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SF 드라마 〈블랙 미러〉시즌 6의 5화 “DEMON 79”
영국 SF 옴니버스 드라마 〈블랙 미러〉(Black Mirror) 시즌 6의 마지막 에피소드 “DEMON 79” 중에서. 악마 가압이 주인공 니다에게 이미지를 보여줄 때마다 니다의 눈이 변한다.
(출처: 넷플릭스)
넷플릭스에서 공개되고 있는 시리즈 〈블랙 미러〉는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 집중하여 근미래의 디스토피아를 보여주는 영국의 sf 옴니버스 드라마이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소재들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 기술이나 상황이지만 충분히 곧 실현될 법한 것이기에, 보고 나면 묘한 찜찜함이 남는다.
현재의 작은 선택과 방관, 무시, 결심이 가져올 수 있는 가까운 현실을 보고 난 기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금처럼 산다면 어떻게 될지 미리 본 것 같은 기분이 오랫동안 일상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디스토피아 콘텐츠를 좋아하기에 시즌 1부터 시즌 7까지 빠지지 않고 보았는데, 그 중 시즌 6의 마지막 에피소드는 〈블랙 미러〉의 전체 메시지를 메타적으로 함축하고 있기에 흥미로웠다.
“DEMON 79”라는 제목의 이 에피소드는 직접적으로 기술을 다루지는 않지만, ‘악마’의 힘을 빌려서 보게 되는 ‘이미지’가 한 여성의 일상과 이 세계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로 〈블랙 미러〉의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악마가 주인공 여성을 설득하는 방법은 타인의 악한 과거와 이 세계의 암담한 미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이미지를 본다는 것’의 위험성 혹은 가능성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
*여기서부터는 〈블랙 미러〉 시즌 6의 마지막 에피소드 “DEMON 79”에 대한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일상이라는 공포
“DEMON 79” 에피소드는 보수당이 정권을 잡게 되는 1979년의 영국을 배경으로 하며, 주인공 ‘니다’는 혼자 사는 유색인종 여성으로, 백화점 구두 가게 직원으로 일한다.
(출처: 넷플릭스)
그녀의 이름은 ‘니다’. 유추하건대 인도 혹은 파키스탄계 영국인이다.
그녀는 혼자 살며 백화점 구두 가게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녀의 하루는 늘 비슷한데 아침이면 표정 없는 얼굴로 일어나 거울을 보며 웃는 연습을 하고 백화점으로 출근한다.
친절한 응대에도 무표정으로 반응하는 손님과 자신을 괴롭히는 동료 직원, 그리고 성희롱 하는 손님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퇴근하고, 집 앞 담벼락 앞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청년들을 두려워하며 서둘러 집에 들어오는 하루이다.
그저 내성적인 한 여성의 평범한 하루일까. 하루 동안 그녀가 보고 들은 이미지들을 고려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단 그녀의 일상에는 그녀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액자 속에 담긴 어머니의 사진과 티브이 속에서 노래 부르며 춤추는 가수 ‘보니 M’을 제외하곤 전부 백인 영국인들이다.
이날 백화점 바깥에서는 선거 유세가 한창이었다.
보수당 후보로 나온 마이클 스마트는 젊은 정치인의 패기와 매끈한 언변으로 사람들에게 노동당의 무력함을 설득했다.
니다는 ‘앞으로 범죄가 늘어나고 쓰레기가 쌓일 텐데 영국에는 제대로 일하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며 자신을 뽑아달라고 외치는 그의 연설을 듣는다.
‘범죄’와 ‘쓰레기’라는 표현이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고 은유하는지 언급되지는 않지만, 청중들은 아마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니다는 그곳에서 소외된 감정을 느끼며 자리를 떴다.
저녁을 먹는 그녀의 거실 티브이에서는 선거 여론 조사에서 마거릿 대처 후보의 보수당이 앞서고 있으며, 극우당 국민전선이 행진하던 중 폭력이 발생해 수천 명이 부상을 입었다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다음날 출근하려고 나선 그녀의 집 앞 대문에는 누군가 흰 페인트로 칠한 NF라는 글자가 보인다.
NF는 National Front의 약자로 ‘국민전선’을 뜻한다.
이곳은 1979년 영국 사회이고 그녀는 유색인종이자 이주민이다.
이민자 배척, 유색인종 혐오와 극우주의, 자문화중심주의가 팽배하던 시대의 한복판에서 니다의 일상은 불안하게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국민전선은 1967년에 설립되어 파시즘, 반유대주의, 인종주의, 백인 민족주의 정치를 주장했던 영국의 극우 정당이었다.
영국 총선은 1979년 5월 3일에 실시되었고, 복지와 고용 문제를 내세웠던 노동당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내세운 보수당에 패배했다.
당시 보수당 대표였던 마거릿 대처는 이후 영국 총리로 취임한다.
넷플릭스에서 공개되고 있는 영국의 SF 옴니버스 드라마 〈블랙 미러〉(Black Mirror) 시즌 6의 마지막 에피소드 “DEMON 79” 포스터
드라마에서 악마가 세 명의 제물을 바쳐야 하는 디데이로 제안했던 날짜는 5월 1일 오월제(노동절)였다.
이 에피소드의 제목에서 1979년 영국을 의미하는 ‘79’ 앞에 ‘demon’이 붙은 건, 이 시대가 정말 잔인했기 때문이라고 유추해 볼 수 있다.
곧 니다 앞에 나타날 악마 ‘가압’보다 더 잔인했을 이 시대의 그림자가 ‘demon’이라는 단어에 덧씌워져 있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음울한 음악과 색감으로 내내 공포영화스러운 분위기를 흉내내지만, 정말 공포스러운 건 니다의 평범한 일상 그 자체이고, 이 일상이 만들어낼 미래이다.
혐오에 대응하지 않는 일상의 끝에서
그렇게 자신에게 적대적인 세계를 버티고 참아내던 어느 날, 그녀의 일상에 작은 변화가 생긴다.
그날도 어김없이 동료 직원은 ‘이민 철폐’, ‘영국 문화 보호’라는 구호가 적힌 국민전선의 선전물을 보란 듯이 펼치고 있었고, 니다가 평소에 창고에서 점심 도시락으로 먹던 비리야니(인도와 파키스탄의 전통 음식)가 냄새 난다는 이유로 사장으로부터 핀잔을 들은 뒤 어두운 지하실에서 혼자 점심을 먹게 된 날이었다.
호기심에 이상한 문자가 적힌 돌을 만지면서, 돌에 니다의 피가 묻게 되고, 그 돌에서 ‘가압’이라는 악마가 깨어나게 된다.
악마는 니다의 피가 돌에 묻으며 부적을 깨웠기에 서로 귀속되었고, 이제 앞으로 사흘 동안 세 명을 죽여서 제물로 바치지 않으면 이 세계에 종말이 올 것이고, 가압 자신도 임무에 실패했기에 영원한 무의 세계로 떨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니다와 가압은 서로를 위해 이 세계의 종말을 막아야 한다.
이때 믿지 못하는 니다에게 악마는 모든 것이 불타버리는 미래를 보여주는데, 뜨거운 열기가 고통스럽게 느껴지고 사람들의 끔찍한 비명도 들리는 생생한 장면이다.
하지만 니다는 자신은 사람을 죽일 수 없다며 가압으로부터 도망친다.
그때 다리 밑에서 개를 산책시키던 한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 가압은 저 남성이 죽어 마땅한 인간이라고 하며 그가 8살짜리 딸을 밤마다 성폭행하고 있고 딸은 이후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자살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니다는 계속 살인을 거부하지만, 악마가 직접 그 남성과 딸의 장면을 이미지화해서 보여주자 분노하며 벽돌로 그 남자의 머리를 내려친다.
생생한 이미지는 니다를 움직이게 했다.
니다 앞에서 동료 직원이 보란 듯이 NF(National Front, 영국의 극우정당 '국민전선’) 선전물을 들고 있다.
(출처: 넷플릭스)
그렇게 첫 번째 살인이 끝나고, 충격으로 힘들어하는 니다에게 악마는 자신은 나쁜 사람에겐 기회를 안 준다고 하며 이렇게 말한다.
“지금 일어나는 일에는 너라는 인물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어.”
니다는 어떤 인물인가. 자신을 무시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일상을 버티고 있지만, 그녀는 자주 생생한 상상을 한다.
자신을 괴롭히는 동료 직원의 머리를 테이블에 내리치는 상상, 성희롱 하는 남성 손님의 목을 조르는 상상. 그녀의 일상에서 자주 반복되었던 상상의 장면들은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 뒷면에 얼마나 많은 감정들이 쌓여있을지 암시한다.
그녀는 결코 아무렇지 않지 않은 것이다.
혐오를 마주하는 감정은 두려움과 불안도 있지만 당연히 분노 또한 동반한다.
그 누구도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국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낯선 냄새가 나는 음식을 먹는다는 이유로 무시당할 수 없으며, 그러한 무시 앞에서 담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담담한 척 버티는 일상은 엄청난 스트레스와 중압감 속에서만 가능하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누군가를 무시하고 차별하는 것이 일상이 된 세계에서 그녀는 어떤 기분으로 살아왔을까. 부정적인 감정들은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하지만 그 위험한 상상을 어떤 식으로 해소하느냐는 다른 문제이다.
중요한 건, 니다는 일상의 혐오 폭력에 맞대응하는 폭력을 실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세상을 구하기 위한 제물로, 충분히 자신을 괴롭히던 주변 인물들을 선택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복수는 이 혐오의 근원을 향한다.
이미지를 생생히 상상할 수 있고 더 멀리 더 자세히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니다는 혐오에 맞대응하지 않고도 이 세계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원하는 것을 창조하는 상상의 힘
샤크티 가웨인, 『창조적 시각화: 당신의 삶에서 당신이 원하는 것을 창조하는 상상의 힘을 사용하라』 책 표지. 〈블랙 미러〉 시즌 6 “DEMON 79” 에피소드 초반에 니다가 퇴근 후 집에서 읽고 있던 책으로, 40년 넘게 읽히고 있는 명상 분야 베스트셀러다.
니다는 악마에게 보수당 후보 마이클 스마트의 미래를 보여달라고 말한다.
악마가 보여준 미래에서 마이클 스마트는 선거에서 당선되고 이후 이민자들을 혐오하는 발언을 하며 새로운 당을 창당한다.
그리고 결국 영국의 새 총리가 되어 적극적인 극우 정치를 폭력적으로 실행한다.
니다가 본 것은 이민자들을 찾아내는 로봇 경찰견까지 보이는 끔찍한 미래이다.
지옥에서 좋아할 인물이기 때문에 죽이지 않는 게 좋겠다는 가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니다는 세 번째 제물로 마이클 스마트를 선택한다.
결심이 서자 그녀는 어딘가 달라진 모습이다.
자신을 괴롭히는 동료 직원의 무시 발언을 맞받아치고, 늘 쳐다보기만 하던 마네킹이 입고 있는 빨간 가죽 재킷을 걸치고 당당하게 백화점을 나선다.
니다는 연설을 마치고 별장으로 향하던 마이클 스마트의 차를 그대로 받아버린 뒤 망치로 살인을 마무리하려 하지만, 그때 나타난 경찰의 저지 탓에 실패한다.
그 와중에 마이클은 경찰에게 “짐승 같은 게” 나를 죽이려 했다고 말하며 그가 감추고 있는 인종 차별을 은연중에 드러내기도 한다.
니다가 본 미래는 근거 없는 상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제 니다는 취조실에 앉아 있다.
자정이 몇 분 안 남았고, 종말을 막기 위해 사흘 동안 세 명을 죽여야 했다는 그녀를 경찰은 미친 사람 취급한다.
하지만 정말로 자정이 되자 세상이 불타기 시작한다.
핵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핵폭발로 불바다가 되어가는 세계를 뒤로하고 니다는 가압과 함께 영원한 망각의 세계로 떠난다.
그곳에는 어떤 이미지도 보이거나 들리지 않을 것이고 오직 상상만이 가능할 것이다.
니다의 삶에서 그녀를 괴롭히던 일상의 이미지는 사라졌다.
무의 세계로 떠나는 니다의 표정이 행복해 보인다.
여기서 잠시, 에피소드의 초반에 나온 장면을 복기해보자. 니다가 퇴근 후 집에서 책을 보던 장면이다.
이 책은 샤크티 가웨인(Shakti Gawain)이 쓴 『창조적 시각화』(Creative Visualization, 1978)로, ‘당신의 삶에서 당신이 원하는 것을 창조하는 상상의 힘을 사용하라’(Use the Power of Your Imagination to Create What You Want in Your Life)는 부제가 눈에 들어온다.
40년 이상 1천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이다.
샤크티 가웨인이 명상과 정신성장을 통한 자기계발 분야의 저술가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창조적 시각화’는 원하는 것을 생생하게 상상해 낼 수 있는 힘이면서, 동시에 그 상상의 힘을 정의로운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하는 힘인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욕망하기보다, 자신은 그것을 왜 원하는지 성찰하게 하는 명상의 힘인 것이다.
책의 맥락을 고려한다면, 니다는 일상의 혐오에 대한 대항 폭력을 생생하게 상상하기 위해 이 책을 읽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자신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이들에게 폭력적으로 똑같이 대응하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고 있던 것은 아닐까.
SF 옴니버스 드라마 〈블랙 미러〉(Black Mirror) 시즌 6 마지막 에피소드 “DEMON 79” 중에서 주인공 니다의 모습. (출처-넷플릭스)
티브이에서 매일 흘러나오는 전쟁의 전조들, 미국과 소련의 핵확산 금지 대화가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소식, 핵의 위협이 심각해지고 있고,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종말의 징후라는 것을 니다는 창조적 상상의 힘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이 세상은 왜 이렇게 잘못되어 가는지, 왜 인간은 타인을 향해 왜곡된 편견을 갖는지, 왜 세계는 전쟁을 계속하는지, 이런 세상이 지속된다면 미래는 어떻게 될지, 니다는 계속 상상했을지 모른다.
그 상상의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런 세상이라면 내가 사라지거나 이 세계가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악마 가압은 니다의 마음속 목소리를 듣고 찾아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악마는 세 명을 충분히 살인할 법한, 일상의 분노가 가득 찬 니다를 종말의 구원자로 선택했다.
누군가 이 세계의 끝을 결정지어야 한다면 니다와 같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이런 그녀가 구하지 않을 세상이라면 구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이 드라마는 1979년 영국을 배경으로 하지만, 당시에 대중매체에서 보여주던 인종차별, 이주민 혐오, 핵 문제, 세계적인 전쟁의 이미지는 지금 2025년에도 전혀 변하지 않은 듯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DEMON 79”의 결말이 섬뜩한 감각을 남기는 건, 디데이가 얼마 남지 않은 취조실에 앉아 있는 기분을 알 것 같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과 이란의 분쟁, 미국의 개입, 핵시설 공격,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난민 문제 등. 지속되는 전쟁과 빈번해진 전쟁 이미지가 일상이 되어가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위험한 시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니다는 악마 가압이 보여준 생생한 이미지를 보고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지만, 이미 생생한 이미지가 넘쳐나는 세계에 사는 우리는 어떤 이미지를 보고 움직일 수 있을까.
[필자 소개] 전솔비
. 시각문화 연구자. 정체성과 수행성의 문제를 연구하며 전시와 책을 만들어왔다.
동시대 현장에서 생산되는 이미지의 정치성과 예술적 실천을 탐구하며 예술가, 연구자, 활동가 동료들과 여러 협업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난민캠프라는 현장을 만나며 〈연약한 기록들의 춤〉(신촌문화발전소, 2022), 〈캠프 사운드 커뮤니티〉(웹사이트, 2023)를 함께 만들고, 『춤추고 싶은데 집이 너무 좁아서』(파시클, 2024)라는 책을 함께 썼다.
‘이 세계는 구원할 가치가 있을까’라는 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