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바이오 무죄로 본 제도 허점
사후 제재보다 예방에 중점 둬야
안태준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지난 10여 년간 법학과 행정학 분야에서 유행처럼 번진 용어가 하나 있다.
바로 ‘원칙 중심 규제’다.
기존 ‘규정 중심 규제’는 구체적인 상황별로 세분화한 요건과 절차를 명시하고, 이를 위반하면 제재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기술과 산업의 변화 속도가 빨라지면서 세부 규정으로 일일이 통제하는 기존 방식이 비효율적이라는 인식이 확산했다.
이에 회계, 금융 등 다양한 분야에서 원칙 중심 규제 도입의 필요성이 강조됐고, 회계 분야에서는 2007년 원칙 중심 회계기준으로의 전환을 선언했다.
이후 불과 4년 만인 2011년 국제회계기준(IFRS)을 채택하며 본격적인 도입이 이뤄졌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규정 중심 규제 문화에 익숙한 규제당국과 사법당국은 하나의 정답을 전제로, 이를 위반하면 곧바로 제재하는 관행을 규제의 본질로 인식해 왔다.
회계 분야에서도 기존 규정 중심 체제에서는 세부 규정이 정한 특정 회계처리 방식을 따르지 않으면 곧바로 제재가 뒤따랐다.
반면 원칙 중심 회계기준은 하나의 정답을 전제하지 않는다.
회계처리의 기본 원칙만을 제시하고, 회계 담당자가 전문가적 판단에 따라 기업의 경제적 실질을 가장 잘 반영할 수 있는 방식을 선택하도록 한다.
이런 변화를 이해하지 못한 감독기관이나 수사기관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하나의 정답만을 기준 삼아 기업의 회계처리를 일일이 검증하려 들 경우, 다양한 부작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는 ‘원칙 중심 회계기준’과 ‘규정 중심 법률문화’의 충돌에서 비롯된 위험이며, 이런 위험이 현실화한 대표적 사례가 지난주 대법원의 무죄 확정 판결로 종결된 삼성바이오로직스 사건이다.
일부 언론과 단체는 이 사건을 ‘회계 부정’ ‘회계 사기’로 규정하며, 마치 중대한 비리와 부패가 얽힌 사건인 것처럼 포장했다.
그러나 판결문에 따르면 삼성 측은 참고할 선례조차 없는 상황에서 난해한 회계 이슈를 해결하기 위해 감독기관에 문의하고, 국내 최고 수준 회계 및 법률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고심 끝에 회계처리 방식을 선택했다.
다수의 회계학 교수와 공인회계사 역시 해당 회계처리가 회계기준 위반이 아니라는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회계 담당자가 최종 선택에 이르기까지 감독기관과 회계 전문가의 자문을 구하는 절차를 거쳤고, 그 결론의 이유와 근거가 전체적으로 보아 불합리하지 않다면 해당 회계처리 결과는 존중하는 것이 타당하다.
사후에 드러난 정보를 바탕으로 ‘다른 회계처리 방식이 더 적절했을 것’이라는 식으로 문제를 삼기 시작하면 원칙 중심 회계기준은 결코 제대로 정착할 수 없다.
최근 삼성생명의 삼성화재 지분 회계처리를 둘러싼 논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쟁점은 삼성생명이 삼성화재에 ‘유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지에 대한 견해 차이다.
그러나 회계기준의 문구 해석을 두고 사후에 의견이 엇갈린다고 해서 기업과 담당 임원을 제재하려는 것은 삼성바이오로직스 사건에서 감독기관이 저지른 과오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원칙 중심 회계기준을 도입한 이상, 이를 적용하고 집행하는 규제 환경 역시 획기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원칙 중심 회계기준을 운용하는 해외 주요 국가의 회계감독 시스템은 사후 제재보다 사전 예방에 초점을 맞추고, 기업과 감독당국, 전문가 간의 대화와 토론을 통해 올바른 회계처리를 유도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우리 역시 그동안 지나치게 처벌과 제재에만 몰두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할 시점이다.
[시론] 회계감독도 기업 자율성 존중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