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 초 성급한 산업·노동 정책이
종종 의도와 다른 부작용 낳아
약자 챙기려다 다른 약자에 고통
노란봉투법, 중기 생존 위협
알바 실업급여는 자영업에 타격
도입 여부 신중히 재검토해야
고경봉 편집국 부국장
중대재해처벌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 것은 2010년대 중후반쯤 철강사와 발전사 등에서 인명사고가 반복되면서다.
특히 2018년 한국서부발전 화력발전소에서 도급 업체 직원인 김용균 씨가 작업 중 숨진 게 도화선이 됐다.
정치권과 노동계, 시민단체들은 대기업과 중견기업들이 산업 재해의 진앙이라고 봤다.
“이들 기업이 비용을 아끼려고 ‘위험을 외주화’하면서 인재형 참사가 이어지고, 그 뒤엔 이전 정부의 재벌에 대한 특혜성 규제 완화가 배경이 됐다”는 논리다.
하지만 법 시행 후 결과는 그런 주장과 달랐다.
올해 초까지 지난 3년여간 600여 건의 주요 사고 가운데 31건이 기소되고, 이 중 29건이 유죄 선고를 받았는데 대기업은 한 곳도 없었다.
처벌받은 곳의 87%가 중소기업이었고 중견기업은 13%에 그쳤다.
안전사고가 줄어든 것도 아니었다.
‘재벌’을 겨냥한다며 시행한 법은 그렇게 중소기업들을 위축시키는 결과만 낳았다.
근로자나 소액주주 등의 권익을 위해 기업의 경영 활동을 규제하는 법안은 종종 약자를 배려한다는 취지가 무색하게 또 다른 약자를 짓누른다.
대기업의 행태를 바꿔 재계 전체의 변화를 끌어내겠다는 의도와 달리 기업 생태계의 제일 밑단에 있는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을 무너뜨리는 식이다.
지금 정부가 밀어붙이는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개정안), 고용보험법 개정안, 상법 개정안 등 일련의 산업 노동 관련 법안을 보면 비슷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
노란봉투법은 회사가 노조 파업으로 피해를 보더라도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법안엔 대기업 근로자 중심의 대형 산별 노조를 지원하려는 속내가 담겨 있다.
대기업은 파업 피해 규모가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에 손해배상을 허용하면 노조 활동이 더 위축된다는 논리다.
이 법이 만들어진 배경도 2014년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에게 회사 측이 수십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한 데서 비롯됐다.
하지만 현장에서 이 법이 시행되면 정작 큰 충격을 받는 곳은 중소기업일 것이다.
자금력과 법률 대응 능력이 취약한 영세 중소기업들은 손해배상 청구 카드마저 없으면 노조의 완력 행사에 더 휘둘리고, 자칫 파업 한 번에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
하청 기업 근로자들이 원청 기업을 대상으로 단체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해주는 조항도 중소기업 입장에선 매우 곤혹스럽다.
언뜻 보면 중소기업 소속 근로자나 특수고용직 근로자들이 원청 대기업과 직접 교섭할 수 있으니 중소기업 경영자의 부담이 줄어들 것으로 생각된다.
중소기업 근로자들이 대기업 못지않은 복지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기대도 갖게 한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선 대기업들이 강성 노조가 있는 중소기업과의 거래를 기피할 가능성이 크다.
중소기업들로선 기껏 기술력을 키웠는데 ‘노조가 세다’는 이유 때문에 판로가 막히게 되는 셈이다.
고용보험법 개정안도 걱정이 앞선다.
이 법은 주당 근무시간이 15시간 미만인 초단시간 근로자와 아르바이트생도 고용보험에 가입해 실업급여와 육아휴직 급여, 출산 휴가 급여 등을 받게 해준다는 내용이다.
문제는 초단기 근로자 대부분이 주로 중소기업이나 영세 자영업 사업장에서 근무한다는 점이다.
법이 통과되면 사업주는 근로자와 함께 보험료를 절반씩 부담해야 한다.
안 그래도 자영업자 폐업이 많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이들의 어려움이 가중될 게 불 보듯 뻔하다.
과도한 의욕으로 서둘러 정책을 추진했다가 사회적 약자를 괴롭히게 되는 이런 사례들은 주로 정권 초기에 집중된다.
문재인 정부가 집권하자마자 최저임금을 가파르게 올리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시도했다가 자영업자 부담을 늘리고 고용 대란을 야기한 게 그랬다.
다른 정부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정부가 바뀌었으니 당장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초조함에 노동계나 시민단체 등이 들이미는 대선 청구서까지 겹치면서 서두르게 된다.
안 그래도 민주노총은 최근 노란봉투법 입법을 요구하며 총파업에 나서는 등 벌써 정부와 정치권을 압박하고 있다.
정부가 성급함에 쫓겨 불황에 고전하는 이들에게 또 다른 짐을 지우진 않을지 우려스럽다.
[다산칼럼] 약자를 짓누르는 법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