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칠레대사관 ‘한국과 칠레의 성소수자 권리 증진’ 논의 자리 마련
2025년 7월 15일 주한칠레대사관에서 주최한 라운드 테이블 〈한국과 칠레의 성소수자 권리 증진과 옹호의 역사〉 모습. 빅터 코네헤로스 주한칠레대사관 공관 차석이 진행하고, 모두의결혼 이호림 대표, 혼인평등소송 당사자 김규진 씨, 칠레평등재단 마리아 호세 이사(온라인)가 패널로 참여했다.
©일다     "칠레에서 동성애는 1999년까지 범죄였습니다.
20세기 내내, 같은 성을 사랑하는 건 범죄였죠." 그랬던 칠레는 2021년 혼인평등법을 제정했다.
마리아 호세(María José Cumplido) 칠레평등재단 상임이사는 칠레에서 이뤄낸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했다.
  지난 15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주한칠레대사관에서 〈한국과 칠레의 성소수자 권리 증진과 옹호의 역사〉에 관한 라운드 테이블을 마련했다.
한국 모두의결혼 이호림 대표와 혼인평등 소송 당사자 중 한 명인 김규진 씨(관련 기사: 우린 모모(母母) 가족, 이제 법적으로도 인정받아야죠 https://ildaro.com/10020)가 패널로 참석했으며, 칠레평등재단 마리아 호세 이사 또한 온라인으로 참여했다.
  칠레평등재단(Fundacion Iguales Chile)은 2011년 설립된 비영리단체로, 성적 지향과 성별정체성 및 젠더 표현에 기반한 모든 형태의 구조적 차별을 근절하고, LGBTQ+ 커뮤니티의 포용과 평등을 증진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다.
평등재단은 칠레의 주요 입법 변화에 있어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차별금지법(일명 ‘사무디오 법’) 제정, 시민결합법 제정, 성별정체성법(트랜스젠더가 법적으로 이름과 성별을 변경할 수 있는 권리 확보) 제정, 그리고 2021년 12월 혼인평등법 제정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왔다.
  현재 초, 중, 고등학교와 대학교, 공공기관 및 민간기업을 대상으로 다양성 교육 및 워크숍을 통해 성평등과 다양성 존중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2016년엔 기업 내 다양성과 포용을 촉진하기 위한 네트워크인 “프라이드 커넥션 칠레”를 출범시켜, 기업들이 성소수자 친화적 정책을 수립하도록 지원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펴고 있다.
  라운드 테이블은 빅터 코네헤로스(Victor Conejeros) 주한칠레대사관 공관 차석이 진행을 담당했으며, 마티아스 프랑케(Mathias Francke Schnarbach) 주한칠레 대사 또한 끝까지 자리에 함께하며 패널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등 적극적인 관심을 내비쳤다.
  칠레 사회 뒤흔든 동성애 혐오범죄…차별과 박해의 실체 드러나 차별금지법, 시민결합법, 그리고 혼인평등법 갖춘 사회로 “지난 12년 넘게 포용적이고 차별 없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 온” 칠레평등재단 홍보 영상 중: ‘우리를 결속시킨 순간들, 우리의 삶을 영원히 바꿔놓은 순간들’ https://youtu.be/NPqYlhnqCgA?si=3tvyazUsmUtWG6U9       마리아 호세 칠레평등재단 이사는 “칠레의 현대사 대부분에서 게이, 레즈비언, 바이, 트랜스젠더로 산다는 건, 곧 ‘숨는 것’의 의미했다”며 칠레의 어두웠던 과거를 설명했다.
1999년까지 칠레 형법은 동성애를 범죄로 규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독재정권이 끝나고 민주주의가 회복되기 시작하면서 “칠레는 비로소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고, 인권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며 새로운 운동의 공간이 열리는 시기”로 변모해 갔다.
  그 과정이 쉽진 않았다.
“경찰 폭력에 맞서고, 작은 그룹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변화가 진행됐고, 마침내 동성 간 성관계 비범죄화가 이뤄졌다.
마리아 이사는 “당시 우리에게 이 변화는 그저 ‘존재한다’는 이유로 감옥에 갈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였다고 짚었다.
  하지만 그런 기쁨도 잠시, 2012년 3월 산티아고 시내 한 공원에서 게이 남성 다니엘 사무디오가 수 시간 구타와 고문을 당한 채 발견되는 일이 발생한다.
그의 몸엔 가해자들이 만든 나치 상징 모양의 상처 또한 발견됐다.
다니엘 사무디오는 결국 병원에서 사망했다.
마리아 이사는 “이 사건은 칠레 전역을 충격에 빠뜨렸다.
너무나 잔인한 폭력이었기에, LGBTQ 커뮤니티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비로소 당시 우리가 겪고 있던 박해와 폭력의 실체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당시 세바스티안 피녜라 칠레 대통령은 7년 넘게 교착 상태에 빠져있던 혐오범죄·차별금지법의 채택을 의회에서 서두르도록 촉구했다.
“인종, 민족, 종교, 성적지향, 성별 정체성, 외모 또는 장애를 근거로 차별하는 것을 범죄로 규정”하는 이 법안은 ‘사무디오 법’으로 불렸다.
같은 해 5월, 상원 의회는 25대 3의 찬성으로 법안을 통과시켰다.
“역사상 처음으로 칠레가 LGBTQ 커뮤니티를 명시적으로 보호하는 장치를 갖게 된 것”이었다.
  이후 ‘동성 및 이성 동거커플이 재산을 공동 소유하고, 의료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허용하며, 시민 파트너 사망 시 연금 혜택을 청구하고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도록 하는 시민결합법’이 2015년 발효되었다.
또, 마침내 2021년 혼인평등법도 마련되었다.
이제 동성 부부는 결혼할 권리뿐 아니라 입양할 권리도 갖게 됐다.
  마리아 이사는 “수십 년간 함께한 커플들이 마침내 결혼식을 올리는 모습을 보는 건, 우리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감동적인 순간 중 하나였다”고 밝혔다.
“혼인평등은 단순히 결혼제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두 엄마나 두 아빠를 둔 아이에게, 너희 가족도 똑같이 존중 받는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   칠레평등재단 유튜브 홍보 영상 중 https://youtu.be/NPqYlhnqCgA?si=3tvyazUsmUtWG6U9     법에 적힌 존엄이 일상 속 존엄이 되기 위해 … 존중, 공감, 다양성 가르치는 ‘포괄적 성교육’이 중요   마리아 호세 이사는 트랜스젠더 권리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짚었다.
“너무 오랫동안 칠레의 트랜스젠더는 법적 성별을 바꾸기 위해 정신과 평가나 심지어 수술을 강요받아야 했다”고 설명하며, 인권 투쟁의 결과 “이제 행정절차를 통해 이름과 성별 표기를 바꿀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트랜스젠더는 폭력, 차별, 의료 접근 제한, 고용 장벽에 시달리고 있다”고 짚으며 “법에 적힌 존엄이 일상 속 존엄이 되기 위해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고 했다.
  차별금지법의 실효성도 마찬가지다.
“많은 피해자가 복잡한 법 절차를 홀로 감당해야 하기에, 결국 학교를 중도에 그만두는 청소년, 침묵 속에서 고통 받는 LGBTQ가 많다”는 것. 그렇기에 “포괄적 성교육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존중과 공감, 다양성의 가치를 가르치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   또한 정치계에서도 “일부 정치 지도자들이 ‘소수자를 공격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유리하다’는 이유로 이를 부추기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했다.
마리아 이사는 “법은 도구일 뿐, 수세기에 걸친 편견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는다”며, 그렇기에 투쟁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우린 10대 소년이 부모에게 커밍아웃할 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트랜스젠더가 병원에 갔을 때 존중받는 사회, 사랑과 안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오늘도 여전히,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기 두려워하는 아이들, 정체성을 숨기는 직장인들, 평생을 숨기고 살다 노년을 고독하게 맞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자유, 존엄, 사랑할 권리, 있는 그대로의 당신으로 살 권리. 이것은 누군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다.
”   혼인평등 소송으로 변화를 모색하는 한국 우리 사회도 가족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환대 늘고 있어 2025년 2월 14일, 헌법재판소 앞에서 “혼인평등 헌법소원 기자회견”이 열렸다.
©모두의결혼       칠레에 비해 아직 갈 길이 먼 한국이지만, 우리 사회에도 변화는 있다.
이호림 모두의결혼 대표는 여전히 차별금지법도 제정되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며 혼인평등을 위한 활동을 소개했다.
“차별, 인권 담론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사랑, 가족처럼 보다 보편적 가치에 기반한 논의를 해보자는 것이다.
모두의결혼 캠페인은 동성부부가 함께 병원에 가는 모습, 아이를 양육하는 모습 혹은 가족모임에서 배제되는 경험 등을 보여주며 성소수자 가족을 ‘남’이 아닌 이웃, 동료, 친구로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활동이다.
”   법을 변화시키는 것도 중요한 목표다.
이를 위해 모두의결혼은 2024년 10월 10일 혼인평등을 위한 소송을 시작했다.
구청에 혼인신고를 접수했다가 거부당한 부부가 소송에 참여했으며, 무려 11쌍의 부부가 함께하는 역사적인 소송이다.
현재 이 소송은 2건의 소송이 심판 회부 결정을 기다리고 있으며, 9건은 혼인신고 불수리 불복 소송이 각하되고 위헌법률심판제청도 기각되어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직접 제기한 상황이다.
  혼인평등 소송은 이제 시작 단계지만, 이에 힘에 실어줄 수 있는 중요한 성과도 있다.
2024년 7월, 동성 동반자에 대한 국민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이 나왔기 때문이다.
(관련 기사: ‘가족’의 범위, ‘동성애’에 대한 규범적 판단이 변화했다 https://ildaro.com/9986) 이호림 대표는 “이는 법적 이정표이며, 성소수자 커뮤니티에 ‘변화는 가능하다’는 희망을 보여준 사건”이라 강조했다.
  소송에 참여하고 있으며, 2023년 ‘한국 최초로 공개 출산한 레즈비언’인 김규진 씨는 이미 변화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놀랍게도 (아이를 출산한) 병원에서는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아내가 마취과 의사로 근무 중이던 병원이었기에, 의료진은 나를 ‘배우자’로 불렀고, 출생신고서에도 내 이름과 아내 이름을 함께 적었다.
아내의 회사 내 홈페이지에는 아내가 아이를 출산했다는 소식이 게시되기도 했다.
”   사회의 변화, 환대는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결정적인 순간에 “모든 국민이 법 앞에 평등하다”(대한민국헌법 제11조)는 말은 작동하지 않는다.
김규진 씨는 “병원에서의 환대에도 불구하고, 제도는 달랐다.
아내는 배우자 출산으로 인한 출산휴가를 신청했지만 거부당했다.
‘법적 가족’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고 했다.
  이번 라운드 테이블에서 칠레와 한국의 이야기는 달랐지만, 결국 같은 흐름 내에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변화를 위해 달려가고 있는 모습은 모두 열정으로 가득했다.
자리에 함께 한 한국의 성소수자 인권 활동가들과 해외 외교관들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국은 앞으로 어떤 국가가 될 것인가? 민주주의 사회로서 어떤 ‘품격’을 갖출 것인가? 그 품격을 무엇으로 상상하든, ‘모두’가 일상에서 존엄할 수 있는 사회로의 변화가 필수다.
동성애가 범죄였던 칠레는 ‘혼인평등’까지 나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