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밖 인터뷰② 「친족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의 불/가능성」 연구자 정
자신을 말하기 위해 많은 공부를 했던 ‘정’. 정은 「친족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의 불/가능성」이라는 논문으로 2025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자문화기술지라는 질적연구 방법을 활용하여 1년간 자신의 기억과 사투를 벌이며 완성한 논문이다.
(정 제공)
필자는 2년간의 여성학 공부를 통해 나의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 그리고 몸에 대해 탐색하는 경험을 했다.
이 시간을 통해 나의 성폭력 피해가 개인의 경험으로 치부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리고, 부모님에 대한 나의 인식과 태도가 가부장제 체제에 길들여진 ‘첫째 그리고 딸’이라는 젠더 역할로 수행되고 있음을 직면했다.
그렇게 나와 마주하는 시간이 많았음에도, 나를 들여다보고 나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여성의 삶을 좀 더 세밀하게 들여다보며 그 여성을 둘러싼 환경과 구조를 찬찬히 분석해보는 힘이 있었다면, 어쩌면 나의 첫 번째 논문도 나로부터 출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정’의 연구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정이 겪은 친족 성폭력을 스스로 들춰내면서 그 사실을 학술적으로 그리고 구조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감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정을 인터뷰하기 위해 정의 논문 「친족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의 불/가능성」을 읽고 또 읽었다.
간간이 나의 성폭력 피해 시공간 속으로 들어가 허우적대기도 했지만, 정이 선택한 ‘자문화기술지’ 연구방법론에 매료되어 ‘나를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 나를 세상에 어떻게 말할 것인가?’ 고민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지난 2월 졸업식 이후, 두 달 만에 정을 만났다.
정의 외양은 그대로였다.
쾌활했고 씩씩했다.
따뜻한 커피와 우롱차를 가운데 두고서 서로의 안부를 묻는 걸 시작으로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서로의 말에 울컥했고 서로의 말에 감동했다.
[연구 소개] 「친족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의 불/가능성」이라는 논문으로 ‘정’은 2025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자문화기술지라는 질적연구 방법을 활용하여 1년간 자신의 기억과 사투를 벌이며 논문을 완성하였다.
이 연구는 페미니스트 질적 연구와 자문화기술지 연구 방법에 기반하여 연구자의 친족 성폭력 경험을 재구성하였다.
연구자의 생존 경험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성찰, 여성주의 언어의 발굴과 해석은 말하기를 어려워하는 친족 성폭력 생존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정’의 애쓰는 마음이 초록에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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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여성학 공부를 하고 1학기 말 정도 되니깐 내가 여기 왜 왔는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숙제가 뭘까? 나는 왜 가족에 집중되어 있고, 계속해서 불안함이 올라오면서 힘들어하는 이유는 뭘까? 고민했어요. 친족 성폭력 피해가 파편처럼 어느 순간에 훅 올라갔다 내려가고, 그럴 때마다 너무 힘들었구나. 우리 둘째가 경험한 성추행을 10년이 지난 뒤에야 어렵게 이야기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나도 이야기를 못 하고, 그 아이도 왜 이야기를 못 했을까? 이어지는 생각으로, 이제 내 이야기를 써 봐도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거죠..
국내 논문을 찾아보니깐 대부분 친족 성폭력에 관한 논문이 ‘인터뷰’인 거예요. 당사자가 학문적 언어로 쓴 논문은 못 찾겠더라구요. 외국 논문은 있을 수 있겠지만 제가 찾지 못했고, 국내 논문에서 검색해 본 결과 당사자가 논문 형식을 빌어 자신의 언어로 쓴 이야기가 없었어요. 힘들겠지? 그래도 써 보고 싶다.
혹시 알아? 누군가가 발을 들여놓으면 다른 사람이 또 이 연구를 할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더라구요..”
〈페미니스트 질적 연구자인 이나영(2018)은 여성의 경험에서 세상을 보려는 페미니스트 연구는 결과적으로 ‘여성을 위한’ 연구로써 이해받지 못하는 여성의 체험, 비난받는 여성의 행동, 피해자인데 오히려 낙인이 찍히고 2차 가해를 당하는 여성의 경험을 재해석하고 이들의 목소리에 권한을 부여하는 연구, 궁극적으로 여성을 사회의 주체로 자리하게 하는 연구가 여성을 위한 연구라 정의한다.
〉 -『문화사회학의 관점으로 본 질적연구 방법론』, 최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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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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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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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엮음(2018), 휴머니스트, 1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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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족 성폭력에 관해 당사자의 이야기를 학술적인 언어로 쓰기 위해, 정은 자문화기술지라는 방법론을 선택했겠군요. 질적연구방법론의 하나인 자문화기술지에 대해서 설명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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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화기술지는 내 이야기를 쓰는 것이지만 나의 이야기인 것만은 아닌 거예요. 나는 내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은 얘기하지 못하고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인 거죠. 우리 여성들은 너무 큰 힘에 눌려서 구름 떠다니듯이 살다가 날아가 버리는, 그러니깐 우리의 얘기가 나오지 않는 거예요. 여성주의로 인해서 여성들의 이야기가 그나마 나온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자문화기술지를 쓰기는 했지만 좁은 시선으로 연구를 했고, 어쩌면 할 수 있는 게 그거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내가 이런 아픔이 있는 게 내 안의 문제라고 생각했었는데 공부를 하다 보니 이것은 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구조의 문제이고, 사회・문화적인 문제로 객관화가 될 수 있는 부분이 생겼어요.
처음에 글을 쓰는 것 자체를 어려워하니깐 교수님 한 분이 ‘그냥 쏟아붓고 써라. 말이 되든 안 되든 네 울분을 표해라. 객관적인 거리두기 할 필요 없이 그냥 써 봐라’고 조언을 해주셨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에세이처럼 작성했는데, 그 과정이 필요했던 거예요. 많은 힘이 되었거든요. 그 과정이 지나야 나의 이야기를 어떤 이론과 접목해서 분석할 수 있는지 연구에 대한 시선이 생기더라구요. 미흡하지만 아주 조금 구조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생긴 것 같아요.”
〈자문화기술지는 개인적인 삶의 이야기를 탐구하는 질적연구방법론의 하나이다.
개인적인 이야기라 하지만 단순한 기억에 머물지 않고 편지, 메모, 회의록, 이메일처럼 증거자료를 제시해야 한다.
이러한 수집된 증거자료들을 정리하고 목록화하면서 과거의 사건이나 경험을 다시 떠올리고 연구 주제를 다듬어가게 된다.
이렇게 자서전적 글쓰기에 기초한 자문화기술지는 연구 결과에 포함된 이론과 주제가 다른 상황에서도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끊임없이 점검하는 연구 과정이다.
그래서 연구에 대한 타당도와 신뢰도를 확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 -『질적연구: 열다섯 가지 접근』, 김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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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철(2017),아카데미프레스, 311쪽
정 역시 과거의 기억과 증거자료들 속에서 자신을 마주하는 시간을 가졌다.
혹독했던 순간들이 많았지만, 정은 엉덩이 힘을 빌려 끝까지 연구를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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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힘든 과정이 쌓여 스스로 확장할 수 있는 힘이 생겼나봐요. ‘이 자문화기술지는 연구자에게 힘을 만들어주는구나’하는 생각에, 매력적인 연구방법이라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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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도 ‘정’이 말할 수 있도록 지지해준 존재들이다.
(정 제공)
“엄청 많이 울어요. 내가 써놓은 것을 보잖아요? 그냥 눈물이 뚝뚝뚝 떨어지는 거예요. 지금 생각해도 잘 쓴 글도 아닌데 왜 그렇게 눈물을 흘렸는지…. 그래도 그런 것 같아요. 내가 쓴 글로 나를 치유하는 것. 그래 고생했다.
너한테 이런 일이 있었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러면서 세상에 외치는 거예요. 불특정 다수인 누군가가 문제 제기하듯이 세상에 대고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쓰면서 힘들었어요. 문제를 제기하고 글을 쓰고 객관화하고자 노력하면서도 어떻게 객관화하는 것인지 개념 자체가 없어서 어려웠어요. 자문화기술지는 내 이야기를 에세이 쓰듯이 쓰는 게 아니라, 나에게 일어난 일이 정말 사실인데 이것에 대해 증거를 찾아서 보여줘야 한다는 것, 이게 진짜 힘들더라구요. 왜냐하면 그에 맞는 이론을 알아야되니까. 어떤 이론을 접목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더라고요. 저는 서발턴(하위 주체)에 그냥 꽂혔어요. 그래서 서발턴과 나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할 수 있었어요.”
인도 여성 철학자인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1988)라는 글을 통해,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목소리를 빼앗긴 사람들 즉, 서발턴(subaltern)은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 어렵다고 지적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정의라는 이름으로 대신 말하거나, 서발턴의 목소리를 제대로 세상이 들어주지 않거나, 서발턴의 목소리를 힘 있는 사람들이 자기 방식대로 해석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서발턴인 정은, 말하기를 하고 있었다.
세상이 정의 말하기에 귀기울여 들어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정은 친족 성폭력을 당한 지인에게 논문을 보여줬다.
지인은 논문을 통해 “우울함이 순간순간 올라오면서 설명하지 못하는 감정의 기복이 끝없이 생기는” 자신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자신의 삶을 정리하며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지인의 이야기는 논문을 끝내고 자기만의 방에 갇혀 있던 정을 일으켰다.
“어떤 사람이 나의 논문을 통해 ‘나도 괜찮겠구나’, ‘이렇게 공식적으로 얘기해도 되겠구나’ 하는 힘이 생긴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대학원 졸업을 하고서 여러 상황으로 인해 동굴을 파고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분 덕분에 제가 나올 수 있었어요. 어쩌면 이게 연대겠다, 하는 생각을 그때 했던 것 같아요. 감사한 일이죠. 평가에 대한 두려움도 좀 있었거든요. 그러면서 내가 논문을 쓰고자 했던 목적이 이거구나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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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을 쓰는 과정에서도 말씀하신 연대의 순간들이 있었나요?
“우선 ‘내가 왜 이거를 쓰고 싶은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나와의 연대가 필요해요. 자신을 많이 다독거려야 하는 거죠. 그래야 끝까지 갈 수 있어요. 그러면서 중간에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나를 이해해 주는 동료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저의 논문은 저 혼자서 쓴 것이 아니에요. 동기들하고 같이 썼어요. 동기들이 읽어주고 피드백 해주고 교수님들이 관심 가져 주고 피드백해 주고, 그런 부분들이 없었으면 쓰기 어려웠을 거예요.
정말 고마웠던 것은 본격적으로 논문 쓰는 것을 어려워하니까, 교수님 한 분이 수잔 브라이슨의 『이야기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 책을 추천해 주셔서 그 책으로 동기들과 스터디를 했어요. 성폭력 피해 당사자가 쓴 책인데,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또, 우리 첫째 딸이 교정교열을 몇 번 봐줬어요. 그리고 편지를 주더라구요.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아프다고, 그러면서 엄마에게 받았던 상처도 동시에 올라오니깐 양가감정이 들면서 힘들다고. 딸에게 이런 일을 부탁하지 말아야겠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 고맙더라구요. ‘딸이 성장해서 엄마가 하는 일에 대해 응원해 주고 있구나’, ‘내가 선택을 잘못한 건 아니구나’ 되레 응원해 주고 있고 잘하고 있다고 해주니깐 힘을 받아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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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를 마무리한 자신에게 한 마디 건넨다면?
“논문에 고등학교 때 죽겠다고 약을 먹은 적이 있었다고 했거든요. 지금도 가끔 우울함이 올라오면 내일 아침에 눈을 안 떴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많이 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죽지 않기를 잘했구나. 그때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있으니까,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그래도 말을 했구나. 고생했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죽지 않기를 잘했다.
뿌듯하다.
뭐 그런 말도 생각이 나긴 하는데, 그때 내가 죽었으면 없었겠죠. 목소리를 낸다는 것 자체를 못 했겠죠. 한 페이지를 잘 끝냈구나.”
60년 가까이 살아온 정은 논문을 끝내자, “이제서야 초등학교를 졸업했구나” 생각했다.
한 소녀가 가족이라는 견고한 울타리 안에서 태어났지만, 그 울타리는 위태로웠다.
정이 겪은 폭력은 50년이 다 되어서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것이 아님을, 정의 삶과 연구는 증명하고 있었다.
정은 스스로 살아있음을 증명했고, 살아갈 수 있다 선언했다.
정의 논문으로, 또 다른 말하기를 낳고, 또 다른 살아남음을 가능하게 하리라 믿는다.
[필자 소개] 미경
: 「‘정상가족’ 밖 퀴어 여성의 관계성과 돌봄」 논문을 썼다.
질적연구에 매료되어 연구의 재미를 알았다.
박사과정에 도전하고 싶으면서도 제도권 밖에서 연구 활동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방법을 궁리하고 있다.
친족 성폭력 생존자가 쓴 논문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