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하이브리드전은 국가 또는 이에 준하는 행위자가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군사적 수단에 다양한 비군사적 수단을 결합하는 복합적인 전쟁 수행 방식으로 정의된다.
21세기에 정의되어 새롭게 등장한 개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오랜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온 전쟁 양상이자 전략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전쟁인 2차 대전의 시작 역시 하이브리드전을 통해 이뤄진 독일의 팽창에서 비롯되었다.
1936년 3월, 히틀러는 국제 조약을 정면으로 위반하고 비무장 중립지대였던 라인란트에 군대를 전격 진주시켰다.
당시 투입된 병력은 단 두 개 대대 수준에 불과했고 프랑스군이 개입할 경우 즉각 철수하라는 명령까지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1차 대전의 참상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던 양국은 히틀러의 도발에 강경히 맞서기보다 유화정책을 선택했다.
히틀러는 이러한 심리를 정확히 꿰뚫었고 자신은 단지 독일 영토 내에서 주권을 회복하려 할 뿐이며 유럽의 평화를 원한다고 주장했다.
2년 뒤인 1938년 3월, 독일은 총 한 발 쏘지 않고 오스트리아를 병합했다.
오스트리아 내부의 나치당은 선전과 정치공작으로 정국을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이를 계기로 히틀러는 총리 슈슈니크에게 나치 인사를 내각에 포함시키고 독일과의 통합을 요구했다.
슈슈니크는 이를 막으려 했지만 군사적 압박을 동반한 히틀러의 강요에 결국 사임했다.
새로 임명된 친나치 성향 총리의 형식적 요청에 따라 독일군은 질서 유지를 위한 평화적 진입을 명분으로 오스트리아에 들어섰다.
히틀러는 빈에서 환영 인파 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이어진 국민투표에서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병합이 정당화되었다.
같은 해 9월 말,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인 거주 지역인 수데테란트의 할양을 요구하면서 열린 뮌헨 회담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또다시 히틀러의 요구를 수용했다.
영국 총리 체임벌린은 귀국 후 “우리 시대의 평화”를 선언했지만, 불과 반년 뒤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 전체를 장악했다.
히틀러는 전통적인 의미의 전쟁을 피하면서도 서방의 전쟁 회피 심리와 유화적 태도를 철저히 역이용했다.
그는 정치 선동, 내부 조작, 심리전, 선전, 그리고 제한적 무력시위를 정교하게 결합한 하이브리드전으로 목표를 달성했다.
독일의 팽창은 1년 뒤 폴란드 침공으로 이어졌고,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히틀러가 활용한 강력한 무기는 총칼이 아니라 상대국 내부의 혼란과 우유부단함이었다.
독일의 팽창을 막지 못한 서방의 실패는 상대의 군사력만이 아닌 다방면의 의도를 꿰뚫고 적확하게 대응해야 함을 시사한다.
막연히 외치는 평화는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심호섭 육군사관학교 교수·군사사학과
[심호섭의전쟁이야기] 하이브리드전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