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감독이 추천하는 영화 〈그녀들의 요트 레이싱〉
다큐멘터리 영화 〈그녀들의 요트 레이싱: 편견의 파도를 넘다〉(영어 제목: Maiden, 알렉스 홈즈, 2018)에서 방한복을 입고 키를 잡은 메이든호의 선장 트레이시.    
어릴 적 나의 꿈은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는 것이었다.
바다는 지구상에서 가장 신비롭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바다를 표류하고 항해하는 이야기들을 보고 또 보았다.
험한 폭풍우와 파도를 뚫고, 배고픔과 죽음의 공포를 헤치며, 생존의 사투가 벌어지는 바다.
그리고 그 역경 끝에 만나는 신비롭고 경이로운 자연의 모습. 이런 이야기들을 보면서 나는 항해라는 환상을 마음에 품었다.
하지만, 바다를 표류하는 이런 이야기의 주인공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낭만적이고, 어딘가 미쳐있고, 그리고 남자라는 것.   어릴 적 품어왔던 항해에 대한 환상을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영화가 있다.
하지만, 허구 속의 등장인물이 아닌 현실의 여성들이 그 주인공이다.
2018년도에 제작된 〈그녀들의 요트 레이싱: 편견의 파도를 넘다〉(알렉스 홈스 감독)는 다소 전형적인 제목 때문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처럼 바다와 항해에 대한 환상이 있거나, 여성들이 실패하고 성장하는 이야기를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200% 몰입하며 볼 수 있는 영화다.
무더위에 무기력해진 여름날에 다시금 뜨거운 열정을 느껴보기에도 제격인 작품이다.
  이 영화는 1989년에 세계 최초로 요트를 타고 전 세계를 일주한 12명의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국에서 개최되는 위트브레드 세계일주 레이스는 전세계에서 가장 긴 거리를 일주하는 요트 대회다.
1989년, 영국의 포츠머스 항구에서 제5회 위브레드 세계일주 레이스를 위해서 23척의 요트가 모였다.
그 중에 메이든호가 있었다.
이 영화는 당시 메이든호의 선장이었던 트레이시 에드워드와 선원들의 인터뷰와 함께, 대회가 있었던 당시 텔레비전 방영을 위해서 촬영된 대량의 아카이브 영상을 활용해서 실감나게 당시의 시대상과 상황을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풀어낸다.
  메이든호(Maiden)의 시작 다큐멘터리 영화 〈그녀들의 요트 레이싱: 편견의 파도를 넘다〉(영어 제목: Maiden, 알렉스 홈즈, 2018)의 북미 개봉 포스터     메이든호의 선장인 트레이시 에드워드는 폭력적인 새아빠를 피해서 15살에 집을 나왔다.
가출 후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우연히 배를 타게 된다.
‘집시’, 고등학교 중퇴자,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이 배에서 트레이스는 가족을 만난 것 같은 안정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이들과 함께 대서양을 건너면서 처음으로 항해의 기술을 배웠고, 바다 위에서 자유를 느꼈다.
트레이시는 항해가 “모든 걸 뒤로 하고 완전하게 해방되는 자유”라고 말한다.
  트레이시는 위트브레드 요트 대회가 열린다는 뉴스를 본 이후로 이 대회에 참가해야 한다는 강한 운명의 이끌림을 느꼈다.
선원이 되고 싶었지만 그 어떤 배도 어린 여자를 선원으로 받아주지 않았다.
트레이시는 결국 요리사가 되어서 첫 번째 대회에 참가했지만, 남자들이 가득 배에서 요리만 하는 것은 끔찍한 경험이었다.
정식 항해사로서 대회에 참여하고 싶은 열망은 더 강해졌다.
  그때부터 트레이시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전원이 여성인 팀을 꾸려서 요트 대회에 참여하겠다는 꿈. 그녀의 엄마는 이 이야기를 듣고 심드렁하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열정이 진심이라면 해보라고. 하지만 네가 끈질기게 뭘 해낸 적이 없었다고. 사람들은 그 꿈을 재밌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의 예측과는 다르게 그녀는 진지했고 끈질겼다.
  “의견이 갈릴 거에요. 남자들은 안 된다고 할 거고, 여자들은 분명 해낼 수 있다고 말하겠죠. 어느 쪽이든 그걸 증명하려면 누군가 나서야 하잖아요.”  노을 지는 요트 위에 앉아있는 메이든호의 선장 트레이시 에드워드. 영화 〈그녀들의 요트 레이싱: 편견의 파도를 넘다〉 중에서.       트레이시는 자신과 같은 꿈을 가진 12명의 모험심 많은 여자들을 모았다.
그런데 이 대회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요트가 필요했다.
어떤 기업도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요트팀이 세계일주를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기에 후원하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여성들은 포기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죽으러 가는 게 아니었어요. 우리가 전 세계를 항해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대회의 시간이 다가오자 트레이시는 결국 후원을 받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집을 담보로 중고 배를 구입한다.
그 배가 바로 메이든호였다.
12명의 선원들은 작업복을 입고, 연장을 들고 자신들이 항해할 배를 스스로 고쳤다.
직접 배를 고치는 이 장면은 상징적이다.
이 여성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의 연장으로 자신들의 길을 개척했다.
우여곡절 끝에 메이든호는 1989년 10월 위트브레드 세계일주 레이스에 최초의 여성팀으로 출발선에 섰다.
실패를 딛고 파도를 타기   이 영화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실패를 다루는 방식이다.
우리는 이미 메이든호가 이 항해를 성공적으로 끝마쳤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는 그 당시의 상황을 촘촘하게 재구성하면서 실패와 좌절의 감정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이들의 167일간의 항해는 여러 번 좌초될뻔하는 위기에 처한다.
메이든호의 도전은 폭풍우를 뚫고 항해하는 배처럼 끊임없이 높은 벽에 부딪히고 흔들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메이든호의 선원들.     영화의 오프닝 이후 처음 나오는 장면은 1989년 요트 대회에 참가하는 트레이시의 인터뷰 장면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트레이시에게 기자는 “웃어요.”라고 말한다.
트레이시는 이 말을 듣고 처음에는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자기소개를 하다가 말이 꼬인 트레이시는 다시 인상을 찌푸린다.
다시 웃으라고 강요하는 기자에게 트레이시는 “이게 웃은 거에요.”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아카이브 푸티지들 속에 등장하는 트레이시의 어린 시절의 목소리는 퉁명스럽고 심각하고 걱정이 가득하다.
트레이시 뿐만 아니라 메이든호의 모든 선원들의 표정이 그렇다.
이 영화는 메이든호의 선원들을 승리의 여신으로 만들지 않고, 부조리한 세상과 불확실한 미래에 맞서 저항하는 청춘의 표정으로 그려낸다.
  트레이시는 말하자면 가난하고 배운 것이 없는 여자였다.
거칠고 막무가내이고 자기를 표현하는 것에 서툴렀다.
이런 결점은 어느 순간 팀 안에서도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메이든호에서 가장 경험이 많은 항해사였던 마리 클로드와 리더십을 두고 갈등이 생긴 것이다.
결국 1등 항해사였던 마리 클로드는 대회 직전에 팀을 나간다.
팀원들은 모두 패닉에 빠진다.
특히 자신의 항해 실력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트레이시는 스스로 선장과 항해사의 역할을 도맡아야 하는 현실 속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레이스를 시작한다.
메이든호의 선원들에게 이런 도전은 난생 처음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미숙한 실수를 한다.
항해 도중에도 자만해서 어리석은 실수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이 현명하고 성숙한 사람이 아니기에, 이들의 도전과 성공은 더욱 반짝반짝 빛나는 성장서사가 된다.
  이 영화는 인터뷰와 아카이브 영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메이든호에 탔던 선원들이 당시를 회상하는 인터뷰에 이어서, 1989년에 촬영된 아카이브 영상들이 나온다.
현재 시점에서 인터뷰를 하는 선원들의 얼굴에는 연륜과 여유가 묻어난다.
이 멋진 할머니들의 얼굴이 20대에 항해를 나선 젊고 거친 얼굴로 연결되는 순간이 재미있다.
젊은 시절의 이들은 자신들의 모험이 성공할 수 있을지, 어떤 의미로 역사에 기록될지 전혀 모르는 채로 미지의 세계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젊은 얼굴에 스치는 표정에는 열정과 자유에 대한 갈망, 또 거기에 수반되는 분노와 불안이 뒤섞여 있다.
  남극해의 혹독한 날씨를 견디는 메이든호의 선원들     편견에 정면으로 맞서기   레이스를 하는 내내 세상은 이들의 도전을 가십거리로 여기고 편견 어린 논평을 쏟아낸다.
선원들 사이에 불화가 생기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여자들끼리 있으면 싸움이 난다’고 기사를 쓰고, ‘배 위에는 마스카라가 없어서 어떡하냐’는 걱정을 한다.
그리고 그녀들이 살아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걱정 어린 악담을 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가진 게 없었기 때문에 잃을 것이 없는 이들은 그런 편견에 휘둘리지 않고 메이든호의 항해를 통해서 저항한다.
  이 영화에는 당시 휘트브레드에 함께 참전했던 다른 요트의 선장들과 당시 평론을 썼던 요트 전문지의 기자들이 인터뷰이로 등장한다.
가디언지에 메이든호는 ‘타르트가 가득한 상자’라고 썼던 밥 피셔 기자를 포함해서, 항해는 남자들의 일이라고 말하는 스킵 노박 선장 등. 이들은 당시에 메이든호의 선원들이 직면했던 성차별적인 말들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이 인터뷰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1990년대 항해업계의 분위기,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메이든호가 어떤 비난과 차별에 직면했는지를 피부로 느끼게끔 해준다.
  트레이시는 메이든호의 항해를 시작하기 이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문답을 한다.
기자가 ‘페미니스트이신가요?’라고 묻자 ‘아니요. 저는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싫어해요. 전 그저 원하는 것을 하고 싶을 뿐이에요.’라고 대답한다.
페미니스트를 판별하고자 하는 이런 문답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나는 페미니스트인지를 묻는 저 질문의 무용함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여성을 받아주지 않는 항해업계를 뚫고 항해하기 위해서 스스로 팀을 꾸리고 배를 만든 이 여자들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 그들은 이미 자유롭기 위해서 항해를 한다고 말한 저항하는 여성들이다.
  승리를 축하하는 메이든호의 선원들.     위트브레드 경기는 5개의 구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메이든호가 한 구간의 레이스를 끝내고 항구에 정박할 때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메이든호를 응원하고 있었다.
메이든호의 선원들은 스스로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이 레이스를 시작했지만, 레이스가 끝날 때는 이미 세계인들의 꿈이 되어 있었다.
메이든호는 1990년 5월, 167일의 항해를 마치고 위트브레드 대회에서 2등을 했다.
메이든호의 레이스를 함께하는 수백 척의 배들이 함께 항구로 들어오는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그 순간 메이드 호 선원들이 느낀 충만함을 함께 느낄 수 있다.
그 순간의 감동을 꼭 영화를 통해 함께 경험하기를 바란다.
  메이든호의 선원들이 세계일주를 하며 바다에서 보낸 시간을 떠올려본다.
그들의 항해는 완벽하지 않았고, 세상의 시선은 친절하지 않았다.
그들의 여정 속에는 창피한 순간도, 어설프고 미숙했던 순간도 있었고, 그래서 놀림거리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매 순간 스스로를 의심하면서도 실패를 딛고 다시 파도를 탔다.
이들의 모험을 30년이 지난 지금에서라도 함께 응원할 수 있어서 기쁘다.
  [필자 소개] 권오연 : 2024년부터 ‘연분홍치마’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2015년 강남역 사건에서 시작된 페미니즘에 대한 대화를 담은 단편 다큐 〈X에 대하여〉와 한국과 일본에 살고 있는 네 명의 페미니스트가 나누는 우정을 담은 〈순간이동〉을 공동연출했다 10.29이태원참사 미디어팀으로 활동하며 이태원참사 다큐 〈별은 알고 있다〉를 만들었다.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 소개] 2004년 설립된 연분홍치마는 여성주의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소통과 연대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다양한 현장에서 미디어로 연대하며 다큐멘터리, 극영화, 웹 콘텐츠 등을 제작하고 있다.
pinks.or.kr
메이든호의 선원들, 바다를 누빈 여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