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은 피부색이 아니다: 스튜어트 홀의 인종, 종족성, 민족 이론 강의』
왼쪽부터 소냐 보이스, 스튜어트 홀, 아이작 줄리언(1992) ©라일 애쉬튼 해리스 엑타크롬 아카이브 (New York Mix), 2017    
작년 말에 번역되어 출간된 『인종은 피부색이 아니다』는 1994년 하버드대학교 아프리카·아프리카계 미국인 연구소가 주최한 듀보이스 강연에서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의 강의록을 엮은 것이다.
2014년 홀은 타계했고 이 책은 2017년에 미국에서 출간되었으니, 그의 후기 사유에서 가장 가까운 기록이기도 하다.
  이 기획 강연이 ‘듀보이스’ 강연 시리즈의 일부였다는 점은 중요하다.
사회학자이자 흑인 인권운동가인 W.E.B 듀보이스는 하버드대에서 흑인 최초로 박사 학위를 받은 연구자로, 이 강연은 듀보이스의 정신을 이어받아 그의 학문적 여정을 확장하는 취지로 기획되었다.
강연에 초청된 수많은 연사들 중 한 명이었던 홀은 이곳에서 문화적 차이가 담론화되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를 자신의 정체성과 경험에 의거해 풀어냈다.
  인종은 피부색이 (아니)다   스튜어트 홀은 문화연구, 신문방송학, 커뮤니케이션학 분야에서 중요한 학자이며, 수많은 연구자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 전방위적 활동가였다.
미디어 문화 연구자로서 홀은 영국 사회에서 계급, 노동, 헤게모니, 이데올로기, 국가의 문제에 관한 수많은 연구를 남겼다.
특히 본인의 흑인이자 자메이카 출신 영국 유학생으로서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으며, 후기에는 인종과 정체성, 재현의 문제에 깊이 천착했다.
  무엇보다 198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흑인 예술가들의 새로운 시도와 재현 방식에 적극적으로 관여(전시 서문 작성, 비평 글 작성, 작업 과정에서 토론)하고 지지하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이력은 학계와 예술계와 사회운동 사이에 존재해야 할 비평적 실천의 중요한 선례로 남아있다.
『인종은 피부색이 아니다』는 홀이 한창 정체성과 재현에 몰두하던 시기의 사유를 목소리로 생생하게 전달한다.
  이 책에서 홀은 반복해서 인종은 ‘담론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담론적 작동을 통해서 인종은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세상을 특정한 부류로 파악하고, 명료한 이해의 질서를 구축하고, 인간 실천을 그 범주 내에서 조직하며, 이에 따라 실제 효과를 얻게 된다.
” -『인종은 피부색이 아니다』 p.94   그러면서도 인종은 결코 ‘담론의 효과’라고 단순히 결론 내릴 수 없는 어려운 문제라는 점도 강조한다.
사실 인간의 특정 이미지와 특정 정체성을 강력하게 접속시키는 오래된 등가 체제는 ‘인종은 피부색이다’라는 목소리를 끊임없이 불러낸다.
문화적으로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관습이나 편견들도 있지만, ‘정체성의 정치’나 근본주의를 정치와 재현의 영역에서 적극 활용하는 움직임들도 그러한 재현과 담론의 틀을 유지하게 한다.
  인종을 생물학적 특성으로써 판단하지 않으려고 해도, 눈으로 보이는 것(피부색, 모발, 골격 등)에서 지각되는 차이를 차별로 연결하지 않으려면, 스스로 그 등가 체제를 단절시키고 새로운 의미와 연결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인종은 피부색이 아니다’라는 문장은 늘 ‘인종은 피부색이다’라는 문장을 삭제 표시한 채로 작동해 왔다.
이때 ‘삭제 표시한 채’로 읽히는 문자에 관한 홀의 사유는 자크 데리다의 영향을 받아, 의미가 확고하게 고정된 채로도 완전히 유동하는 것도 아닌 ‘국면적 특수성’으로서 사유할 것을 강조한다.
지워지지 않고 선명한 흔적으로 남아 작동하는 ‘생물학적 기표’로서 인종의 존재를 인지하는 것은, 우리가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일상의 시각문화를 예리하게 감각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인종은 피부색이 아니다: 스튜어트 홀의 인종, 종족성, 민족 이론 강의』(스튜어트 홀 저, 코베나 머서 편, 임영호 역, 컬처룩, 2024) ©전솔비       흑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긍정적 이미지로 전복하는 재현의 한계   책의 부제는 ‘인종, 종족성, 민족’에 대한 강의를 예고하지만, 각각의 개념적 정의를 내리며 설명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지는 않다.
원서의 부제가 ‘숙명적인 삼각 구도(The Fateful Triangle)’인 것에서 알 수 있듯, 인종, 종족성, 민족은 관계적인 개념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홀의 요지이다.
  홀이 인종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는 시작과 끝은 ‘인종은 미끄러지는 기표’라는 점이다.
코베나 머서에 따르면, 홀은 “담론의 물질성”에 세밀하게 주목하는데 이는 기표(글자나 그림과 같은 표면 형태)와 기의(기표가 암시하는 개념) 사이의 상관관계를 설정하려면 “의미 마감의 계기는 반드시 발생해야 한다.
”는 것이다.
(p.220) 홀은 ⌜최소한의 자아」라는 제목의 글에서, 사회 변혁을 시도하고 새로운 주체를 구축하기 위해 요구해 온 모든 사회운동은 마감의 자의성을 인정해야만 하며, 이러한 마감은 결말은 아니지만 정치와 정체성을 가능하게 해준다고 말한 바 있다.
(p.221)   홀은 흑인 인권운동가나 예술가들의 재현과 정치에서, 기존의 인종 담론체제 내 흑인에 관한 부정적인 기표의 가치를 긍정적인 것으로 역전시키는 운동이 있었지만, 그것은 근본주의적 정체성의 정치 패러다임을 똑같은 모습으로 남겨두었다고 비판한다.
생물학적 인종 개념에서 탈피하려면, “본질적인 흑인 주체라는 무고한 개념의 종말”이 필수적이라고 홀은 여러 글에서 강조했다.
(p.86) 난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인종이 미끄러지는 기표로서 다강조성을 지닌다는 사실은, 흑인 경험이 포함하게 될 정체성의 다양성을 제한할 방도가 없음”(p.89)을 뜻하기 때문이다.
  인종이 문화적 차이의 담론에서 생겨난 하나의 변종에 불과하다고 보게 되면, 인종은 다른 차이 담론 구성체와 새로운 관련을 맺을 수 있다.
그렇게 인종을 대체할 개념으로 새로 등장한 것이 ‘종족성’이다.
하지만 인종이 생물학적 요소에 근거를 두고 문화적 요소를 향해 미끄러지는 데 비해, 종족성은 “오로지 문화에, 즉 공유된 언어, 구체적인 관습, 전통, 신념에 근거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특히 상식적인 친족 개념을 통해 공통의 혈통, 상속, 조상 등에서의 초문화적 그리고 심지어 초월적 고착화를 향해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p.123) 폐쇄적 개념의 종족성이 종족의 의미를 불변의 의미로 고착시키고, 땅과 피와 같은 또 다른 기원에 대한 환기를 불러내기 때문이다.
  국가와 민족에 얽매이지 않는 디아스포라 정체감, ‘새로운 종족성’   홀은 개방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종족성’을 통해, 근원이나 기원, 순수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끊임없이 담론적으로 미끄러지며 점차 ‘고향 상실’ 상태가 되어버리는 디아스포라의 새로운 일체감을 제시한다.
이는 국가와 인종으로 종족성을 연결하는 지배적 개념이 아니라 변방, 주변부의 차이와 다양성을 기반으로 하기에 유동성과 재위치화에 열려있다.
  홀은 현대 사회에서 ‘민족’은 강력한 문화적 정치적 원천이었다고 언급한다.
자본주의는 출발부터 초국가적 흐름을 통해 작동했음에도, 근대 서구의 국민 국가는 ‘민족 문화’라는 상상적 공동체를 통해 강력하게 지속되었다.
이는 단일한 고유 언어를 보편화하고, 근대 이전에는 부족, 인민, 종교, 지역에 투입되던 충성심과 정체성 규정이 민족 문화로 이전하게 된 것이다.
홀은 민족이라는 것이 그냥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형성’되며, “민족 정체성은 태생적인 속성이 아니라 담론과 다른 재현 체제 내부에서 형성되고 변형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p.155) 민족 문화는 집단 정체성을 구축하는 양식에선 담론과 비슷한 성격을 띠며, “정치적 요소와 문화적 요소 간의 완벽한 일치는, 만약 가능하다면, 오직 지속적인 재현 과정을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다.
”(p.164)   오늘날 초국가적인 흐름 속에서 하나의 맥락에서 다른 맥락으로 이동하는 주체들의 이질적인 위치 감각과 혼종적인 문화는 ‘디아스포라적 삶’으로 수렴되는 듯하다.
이는 기원 혹은 뿌리를 상실했다는 감각에 멈추지 않고, 문화 간 경로를 재설정하는 네트워크를 만들며 그 흔적들의 복수성을 수용한다.
  권력과 저항이 시각화되는 순간을 계속해서 말하기   스튜어트 홀의 연설 모습 ©〈스튜어트 홀 프로젝트〉(존 아캄프라, 2013)     담론은 구성되는 것이고 담론적 실천에 참여하며 의미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홀의 목소리는 얼핏 낙관적인 이론가의 태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책의 해제를 쓴 영국의 예술사학자이자 시각 예술 비평가 코베나 머서는 홀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학자로, 흑인 예술가들의 작업과 흑인 디아스포라 예술을 탐구했기에, 홀의 강조점이 갖는 의미를 탁월하게 발견하고 있다.
코베나 머서는 홀이 자신의 삶 후반기에 예술가들과 폭넓은 교류를 하며 예술 작업에 관심을 두고 비평적 통찰을 다시 자신의 이론과 사유를 수정하는 데 사용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아마 그 이유는 타자성과 차이에 가해지는 폭력에서 뒤따르는 공포와 환상이 담론으로 옮겨지고 발언권을 얻게 되는 한 가지 문화 영역이 바로 예술이기 때문이다.
(p.232)   예술은 “가시적인 대안적 재접합을 도출하기 위해” 일상을 해체하고, 현실을 바라보는 ‘우회로’를 제시한다.
(p.233) 코베나 머서가 보기에 홀의 낙관론적 출처 중 하나는, 언어로 다 옮겨지지 않는 것들을 한계가 아닌 가능성으로 보는 곳, 우리의 대화를 개방적이고 상호 의존적 상태로 유지될 수 있도록 해주는 시각 문화의 영역일지 모른다.
  이 책은 ‘인종은 피부색이 아니다’라는 제목과 함께 정면을 응시하는 홀의 얼굴을 표지에 사용했다.
홀은 라디오와 텔레비전에 자신의 목소리와 얼굴을 자주 비추며, 당시 마거릿 대처의 정치로 극우화되고 있던 영국 사회에서 문화적 차이의 담론들에 대해 끊임없이 발언했다.
미디어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경계하지만, 미디어의 영향력 또한 잘 알고 있던 홀은 흑인이자 이민자였던 자신의 모습을 스크린에 전면적으로 드러내고 목소리를 내면서 발언의 위치성을 점유하고 그 자리를 시청자와 공유했다.
이것은 영국 내의 방송과 일상에서 유색인종 지식인의 ‘의외의 등장’이었기에, 훗날 홀과 작업적으로 교류하게 될 흑인 예술가들은 어릴 적 자신이 대중매체에서 마주한 ‘자신과 같은’ 얼굴의 기억을 강렬하게 회상하기도 한다.
  스튜어트 홀은 정체성에 대한 논쟁과 사회적 이슈를 대중에게 번역 가능한 독보적인 구술자였으며, 인종주의에 대해 비판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전달자, 소통자, 방송인 등으로 지칭 가능한 공적 지식인이었다.
자신의 상징성을 매체를 통해 드러내었던 홀의 모습에 대해, 문화 이론가 안젤라 맥로비는 ‘홀이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 출연하면 발언자의 인격이나 명성이 아니라, 논의하고 있는 바로 그 주제가 부각된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책의 표지 이미지 또한 숙명적인 삼각관계처럼 역사 속에서 뒤엉킨 채 끊임없이 등장해 온 문화적 차이와 정체성 담론에 대해 멈추지 않고 발언해 온 홀의 삶과 경험을 함께 전달하고자 하는 잘 기획된 시각문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연초부터 이 책을 항상 책상에 올려두고 홀의 얼굴을 바라보곤 했다.
연말 연초의 어수선한 시간 동안, 윤석열이 계엄령을 선포하며 주장한 중국의 선거 개입설은 빠른 속도로 국내 조선족, 고려인들을 포함해 다국적 이주민들을 향한 혐오로 퍼져나갔다.
광장에서는 윤 지지자들이 홍콩의 취재기자를 둘러싸고 위협하기도 했으며, 거리에는 극우주의자들에 의해 ‘중국 유학생은 잠재적 간첩’이라는 현수막이 걸리기도 했다.
이렇게 특정 사람들에 대한 혐오가 빠르게 퍼져나간 것은 경제침체로 인한 과도한 피해의식과 경쟁의 분위기 속에서 ‘차이’의 감각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시대적 상황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무엇보다 일상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었던 특정 종족에 대한 편견과 잘못된 정보가 얼마나 넓게 퍼져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역사 속 수많은 사례가 가리키듯, 이렇게 특정 종족을 과녁 삼아 대중을 선동할 때 어떤 결집력이 발생하는지 극우주의자들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웃고 넘어갔던 영화의 한 장면, 드라마의 한 장면들이 쌓이고 쌓여 그러한 혐오와 차별의 물결에 힘을 실어준 것 아닐까. 무섭게 실감나는 이 현실을 감각하며, 한국이라는 익숙한 장소가 품고 있던 뿌리 깊은 민족주의와 인종주의, 그리고 자문화중심주의로서의 ‘종족성’을 목격한다.
그것이 얼마나 타인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해로운 사유인지는 특정 시각문화의 한계로 역사에 기록되겠지만, 그것을 반성하게 하고 새로운 시각을 만들어주는 것 또한 시각문화의 잠재성일 것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이주하는 사람들의 흐름이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일상화된 이 시대에 인종, 계급, 노동, 젠더가 뒤섞여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시각문화는 이 세계에 어떤 책임을 질 수 있을까.   이 책의 추천사에서 탈식민 이론가 호미 바바는 “스튜어트 홀의 저작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문화와 정치란 ‘보장 없는’ 실천이라는 믿음이 아로새겨져 있다.
”고 말한다.
홀은 현실과 이론의 접합을 늘 고민하며 목소리 내기를 멈추지 않았다.
무언가를 보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기에, 우리를 분열시키고 또 함께하게 하는 시각성의 문제에 대해 더 많이 말해야 한다.
현수막 뒤의 얼굴에 대해, 그들이 상상하는 타자의 얼굴에 대해, 두 얼굴이 마주하는 차이의 공간을 향해, 끊임없이 소통해야만 하는 세계에 대해, 권력과 저항이 시각화되는 순간에 대해 계속해서 말하는 것만이 우리를 좀 더 나은 상상력으로 이끌 것이다.
  [필자 소개] 전솔비 . 시각문화 연구자. 정체성과 수행성의 문제를 연구하며 전시와 책을 만들어왔다.
동시대 현장에서 생산되는 이미지의 정치성과 예술적 실천을 탐구하며 예술가, 연구자, 활동가 동료들과 여러 협업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난민캠프라는 현장을 만나며 〈연약한 기록들의 춤〉(신촌문화발전소, 2022), 〈캠프 사운드 커뮤니티〉(웹사이트, 2023)를 함께 만들고, 『춤추고 싶은데 집이 너무 좁아서』(파시클, 2024)라는 책을 함께 썼다.
‘인종’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의심해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