밝혀졌다.
인간중심주의의 당위와 모순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인지 구조에서 비롯되는 체계적 오류, 즉 인지적 편향 및 휴리스틱에서 자유롭지 않다.
과학자도 마찬가지다.
우주와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 연구한다는 거창한 꿈을 내세우는 과학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특히 현대 과학연구의 대부분은 어떻게든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그노벨상을 받는 연구들조차 연구계획서엔 그 연구가 인간사회에, 혹은 해당 국가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한 문구로 가득할 것이다.
인간중심주의적 편향은, 모건이 선택한 이 작은 곤충을 인간 질병 연구의 중심으로 몰아갔다.
초파리는 인간과 놀라울 정도로 많은 핵심 유전자와 신호 전달 경로를 공유한다.
암을 촉진하는 Ras, 신경계 발달의 핵심 Notch, 생체 리듬을 조절하는 period 유전자 등. 이들의 기능은 초파리에서 먼저 밝혀졌고, 그 연구는 곧바로 포유류 모델과 인간 질병 연구로 연결됐다.
파킨슨병, 알츠하이머, 암, 대사 질환 연구에서 초파리는 강력한 연구 플랫폼이자 유전자 편집 기술인 CRISPR의 효율성 검증 무대였다.
초파리는 분명 ‘성공한 모델 생물’이었다.
하지만 그 성공 뒤에는 냉혹한 현실이 있다.
초파리는 ‘곤충’이다.
그리고 21세기 생명과학의 주류에서 곤충이라는 단순한 사실이 초파리를 점점 주변으로 밀어내고 있다.
모델 생물의 왕좌는 이제 생쥐 Mus musculus에 넘어갔다.
포유류인 생쥐는 인간과 더 가깝고, 복잡한 생리 현상과 면역, 신경계 질환 연구에서 훨씬 직접적인 통찰을 준다.
신약 개발의 필수 관문도 생쥐다.
연구비 배분부터 학계의 인식까지 초파리는 ‘저렴하고 빠른’ 예비 모델로 전락했고, 심지어 과학연구의 메카 미국에서조차 처참한 위기에 처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초파리의 진정한 가치는 정말 ‘인간 질병 모델’에만 있는가? 하지만 이 질문조차 인간중심적 사고의 오만을 드러낸다.
작고한 고생물학자 굴드는 그의 책 <풀하우스>에서 이렇게 말했다.
“테이프를 돌려라. 그리고 멸종으로 리피디스티안(척색동물의 조상)을 지워보라. 그러면 우리의 육지는 곤충과 꽃들로 이루어진 무적의 왕국이 될 것이다.
”
지구 동물종의 3분의 2 이상은 곤충이다.
심지어 그중 4분의 1은 풍뎅이이며, 풍뎅이만으로도 전체 식물종의 숫자를 넘어선다.
약 3000만 종, 지구는 곤충 없이는 지속 불가능한 행성이며, 이 거대한 곤충 군집은 인류의 생존과도 직결된다.
농업의 핵심인 익충과 해충 연구는 식량 안보의 토대다.
꿀벌 없이는 우리가 먹는 작물의 3분의 1이 사라지고, 메뚜기 떼의 대발생은 대규모 기근을 일으킨다.
누에는 수천 년간 인류 의복 문화를 지탱해왔다.
이들의 생리, 행동, 환경 적응, 질병 저항성을 이해하는 것은 인류 미래의 필수 과제다.
인간중심주의가 만들어내는 문제는 분명하다.
우리는 이 중요한 곤충들을 유전학적으로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 질병과 특히 암과 치매에 대해서는 세세한 분자적 지식을 넘친 만큼 보유하고 있지만, 우리는 저 방대한 3000만 종이 넘는 곤충 대부분에 대해 무지하다.
따라서 우리에겐 꿀벌 집단 붕괴 원인, 메뚜기 대발생 조절, 해충 방제 전략 개발을 위한 기초 유전자 네트워크와 분자 생리학 지식이 부족하다.
현대과학의 맥락에서 지식의 부족은 연구비의 부족과 연결된 문제다.
새로운 모델 곤충 구축은 막대한 시간과 비용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다행히도 120년 넘게 쌓아온 엄청난 자산이 존재한다.
바로 초파리다.
초파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유전학적으로 깊고 넓게 연구된 곤충이다.
방대한 유전학 데이터베이스, 수만가지 돌연변이 계통, 세포 수준의 조작 기술, 축적된 노하우는 그 어떤 곤충도 따라올 수 없다.
초파리 유전체는 완벽히 해독됐고, 거의 모든 유전자의 기능이 밝혀지거나 연구 중이다.
발달생물학, 신경생물학, 면역학, 행동유전학, 노화생물학에 걸친 지식의 산맥은 압도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귀중한 자산을 ‘다른 곤충의 생리 이해를 위한 도구’로 제대로 활용하지 않았다.
초파리 연구는 대개 인간 생물학과 연결 짓거나 순수 기초과학 호기심 충족에 머물렀다.
초파리는 곤충 유전학의 ‘로제타 스톤’이 될 잠재력이 있음에도, 그 힘을 다른 곤충종 해독의 열쇠로 쓰는 데 소홀했다.
예를 들어 초파리의 Insulin/TOR, JAK/STAT 신호 전달 경로가 꿀벌 영양과 생식에 어떻게 관여하는지, 초파리 항바이러스 면역(RNAi 경로)과 메뚜기 바이러스 저항성의 유사점과 차이점, 초파리 후각 수용체·신경회로 연구가 해충 기주 탐색 차단에 어떻게 응용될 수 있는지에 관한 체계적 탐구는 매우 부족하다.
이제 우리는 생각을 전환해야 한다.
초파리의 재발견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거대한 곤충 생물학 세계를 탐험하는 강력한 등대가 돼야 한다.
해충의 재발견: 인간중심주의를 넘어
초파리의 재발견은 인간중심 패러다임을 넘어 생명의 거대한 연대기 속 곤충의 본질적 중요성을 인정할 때 가능하다.
에드윈 윌슨이 말한 ‘생명애(Biophilia)’는 모든 생명체에 대한 경외와 호기심을 뜻한다.
초파리는 단순히 인간 질병 연구 도구가 아니라 곤충이라는 경이로운 생명 군집의 대표자이자 그 복잡성을 탐구하는 가장 오래된 동반자다.
120년간 쌓인 데이터와 정교한 실험 기술은 이제 다른 곤충 세계로 향하는 문을 활짝 열 열쇠다.
농업을 위협하는 해충, 기후변화에 취약한 익충, 생태계 복잡한 그물망을 지탱하는 수많은 곤충종을 이해하고 보존하기 위해 우리는 다시금 유리병 속 작은 생명체에 주목해야 한다.
초파리는 곤충 유전학의 잠들었던 거인이다.
그 거인을 깨워 지구 생명체의 훨씬 더 광활하고 중요한 지도를 그릴 때다.
이것이 진정한 ‘초파리의 재발견’이며, 인간을 넘어선 생명과학의 새로운 지평일지 모른다.
초파리의 재발견…곤충 유전학의 잠들었던 거인을 깨우다[김우재의 플라이룸](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