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27일(현지시각) 튀르키예 남동부 도시 디야르바크르에서 젊은이들이 감옥에 갇힌 쿠르드노동자당 설립자 압둘라 외잘란의 사진을 들고 쿠르드계 정당인 인민평등민주당(DEM)이 외잘란의 옥중 메시지를 공개하는 모습을 생중계로 보기 위해 모여 있다.
AP 연합뉴스 슬라보이 지제크 |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 ·경희대 ES 교수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의 암흑 속에서 최근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소중한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5월12일 쿠르드노동자당(PKK)이 지도자 압둘라 외잘란의 옥중 지시에 따라 조직의 해산을 선언한 일이다.
쿠르드노동자당은 1978년 외잘란에 의해 수립된 뒤, 쿠르드족이 거주하는 튀르키예 남동부, 이라크 북부, 시리아 북동부, 이란 서부에 걸친 쿠르드족 지역에서 활동해 왔다.
초기에는 쿠르드족의 독립 국가 수립을 추구했지만, 1990년대 이후부터는 튀르키예 내 쿠르드족의 자치권과 정치 문화적 권리를 신장하는 방향으로 목표를 재정립했다.
외잘란은 20년 이상 수감 중이면서도 감옥에서 페미니즘과 철학을 접하며 쿠르드노동자당의 활동을 현대적 좌파 운동으로 변모시켰다.
이러한 변화는 튀르키예뿐 아니라 튀르키예 바깥의 쿠르드 공동체에도 영향을 미쳤다.
2022년 쿠르드 여성 마흐사 아미니가 히잡을 올바르게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구타당해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벌어진 이란 시위가 그 상징적인 사례다.
이 시위는 ‘여성, 생명, 자유’라는 구호 아래 성차별, 종교 근본주의, 정치적 탄압에 맞서는 다양한 투쟁을 유기적으로 결합시켰다.
여성 해방의 투쟁이 곧 모든 이의 해방이라는 인식을 남성들도 공유했고, 쿠르드족에 대한 억압이 바로 모두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사실을 민족과 관계없이 모두가 이해했다.
그들은 서구 좌파가 꿈꾸기만 하던 것을 실현했다.
서구적 편견으로 본다면 이런 일이 쿠르드족 지역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 놀랍게 여겨질 것이다.
쿠르드족은 여전히 부족 전쟁, 미신, 잔혹한 분쟁의 이미지로 얼룩진 야만적 타자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쿠르드 사회의 실제 모습은 이런 고정관념과는 크게 대조된다.
그들은 현대적이고 종교적 근본주의와 거리를 두며 세속주의를 추구한다.
여성 인권에서도 선진적이다.
그동안 쿠르드족은 주변 국가의 지정학적 이해관계에 따라 끊임없는 고통을 받았다.
사담 후세인 시절에는 이라크가 쿠르드족을 상대로 대규모 폭격과 독가스 학살을 자행했다.
몇년 전에는 튀르키예가 테러 단체 격퇴를 핑계로 쿠르드 지역을 침공했고, 도널드 트럼프는 그동안 이슬람국가(ISIS)와의 전투에서 미국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쿠르드족을 배신하고 튀르키예의 침공을 묵인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쿠르드족은 뛰어난 조직력과 공동체 운영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이라크 북부 자치 지역을 정비된 제도를 갖춘, 이라크 내 유일하게 안전한 지역으로 발전시켰고, 시리아 북부 로자바 자치 지역에서도 유토피아에 가까운 사회를 구축했다.
일부 좌파는 쿠르드족이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는 이유로 이들을 비판하지만 강대국들 틈바구니에 끼여 옴짝달싹할 수 없는 이들에게 반제국주의의 원칙을 위해 자신들을 희생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쿠르드족의 저항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서구 강대국이 쿠르드족과 벌이는 더러운 정치 게임을 규탄하는 것이다.
주변 국가들이 새로운 야만 상태로 빠져드는 속에서도 쿠르드족은 유일하게 희망을 발산하고 있다.
그들의 투쟁은 쿠르드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으로, 어떤 새로운 세계 질서가 등장하고 있는가에 관한 문제다.
만약 쿠르드족이 외면당한다면 그것은 해방의 유산 가운데 가장 소중한 부분이 설 자리를 잃은 질서가 도래함을 의미할 것이다.
외잘란이 쿠르드노동자당의 자진 해산을 끌어낸 것은 평화를 위한 투쟁을 실천한, 진정으로 용기 있는 행동이다.
이 점에서 그를 쿠르드족의 넬슨 만델라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쿠르드노동자당의 자진 해산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전적으로 튀르키예 정부에 달렸지만, 그들이 진정성 있는 응답을 할지는 미지수다.
튀르키예 정부에 대한 국제사회의 강력한 압력이 절실한 시점이다.
이 압력을 만들어내는 일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번역 김박수연
‘쿠르드’ 외잘란은 우리 시대의 만델라다 [세계의 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