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시골에서 젠더폭력 대응력 향상 훈련을 하다④
지난 2월부터 제주 곳곳에서 ‘일상 대응력 향상 훈련’이 진행되었다.
내 몸의 강한 부분을 인지하고 활용하는 타격 훈련 (제주 여민회 2030위원회 제공)     지난 2월부터 제주 곳곳에서 진행된 ‘일상 대응력 향상 훈련’에 참가한 40대 여성 네 명이 모였다.
제주 읍면 지역에 사는 40대 여성들은 일상에서 어떤 경계 침해 상황을 맞닥뜨리고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일상 대응력 향상 훈련’을 통해 그들의 일상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런 얘기를 서로 주고받고, 듣고자 하는 마음으로 한 자리에 모였다.
  - 먼저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어떻게 ‘일상 대응력 훈련’에 참여하게 됐는지 말씀해 주세요.     모자반(44세) : 제주에 온 지 이제 4년 차이고 결혼은 했고, 제주에서는 혼자 살고 있어요. 집에서 번역일을 하고 있고 텃밭 활동과 춤추는 활동이 제 일상의 큰 축이에요. 제가 싫은 소리를 잘 못 하는 성격인데요, 가끔 있는 공격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가가 오랫동안 저의 고민이었어요. 어떻게 하면 나를 너무 억누르지도 않으면서 또 불화를 일으키지도 않으면서 슬기롭게 잘 지낼 수 있을까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감으로 신청하게 됐습니다.
  권한나(44) : 제주살이 2년 차인 아이 둘 엄마이고요. 현재는 전업주부로 일하면서 숙소 운영을 하고 있어요. 원래 여성 문제에 관심도 많았고 딸도 있어서 이걸 배워서 딸한테도 좀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알고 보니까 서귀포시가 강력 범죄 1위라고 하더라고요. (다들 “정말요?”) 네. 그래서 알고 있으면 좋을 것 같은 행동들 그리고 젠더 교육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참여하게 됐어요.   이경(40) : 제주에 온 지 8년 차이고 혼자 살고 있어요. 처음 6년은 시골에서 조용히 칩거하면서 안빈낙도하면서 지냈어요. 동네에서 사람들과 어울려서 산 지는 한 2년 정도 됐고요. 지금은 마을 활동도 하고 관계망을 촘촘하게 맺으면서 지내고 있어요. 어제 텃밭 모종을 사려고 종묘상에 갔는데 사장님이 나이랑 결혼 여부를 물어보시더라고요. 저도 좋은 게 좋은 거라 그냥 다 얘기했는데, 저랑 몇 살 차이 안 나는 본인의 큰아들도 결혼을 안 했다면서 만나보라고 권하시더라고요. (다들 “네?”)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팅 시켜주고 싶을 수도 있죠. 그렇지만 훅 하고 들어오는 속도가 도시에 비해 너무 갑작스러운 거예요. 비슷한 상황이 생길 때 그냥 웃어넘기는 게 아니라 더 명확하게 똑똑하게 대응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고, 관계가 친밀해질수록 제 정서나 신체를 지켜야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서 신청하게 됐습니다.
  눈깜(48) : 저는 퀴어이고 파트너랑 같이 제주 이주한 지 3년 6개월 됐어요. 제주는 시골이라고 해도 다른 시골이랑 좀 다르잖아요. 버스로 시내와 연결이 잘 돼 있고 또 관광지이기도 하고 이주자도 많고요. 특히 제가 사는 곳은 관광지인데 나름 번화가도 있고 또 이주자들이 모여 사는 곳도 있고 아파트도 있거든요. 저같은 퀴어에게는 이주지로서 최적의 공간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아파트에 살면서 이웃과는 거의 접촉을 안 하고요. 동네에서는 강아지 산책시키러 바닷가에 갔을 때 만나는 견주들, 나를 드러내지 않고 강아지 이야기로 화제를 삼을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친구들은 따로 만나는 게 편하더라고요. 서울에 살 때 자기방어 훈련 1회기 짜리를 들었는데, 이번에는 좀 길게 듣고 싶어서 신청했어요.   - 제주의 읍면 지역에서 살아가는 일상은 어떤가요? 일상 대응력이 많이 필요한가요?     권한나 : 지금 사는 동네에 이사를 왔을 때, 옆집 분이 굉장히 관심을 가지고 저희한테 와서 인사를 했고, 저도 잘 지내려고 쓰레기봉투 사서 다시 인사를 하러 갔어요. 그런데 “남편은 뭐하냐, 어디서 왔냐?”, 집 값도 아무렇지도 않게 막 물어보시더라고요. 너무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답을 막 하고 왔는데, 뭔가 탈탈 털린 느낌이 드는 거예요. 기분도 나쁘고…. 그분의 경계와 저의 경계가 달랐던 것 같아요.   - 선주민이 그러시는 거예요? 자신에게 안전하고 적절한 타인과의 거리를 설정해 보는 시간 (제주 여민회 2030위원회 제공)       권한나 : 아니요. 이주민들도 그래요. 도시에서 살다 왔는데도 그러시더라고요. 저는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물어보니까 나도 모르게 그냥 막 술술 얘기했던 게, 멍청하게 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또 저는 아이들이 있으니까 아이랑 얽히는 엄마들과의 대화에서 훅 치고 들어올 때도 많고, 내 걸 많이 내보여줄 필요가 있을 때도 있어요. 저도 막 경계하는 성향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확 다 드러내는 성향도 아닌데, ‘적절한 기준을 스스로 세우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모자반 : 저는 이상향이 ‘마을 공동체’인데 한 번도 실현해 본 적은 없고 판타지에 가까운데요. 성향이 혼자 있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일상에서 사람들하고 막 얽히고 충돌하는 기회도 많지 않아요.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좀 큰 거죠. 어쨌든 제주에 오면서는 공동체를 실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약간의 로망도 있었어요.   처음에 살게 된 집이 안채가 있고 바깥채가 있고 그다음에 미등기 가건물이 있고 한 울타리 안에 세 가구가 살았는데요. 가건물에 젊은 남성인 주인이 살고, 바깥채에 저의 여자 지인이, 그리고 안채에 제가 살았어요. 셋이 또래고 공동체가 될 수 있겠다는 약간의 기대가 좀 있었거든요. 그래서 초반에는 야심차게 돌아가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서로 집에서 같이 저녁도 해 먹고 텃밭도 같이 하고 그 집에 하귤나무가 있어서 모여서 청도 담갔어요.   그러다가 제 지인이 그 남성이 불편하다면서 먼저 그 집을 떠났어요. 남자분은 화장실이 바깥에 있는데, 화장실에 가면서 지인 집안을 들여다보고 그랬대요. 그 남자분이 목수인데, 어느 날 밤에 온수기가 고장 나서 샤워를 못 한다며 혹시 우리집 화장실을 쓸 수 있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약간은 꺼림칙했지만 그래도 내가 그런 상황이 될 수도 있고 서로 힘들 때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서는 쓰시라고 했어요. 뭐랄까, 저는 ‘나는 열려 있어.’ 약간 그런 게 있거든요. 그때 저는 거실에서 친구랑 줌 회의를 하고 있었어요. 그분이 술을 약간 먹고 왔는데 샤워를 하다가 샴푸가 안 보인다고 하면서 갑자기 화장실 문을 연 거예요. (벗은 채로요?) 네. 그래서 너무 놀랐는데 일단은 이 사람이 술을 마셨고 그거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는 사람 같아서 “샴푸 거기 있어요.”하고 그 상황을 외면했죠. 지금 생각해 보니까 경계가 서로 달랐던 것 같은데, 그 사람하고 그 일에 대해선 얘기를 하지는 않았어요.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다’라고 저 혼자 결론을 내렸죠. 그 일이 지금 저한테 큰 영향을 미치진 않아요.   권한나 : 저라면 내 집에서 씻겠다는 말에서부터 벌써 놀랐을 것 같아요.   모자반 :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꼭 샤워는 아니더라도 내가 곤란한 상황이 됐을 때 그 사람한테 어떤 부탁을 할 수도 있으니까, 그 사람이 곤란할 때 나도 도와줄 수 있어야 된다고.   - 그게 어떻게 보면 고립될 수도 있는 시골살이의 조건인 것 같네요.   모자반 : 그 일이 있기 전인데, 제가 핸드폰을 버스에 두고 내렸어요. 그때 집에 인터넷 연결이 안 돼 있었고 핸드폰 테더링으로 인터넷을 쓰고 있었거든요. 주변에 아는 사람이 그 남자 이웃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우리집 맞은편에 편의점이 있었거든요. 거기 알바 직원한테 전화기를 빌려서 기사님이랑 통화해서 다음 날 아침에 첫차를 운전해 오실 때 받기로 했어요. 그런데 저는 그 버스 정류장까지 가려면 차로 10분을 가야 되거든요. 그날따라 그 남자 이웃도 집에 없었어요. 차 시간에 맞춰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데 핸드폰이 없으니까 알람도 없는 거예요. 결국 밤을 샜어요.   - 그 얘기를 들으니까 더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돼요.   모자반 : 그렇죠. 거기에 더해서 마을 공동체에 대한 잘못된 환상도 있었던 것 같아요. 도시에서 딱 현관문 닫으면 혼자만 있을 수 있는 공간에 있다가, 공동체에 대한 판타지만 갖고 ‘아, 그래 뭐든 나눌 수 있는 게 이웃이지’ 이런 마음이었어요. 나의 기준이 없었던 것 같아요.     직접 상대를 두고 몸으로 해보는 훈련은 참가자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준다.
(제주 여민회 2030위원회 제공)     눈깜 : 저는 올해 작은 텃밭을 하게 됐는데 이성애 커플이랑 같이 하게 됐어요. 며칠 전에 같이 작업을 하는데, 내가 사는 곳은 아파트지만 텃밭은 옆집이랑 따닥따닥 붙어 있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 안에 있거든요. 옆집 할머니가 처음에는 담장 너머에서 뭐라고 하시다가 아예 담장 안으로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텃밭에 대해 뭐라 뭐라 하시는데, 이성애 커플 친구들은 “네, 네.”하고 그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하더라고요. 하지만 저와 파트너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대응도, 대꾸도 안 하고 거리를 딱 둔 거죠. 이게 인성이 나빠서가 아니라, 이렇게 됐을 때 점점 더 치고 들어올 것이라는 예상이 있는 거죠. 그랬을 때 “우리는 자매다.
”라고 또 거짓말을 하거나 아니면 얼버무리거나... 이런 상황이 내 삶에서 반복되는 게 되게 피로한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싸가지 없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거리를 두게 되는 것 같아요.   - 이경 님은 제주 와서 6년간 칩거하다가 이제 좀 깊숙이 들어가기 시작한 지 2년 정도 됐다고 하셨는데, 깊숙이 들어간다는 게 어느 정도이고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마을 활동도 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내가 이 마을을 성평등하게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까지 갖고 계신 건지 궁금해요.   이경 : 그냥 ‘내 집이 시골에 있다’, 이게 아니라 내가 시골에서 시골 위주로 살아간다, 집 주변에서 근거리 생활자로 살아간다, 그 마음을 가지고나서부터 마을 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내가 사는 마을 안에서 마음을 나누고 서로 돌보는 관계를 다층적으로 맺고 살아가는 게 제가 생각하는 마을 활동이에요. ‘성평등한 마을에서 살고 싶다’ 이런 것보다 내가 존중받고 안전하게, 평범하게 살 수 있는 그런 마을이었으면 좋겠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 발생할까’, 관계를 맺을 때 느껴야 하는 큰 긴장감 없이 지내고 싶다.
그게 어떤 언어로 쓰면은 ‘성평등한 마을’일 수 있는데, 저는 그냥 제가 편안하게 살고 싶은 것 같아요.   눈깜 : 저도 똑같이 안전을 바라는데, 저는 경계를 세움으로써, 또 안전한 사람들만 만남으로써 안전을 도모하는 거고요. 이경 님은 그야말로 진짜 내 주변을 안전하게 만들려고,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마을 활동을 하시려는 거네요.   - 각자 다른 방식으로 자기 경계를 설정하며 살고 계신 것 같아요. 한나 님은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적절한 기준을 세우고 싶어서 ‘일상 대응력 향상 훈련’에 참여하셨다고 했는데, 훈련 과정에서 인상 깊게 남은 건 무엇이었나요?   권한나 : 저는 거절하는 방법을 배우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거절의 언어가 될 수 있다’라는 말이 되게 와닿았어요. 말을 한 템포 늦게 하는 거, 아니면 “음~”이라고 하면서 고민하는 듯한 제스처가 거절의 사인이 될 수 있다는 게 새로웠던 것 같아요.   - 많은 경우 그런 침묵을 견디기 힘들어 하잖아요.   권한나 : 네. 거절이 분명히 필요한데 ‘좋은 사람’ 프레임도 좀 있고, 나 역시도 얘랑 껄끄러운 게 싫고, 찰나의 어색함이 너무나 싫으니까 거절도 못 하고 얼렁뚱땅 그냥 하게 되는 것들이 있잖아요. 그런 걸 견딜 수 있는 용기나 ‘얘랑 껄끄러워져도 상관없다’라는 식의 생각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경 : 저는 강사님이 “내 몸과 마음의 상황을 점검하는 일이 내 일상을 지키는 일이다”라고 7~8주차 내내 강조를 하셨는데 그게 가장 크게 다가왔어요. 그때그때 자기 몸과 마음의 컨디션을 체크하는 것이 긴 시간에 걸쳐서 쌓이면, 갑작스럽게 어떤 상황이 발생할 때 ‘나 지금 이거 대응할 수 있을 것 같아’, ‘내 컨디션으로 이거는 오늘 안 돼. 나중에 대화로 풀어야겠다’ 이런 다양한 선택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하셨거든요. 그게 제 일상을 저 스스로에게 부담스럽지 않게 운영하는 기술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그리고 타격이 필요한 순간이 제 삶에서 빈번하게 일어나지는 않으니까, 타격을 배워서 그거를 실제로 써 본다기보다는, 타격 기본 자세를 배우면서 골반을 굽히고 이동했을 때, 무릎을 이렇게 해봤을 때 말도 안 되게 편안한 걸 알게 된 거예요. 내 몸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더라고요.   또 한 가지는 제가 언어를 많이 쓰는 사람이다 보니까 나름 언어 훈련을 해 왔는데, 기존에는 언어 전달력이나 딕션 이런 훈련 위주였거든요. 그런데 ‘일상 대응력 훈련’에서 목소리 훈련을 하면서는 목소리 높낮이, 말을 할 때의 제스쳐, 눈빛, 기세 이런 비언어가 되게 많이 영향을 끼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이제는 이런 것의 레벨을 조절하면서 좀 더 풍성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지난 2월부터 제주 곳곳에서 진행된 ‘일상 대응력 향상 훈련’ (제주 여민회 2030위원회 제공)     눈깜 : 강사님이 매번 스스로 컨디션 체크하게 하고 지금 내 상태와 욕구에 기반해서 행동하라고 하시잖아요. 나눔을 할 때에도 “왠지 말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에 하지 말고 지금 내 상태와 욕구에 맞춰서 하라”고 강조하시는데요. 저는 제 욕구를 잘 알아차린다고 생각했거든요. 명상으로 알아차림 훈련도 하고 글쓰기도 하면서. 그런데 그런 방식으로 하는 거랑 직접 상대를 두고 몸으로 하는 건 되게 다르더라고요.   수업 시간에 자신에게 적절한 바운더리(경계) 거리를 찾으면서 상대한테 “어떻게 다가와 주세요.”라고 요청을 하잖아요. 그런데 제가 상대에게 내 욕구를 디테일하게 말하지 않더라고요. “좀 빠르게 걸어와 주세요.” 이렇게 대충 말하는 거예요. 그러면 막상 상대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그 다음에는 아주 디테일하게 “시선은 어떻게 해 주시고, 속도는 어떻게, 걸음걸이는 어떻게 해 주시고요.”라고 말하게 됐어요. ‘아, 내가 평소에 내 욕구를 이렇게 디테일하게 알아차리거나 디테일하게 말하지 않는 구나. 그래놓고 상대가 해 주지 않는다고 억울해했구나’ 깨달았어요. 몸으로, 말로 해보니까 딱 되더라고요.   그리고 저는 제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맞닥뜨리면 눈에 뵈는 게 없을 때가 있어요.(웃음) 주변 상황도 고려하지 않고 일단 ‘저걸 바로잡아야 된다’는 생각에 좀 위험한 상황에서도 들이받을 때가 있거든요. 그렇게 하지 못하면 ‘바로잡지 못한 무력한 사람’이라고 자책을 하고요. 수업을 들으면서 ‘아, 내 컨디션에 맞춰서 해야 하는구나. 내가 컨디션이 안 좋고 주변에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면 실행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다’는 걸 배웠잖아요. 그 후로는 바로잡지 못했을 때 ‘난 무기력한 사람’이 아니라 ‘난 할 수 있지만 오늘 나의 컨디션, 주변에 적절한 도움을 구할 수 없는 조건을 고려해서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 것’이라고 평가하게 됐어요. 둘은 되게 다른 것 같아요.   모자반 : 신율 강사님이 “내가 거절을 했을 때 상대방이 좀 서운할 수도 있지만, 그거는 내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것이다”라는 얘기를 했을 때 와 닿았어요. 반대로 누군가 제 요청을 거절했을 때 내가 느끼는 서운함은 나의 것이고, 단지 ‘그 사람이 원하지 않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 것. ‘저 사람이 왜 거절했을까, 다른 게 있는 건 아닌가’ 하면서 계속 더 들어가다 보면 점점 마음이 상하고 멀어지잖아요. 그걸 무서워해서 저도 사실은 거절을 잘 못하는 거고요. 그러다 보니까 자꾸 이상한 일에 휘말려서 상처받고, 그러면 딱 벽을 쳐버리고 결국 단절되고… 거절을 잘 하고 또 잘 받아들이게 되면 마을살이나 타인과 연결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 프로그램에 참여한 후에 일상에서 좀 달라진 점이 있나요?   이경 : 제 경계가 굉장히 낮은 편인 것 같아요. 상대에게 다가갈 때도 성큼성큼, 이 사람이 원하는 (나와의) 거리가 내가 원하는 거리랑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었어요. 훈련을 하면서 나는 좀 자동적이거나 공격적인 성향이 있는 사람이고, 그래서 자기 바운더리를 강하게 지키고 싶은 사람한테는 내가 편안한 존재가 아닐 수 있다고, 저를 재인식하게 됐어요. 일상에서 ‘아니야, 지금 여기서는 입을 다물자. 아니야, 그냥 웃고만 있자. 먼저 다가가지 말자.’ 이런 생각을 하면서 계속 연습하고 있어요.   권한나 : 저는 ‘일상 대응력 훈련’을 하고 집에 가서 남편과 딸과 호신술 연습을 하는 시간도 가져본 적이 있어요. (다같이 “오~”) 딸이 지금 1학년인데요, 요즘 아이들 노는 거 보면 거절을 진짜 잘해요. 딸이 자기 친구랑 노는데 친구가 자기 장난감을 만져도 되냐고 물었어요. “싫어, 안 돼.” 이러더라고요. 그러고도 그냥 노는 거예요. 나중에 집에 와서 제가 훈수를 둔 거죠. “장난감 망가지는 것도 아닌데 그냥 빌려주면 안 돼? 왜 꼭 그렇게 매몰차게 해?”라고요. 분명히 내 딸이 싫을 수 있는 거고, 싫은데도 “알았어.”라고 얘기하다 보면 나중에 큰 거절을 못 하는 아이가 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나는 그게 너무 야박한 것 같고 그 친구를 잃을 것 같고 친구가 기분 나빠할 것 같고… 이런 생각 때문에 나도 모르게 딸아이한테 내 생각을 심어주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아, 이런 말도 하지 말아야겠구나.   모자반 : 저는 훈련 시간이 좀 더 있었으면 좋겠어서, 그리고 배운 걸 일상에서 자주 떠올리고 활용하고 싶어서, 다시 한번 불을 지피는 매개로 재수강을 선택했습니다.
(다같이 웃음)   눈깜 : 요새 일주일에 한 번씩 서울 가서 수업할 일이 있어서 비행기도 타고 고속버스도 타는데, 꼭 한 명씩 이어폰 안 끼고 영상 보는 남자들이 있어요. 예전 같으면 속을 끓이면서 참다가 화를 내거나, 뒤에서 욕하면서 째려봤을 거예요. 이번에는 그 상황을 인지했을 때 그냥 바로 “이어폰 끼고 들으세요”, “바깥에 다 들려요.”라고 담담하게 말했어요. 담백하게 말하니까 상대는 대부분 몰랐다는 식으로 당황하면서 “아이고 그래요?”, “미안합니다.
” 이러더라고요. 아마 제가 화를 냈다면 상대도 방어적으로 나왔겠죠. ‘아, 나의 욕구를 빠르게 인지하고, 내가 감정이 쌓여서 폭발하기 전에 담백하게 대응하는 게 문제 해결에 좋구나’ 생각했어요. ‘일상 대응력 훈련’에서 직접 목소리 내 보고 몸으로 대응해 보면서 자신감이 생겼잖아요. 그 힘으로 일상에서 문제를 해결하면서 효능감을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 소중한 얘기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   [필자 소개] 나랑 . 독립 인터뷰어. 치유적 글쓰기 안내자. 전 〈일다〉 기자. 지금은 제주에 살고 있다.
인스타그램 @orot_writing
‘비포 앤 애프터’, 일상 대응력 훈련이 바꾼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