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학관과문화 대표, 공학박사  권기균
2024년 파리올림픽 여자단식과 혼합복식 탁구경기. 생방송으로 중계되던 경기 중 잠시 쉬는 사이에 신유빈 선수의 간식이 눈길을 끌었다.
그것은 바나나였다.
누리꾼들은 "역시 바나나는 에너지 과일"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사실 바나나는 운동선수들에게 최고의 간식 중 하나다.
당분과 탄수화물은 빠른 에너지 공급을 돕고 칼륨은 근육의 경련을 막아준다.
그런데 이 평범해 보이는 과일 하나에 놀라운 과학 이야기가 숨어 있다.
우선 우리가 먹는 것은 모두 '씨가 없는' 바나나다.
열매 안에 씨앗이 없다는 건 자연상태에선 자손을 퍼뜨릴 수 없다는 뜻이다.
전 세계 바나나 소비량은 1억톤, 전 세계 인구가 1인당 연간 12.7㎏, 한국인은 1인당 연간 약 6.4㎏의 바나나를 소비한다.
그런데 이 많은 양의 공급이 어떻게 가능한 걸까. 야생 바나나의 기원은 수천 년 전이다.
바나나의 야생 조상식물들의 원산지는 동남아시아 일대였다.
그러나 초기 바나나 품종인 야생 바나나는 씨가 크고 딱딱해 먹기에 불편했다.
그러다 '무사 아쿠미나타'(Musa acuminata)와 '무사 발비시아나'(Musa balbisiana)라는 두 야생종이 자연교잡되면서 오늘날 우리가 먹는 바나나의 조상이 탄생했다.
맛도 훨씬 달고 부드러웠다.
놀랍게도 이 새로운 품종은 씨가 거의 없는 '무사 파라디시아카'(Musa paradisiaca)였다.
유전학적으로 이 바나나는 '3배체'(triploid)다.
일반적인 생물은 두 쌍의 염색체(2n)를 가진다.
하지만 3배체(3n) 바나나는 염색체가 세 쌍이어서 감수분열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씨앗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번식할까. 씨 대신 줄기에서 돋는 새순으로 번식(영양번식)한다.
오늘날 전 세계 수출용 바나나의 99% 이상은 캐번디시(Cavendish) 품종이다.
캐번디시는 3배체라서 씨가 없다.
그래서 인간이 줄기를 복제·번식시킨 대표 사례다.
놀라운 건 여기서 끝이 아니다.
스미스소니언 자연사박물관 1층 '인류의 기원' 전시실에는 매우 특이한 내용의 전시패널이 하나 있다.
바로 인간의 DNA와 다른 생명체의 DNA가 얼마나 닮았는지를 보여주는 패널이다.
DNA 분석을 통해 과학자들은 사람이 다른 동물들과 유전자가 얼마나 같은지를 밝혀냈다.
사람과 침팬지의 DNA는 98.8%가 같다.
사람과 고릴라는 98.4%, 사람과 오랑우탄은 96.9%, 사람과 붉은털원숭이는 93%의 DNA가 같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사람과 쥐의 DNA는 85%, 사람과 닭은 75%, 그리고 엉뚱하게도 사람과 바나나는 60%의 DNA를 공유한다.
바나나처럼 전혀 다른 생물도 그 유전자는 인간과 이어져 있다.
생명은 결국 같은 유전자 코드를 공유하는 셈이다.
씨 없는 과일로는 수박도 비슷하다.
씨 없는 수박은 2배체 수박과 4배체 수박을 교배해 만든 3배체 수박이다.
이것도 감수분열이 일어나지 않아 씨가 없지만 씨 없는 수박을 만들기 위해선 여전히 씨 있는 수박이 필요하다.
즉 씨 없는 수박의 씨를 만들기 위해선 씨 있는 부모가 꼭 필요한 '유전자 조합의 퍼즐'이다.
포도는 수정 후 배가 형성되지 않는 '무종자성' 유전형질을 활용하거나 호르몬 처리로 씨를 없앤다.
이처럼 바나나, 수박, 포도는 모두 먹기 좋게 개량된 '씨 없는 과일'이지만 씨가 없는 이유와 유전학적 원리는 다르다.
공통점은 하나, 자연상태에선 자손을 남기기 어렵기 때문에 사람의 손이 반드시 개입해야 한다는 점이다.
유전학적으로 보면 이들은 모두 번식력보다 '먹기 편한 모양과 맛'이라는 인간의 선택을 거쳐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다.
하지만 편리함에는 대가가 따른다.
전 세계 바나나의 99%를 차지하는 캐번디시는 모두 유전적으로 동일해 단 하나의 병원균에도 취약하다.
실제로 곰팡이성 병인 파나마병(TR4)은 바나나 멸종 위기를 불러온다.
씨 없는 과일은 과학의 선물이지만 생물 다양성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교훈이기도 하다.
스미스소니언 자연사박물관 인류의 기원 전시실에 전시된 인간과 다른 동식물들과의 유전자 비교 패널. "우리는 다른 생물들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
[청계광장]바나나와 씨 없는 과일의 과학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