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홍 기사심사부장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
” 맞는 말이다.
아니 틀렸다.
항간에 이 말을 떠들썩하게 한 대통령 집무실이 용산에서 다시 청와대로 돌아갈 모양이다.
공개는 이달 말 끝난다.
사람은 공간에 살고, 공간을 짓는다.
영화 ‘기생충’은 공간의 층위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반지하방’과 잔디마당이 드넓은 ‘2층 저택’. 반지하방은 냄새와 색으로 계급을 드러낸다.
퀴퀴한 어둠 같은. 저택은 푸른 정원 위에 빛나는 아우라, 그 자체다.
반지하방 가족은 한낮 푸른 정원에서 한밤의 자의식 과잉으로 파멸했다.
공간은 의식의 2층이 아니었다.
왕조 시대 이름 '청와대' 모든 서사는 시간의 두루마리를 켜켜이 두르고 있다.
청와대(靑瓦臺)도 그렇다.
경무대(景武臺)가 모태로, 경복궁의 후원으로 출발했다.
이곳에 일제가 1939년 총독 관저를 지었다.
이게 옛 청와대 본관이다.
광복 후 이승만 전 대통령이 ‘경무대’로 이름을 새로 붙였고, 윤보선이 ‘청와대’로 개명했다.
이 건물은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광화문 총독부 건물과 함께 철거했다.
지금 청와대는 노태우 시절 지은 것이다.
경복궁 근정전을 빼닮았다.
왕조 시대의 근엄이 추녀 끝에 서려 있다.
청와대는 공간을 지칭하지만 조직과 권력을 뜻하기도 했다.
환유(換喩)로, 백악관(白堊館)이 건물 이름이고 미국 정부를 상징하는 것과 같다.
‘백악관’은 음성적으로 청와대보다 더 권위적이다.
종성에 파열음이 이어져 거칠고 근엄하게 느껴진다.
영어 ‘White House’와 사뭇 다르다.
청와대에 씌워진 권력 언어가 백악관에도 얹혔다.
번역자는 ‘하얀집’은 평민스럽다고 생각한 듯하다.
왕조 시대의 언어가 새로 지은 건물에까지 쓰인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경무대로 이름을 바꾼 총독 관저는 신식 건물이었다.
비록 일본 옛 총리 관저를 빼다 박고, 기와도 푸른색으로 같았지만 문화주택이었다.
하지만 그 주인들은 봉건과 제왕 의식을 탈피하지 못했다.
‘국부(國父)’에 흐뭇해했고, ‘각하’에 미소 지었다.
건물은 고쳐 썼으나 이름은 전통으로 회귀했다.
청와대는 단지 ‘분칠’한 것에 불과했다.
보통명사 '대통령실' 바람직 문제는 역시 사람이다.
공간은 마음에 안 들면 고치고 바꿔 쓰면 그만이다.
이름도 그렇다.
의식이 공간을 지배하고, 언어가 의식을 통제한다.
공간은 죄가 없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 했다.
대통령실을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옮기자 구중궁궐 같다는 왕조 시대 이미지는 사라졌다.
게다가 이름까지 ‘대통령실’로 바꿔 보통명사화했다.
그런데 다시 청와대로 돌아가야 할까. 공자가 “잘못을 고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잘못”(논어)이라고 했지만 과연 용산을 떠나 세종로로 가는 것이 잘못을 바로잡는 일인지는 생각해봐야 한다.
꼭 가야 한다고 해도 서두를 일은 아니다.
소통 불편과 협소한 사무 공간, 기능적이지 않은 관저 등 문제가 여전하고, 세종시 이전도 걸려 있다.
마침 청와대가 비어 있다.
시간도 있다.
재건축을 하든 증·개축을 하든 제대로 고쳐 쓸 절호의 기회다.
청와대로 이사 간다고 해도 이름만은 돌아갈 일이 아니다.
‘세종로 대통령실’로 충분하다.
권위의 상징이었던 만큼 보통명사 이름을 계속 쓰는 것이 마땅하다.
[데스크 칼럼] 공간이 아니라 사람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