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노동기] 싱어송라이터로 살아남긴 했으나…
소속된 직장 없이, 월급 같은 정기적인 수입 없이, 누군가 직업을 물으면 “프리랜서”라고 대답하고 지낸 지 10년을 훌쩍 넘겼다.
본업(?)인 예산 메이트커피마켓 공연 모습. (이내 제공)
소속된 직장 없이, 월급 같은 정기적인 수입 없이, 누군가 직업을 물으면 “프리랜서”라고 대답하고 지낸 지 10년을 훌쩍 넘겼다.
싱어송라이터로서 그동안 앨범을 발매하거나 책을 출간하거나 크고 작은 무대에 계속 서긴 했지만, ‘노동’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간 내가 어떻게 돈을 벌고 먹고 살아왔는지 돌아보면 몽땅 기적 같다.
살아남긴 했지만, 미래를 위한 준비는 염두에 두지 않았던 나. 아마도 나 하나만 돌보면 되는 1인 가구라는 특성도 작용했을 것이다.
지난 윤석열 정부 3년과 그사이 내란 6개월은 코로나 시기보다도 일감이 줄었다.
스마트폰에 알바몬 앱을 깔고 ‘지원하기’를 수없이 눌러 보았지만, 새로 만난 세상에서 나는 어디서도 받아주지 않는 경력단절 40대 여성이었다.
‘노동’ 경험 없는 나를 찾아주는 곳은 보험 영업직과 쿠팡 일용직뿐이었다.
정작 나는 가입한 보험도 없고 쿠팡도 이용하지 않는데…. 같이 보험 영업하자는 전화가 하도 많이 와서 찬찬히 들어보니 다단계와 다름없어 보였다.
알바몬 전화번호를 비공개로 전환했다.
그리고 쿠팡에서 프레시백을 세척하는 파트에서 주 2~3일 일한 지 3개월쯤 지났다.
강의 노동, 공연 노동을 돈으로 환산해볼까
경기도 의왕의 한 중학교에서 시 수업을 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부산에 살고 있다.
) 언젠가 내가 참여하는 행사를 본 적 있는 이웃 중학교의 사서 선생님에게 추천을 받았다고 한다.
몇 년 전, 의왕의 한 독립 서점에서 공연할 때 관객이었던 사서 선생님이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에서 행사를 기획해 다시 나를 불러준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다른 학교 교사에게 나를 추천해 주었나 보다.
그렇게 작은 인연들이 연결되어, 연고 하나 없는 의왕에 기타 하나 달랑 메고 일 년에 한두 번꼴로 들르고 있다.
나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스스로 ‘동네 가수’라 부르며) 10년 넘게 전국을 돌아다녔다.
작은 가게와 책방과 도서관, 지역 기반의 작은 행사들이 대부분이지만, 평생 몰랐을 수도 있는 이름의 초중고 학교들도 끼어 있다.
한 고등학교에서 진행한 북토크 겸 공연 사진. 학생들이 직접 행사 포스터를 디자인해주었다.
(이내 제공)
학교에 초대받으면 보통은 노래, 책, 이야기 등을 섞어 공연인지 강연인지 수업인지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카테고리를 오가며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다.
이번에는 학교의 담당 선생님이 ‘시’라는 주제를 제안해서, 일본의 전통 시 ‘하이쿠’를 써 보는 시간을 추가했다.
내가 다룰 수 있는 시는 노랫말이고, 5-7-5음절이 정해진 하이쿠가 작사의 방식과 비슷한 면이 있어서다.
노랫말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어서 노래를 부르고, 준비해 간 시를 아이들의 목소리로 읽게 해 함께 나누고, 각자 손으로 쓴 하이쿠를 발표한다.
그간 독립 출판으로 익숙해진 미니진(zine) 형태로 교재를 미리 준비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교실에서 보내는 한 두 시간 속에는 ‘길 위의 동네 가수’로 보낸 내 지난 시간의 노하우가 들어있다.
강의 노동을 돈으로 환산할 때 보통 시간과 경력, 전문성을 기준으로 삼는다.
공공기관에서 정한 등급에 따라 시간당 수당이 정해져 있다.
등급의 기준은 학위나 자격증처럼 제시할 수 있는 자료를 근거로 나눈다.
노하우는 있지만 자격증은 없는 내 등급은 지자체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시간당 10만 원쯤인 듯하다.
교통비나 식비, 숙박비는 제공되지 않는다.
의왕으로 출발하기 전후의 시간을 떠올려 본다.
목요일과 금요일은 저녁 5시부터 1시간 연장 근무를 포함해 자정까지 쿠팡에서 일했다.
토요일 밤에는 동네 카페 ‘코스모스달’에서 공연했고, 일요일 아침에는 일본어 자격증 시험을 쳤다.
월요일과 수요일 저녁에는 매주 ‘재능 기부’로 참여하는 일본어 수업을 진행했고, 그 사이 화요일은 4시간 동안 친구가 운영하는 비건 레스토랑에서 일했다.
(주 1회, 4시간 근무)
그사이 틈틈이 발간을 준비 중인 산문집의 원고를 출판사와 주고받으며 교정 업무를 보았고, 일본어 시험을 위해 공부했고, 의왕에 가져갈 미니진 교재를 수제로 50권 만들었다.
목요일 저녁에 경기도로 이동해 근처 숙소에서 하루 자고, 금요일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중학교 학생들과 시 수업을 무사히 마쳤다.
부산에 돌아와, 다시 일본어 수업과 레스토랑 알바 일정을 반복하면서 수요일 낮에는 부산의 한 고등학교에서 북토크(일본 여행기를 담은 『작은 순간들의 운명』이 8월 출간 예정이다) 겸 공연을 했다.
목금토일 일하기로 신청해 둔 쿠팡 일은 그날 처리해야 할 물량에 따라 당일 몇 시간 전에 출근이 결정되기에, 아직은 모른다.
쿠팡에서 프레시백을 세척하는 일을 시작한 지 3개월쯤 됐다.
이제 길에서 프레시백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이내 제공)
너무나 산발적인 내 노동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게 조금 어지럽다.
어느 날은 먼 도시의 중학교에서 아이들과 하이쿠를 짓다가, 또 다른 날은 고등학교에서 북토크를 한다.
여름밤의 꿈 같은 공연을 한 다음 날, 미래의 나를 위해 일본어 시험을 치고, 땀과 얼룩에 특화된 옷을 갈아입은 채 쿠팡으로 향한다.
주 단위로 반복되는 몇 안 되는 일정 속에 일회성의 행사가 끼어드는 식이라, 바쁠 때는 정신이 없고 한가할 때는 시간이 남아돈다.
코로나 시기에 남는 시간을 활용해 시작한 일본어가 지금은 내 미래의 노동 후보가 되어, 돈 안 받고 가르치는 일본어 수업에서 큰 재미와 보람을 느낀다.
인생 수강료를 땀으로 치르는 쿠팡 노동
쿠팡 프레시백을 세척하는 6시간 노동, 땀이 눈으로 줄줄 흘러 들어가서 손수건을 이마에 감고 일한다.
이렇게 힘든 일을 누군가는 매일 하며 살아간다고? 첫날의 충격을 안고 과연 적응할 수 있을까 실험하는 마음으로 계속해 보았는데, 인간의 적응력이 놀랍다.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시원한 물에 샤워를 하고 노곤한 몸의 구석구석을 느낀다.
일주일에 5~6일씩 일하는 청년 누구는 15kg, 누구는 8kg 살이 빠졌다고 했다.
여름에는 생수를 제공해 주어서 6월 말부터 물을 챙겨가지 않아도 된다.
사람 손가락이 이렇게까지 아플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중년의 여성 선배로부터 팁을 전수받아 장갑을 3개 끼고 일한다.
기타를 쳐야 하는 손을 최대한 보호하기 위해서. 처음 일하러 온 사람에게 친절한 동료는 없다.
철저하게 컨베이어 벨트 위 부품으로 취급받는다.
어리버리하고 있으면 흐름을 막는 방해꾼이 된다.
모두가 모두에게 명령하는 신세계에서, 아무튼 방해되지 않으려고 눈치를 보고 뛰어다녔더니 고정 제안을 받았다.
한 달 동안은 모두의 욕받이가 된 기분이었다.
체력도 요령도 좋은 20대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조금씩 각자의 사정을 알아가는 것도 재미가 있다.
멤버로 받아들여진 이후에도 배워야 할 것들이 많았다.
특히 120개 적재한 프레시백을 랩으로 단단하게 고정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
정말 친절하게 방법을 알려주는 한 동료가 천사로 보이는 날도 있었다.
전쟁 같은 6시간, 끝나고 뭔가 좀 평화로웠다 싶으면 힘든 일을 일부러 도맡아 하는 동료가 같은 조에 있던 날이다.
평화는 누군가의 희생에서 오는 것이구나, 퇴근길에 달 보며 생각했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그만둔다는 청년에게 작별 인사하러, 두 명의 동료가 자기들이 일하는 날이 아닌데도 일부러 들렀다.
장마의 시작을 뚫고 부산 서쪽 외진 부두 동네의 커다랗게 덩그런한 건물까지 달콤한 쿠키가 담긴 상자를 들고 왔다.
예쁘게 차려입은 모습이 일할 때와는 사뭇 다르다.
최대한 노동을 뽑아내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도 사람은 온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초청 받은 중학교에서 수업을 마친 후, 학생들이 적어준 감상 메모들. (이내 제공)
시급이 높은 노동, 낮은 노동, 자랑스러운 노동, 즐거운 노동…
목포 사는 친구랑 전화로 오랜만에 사는 이야기 나누면서 맥주를 마셨다.
싱어송라이터인 나는 쿠팡 일을, 만화가인 친구는 야쿠르트 배달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온갖 실수와 위축된 마음을 고개 끄덕이면서 서로 말하고 듣는다.
우리는 여러 가지 자아를 가진 사람들, 누구나 그렇듯이. 쿠팡에서의 나는 느린 작업 속도로 동료를 짜증 나게 할 때도 있고, 도와주고 싶은 연민을 느끼게도 하는 신규 중년 여성이다.
모두가 컵라면을 먹을 때 직접 싸 온 도시락을 묵묵히 꺼내 먹는 별종이기도 하고, 말 수가 거의 없다가 일본어 얘기만 나오면 잘난 척하는 의뭉스러운 캐릭터이기도 하다.
출간을 앞둔 책에 대해 편집자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과연 내 글이 읽을만한 것인지 안절부절못하기도, 자꾸 늦어지는 출간 스케줄에 대한 불안으로 의도치 않게 출판사를 추궁하기도 하는 불안한 작가다.
일본어 수업에서는 더 많이 알려주고 싶어 과욕을 부리다가 후회하기도 하고, 잘 가르쳐주어 고맙다는 인사에 얼굴이 붉어져 버리기도 한다.
일본어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으로서는 공부를 자꾸 내일로 미루는 게으름뱅이고, 식당 서빙할 때는 직원을 하대하는 손님에게 마음속으로 심한 욕을 하는 서비스 정신 부족한 알바생이며, 맛있게 먹고 친절하게 인사하는 손님에게는 축복을 퍼부으며 진심 어린 웃음을 짓기도 한다.
일본어를 가르친다.
돈을 받는 대신, 기초 레벨의 수업을 하면 내 수준에 맞는 수업 하나를 들을 수 있는 ‘물물교환’ 시스템. 의외로 가르치는 게 잘 맞고 즐거워서 매주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선다.
얼굴이 말간 20대 청년들만 있던 우리 반에 갑자기 중년의 여성 두 사람과 중년의 남성 한 사람이 신규로 들어왔다.
언어 공부에는 늘 이야기가 들어있다.
언어는 도구일 뿐 결국 자기 이야기를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대화의 재료가 다채로워지는 게 기뻐서 돌아오는 길에 얼굴이 상기된다.
낯선 세계의 이야기들이 마주치면 서로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시간의 씨실과 날실이 얽혔다가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순간을 좋아한다.
귀를 쫑긋 세워 가만히 듣는 나는 바늘이 되어 그 사이를 돌아다닌다.
지금까지 내가 이어온 노래 만들기, 글쓰기, 공연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야기 속에 머무는 시간도 노동이라 부를 수 있나.
시간과 노동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게 여전히 어렵다.
시간당 시급이 가장 높은 일은 지원금이 있는 행사에서 별로 힘들이지 않고 부르는 노래 몇 곡이고, 시급이 가장 낮은 일은 손가락 끝에서 발가락 끝까지 모든 기력을 쏟아붓는 쿠팡의 육체노동이다.
(거기서 인생을 가장 많이 배우면서 수강료는 땀으로 치른다.
) 가장 자랑스러운 노동은 돈을 버는 일이 아니라 나를 위해 냄비밥을 짓는 일이고, 현재 가장 즐거운 노동은 재능기부하는 일본어 수업이지만 계속 그럴지는 알 수 없다.
프리랜서 n잡러의 산발적인 노동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