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시골에서 젠더폭력 대응력 향상 훈련을 하다①
제주에 이주하는 여성들, 귀촌 귀농하는 청년 여성들이 증가하고 있지만, 가부장적이고 폐쇄적인 문화 탓에 시골살이가 녹록지 않다.
이러한 문제 의식을 공유하며 2025년 제주여민회 주최로 젠더폭력에 대한 ‘일상 대응력 향상 훈련’을 진행했다.
참가자들이 시골살이에서 발생한 젠더폭력 경험을 나누는 모습. (제주여민회2030위원회 제공)
“저는 이 마을에 살고, 여기 친구들도 다 근처에 살아요! 저희 재롱 잘 봐주세요.
내가 선창할게. 하나, 둘, 셋! 어르신들~”
“건강하세요!”
친구들과 있는 힘껏 외치고 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경로당에 가득 앉은 어르신 80여 분이 우리 리듬에 맞춰 열심히 박수를 치며 따라오신다.
이날은 우리 마을 어버이날 기념 경로잔치하는 날. 이장님의 요청으로 여성 청년 친구들과 바투카다(브라질 타악) 공연을 했다.
하늘이 맑고 높았고, 모두의 가슴에 빨간 카네이션 브로치도 어여쁘고, 손주들 보는 것처럼 우리들을 아꼽게(소중하고 사랑스럽다는 뜻의 제주어) 여기는 분위기에 신명이 났다.
공연 직후 새마을운동회 조끼를 걸치고 식사 준비에 투입됐다.
지역봉사단과 부녀회원들이 경로당 부엌에서 대기 중이셔서, 우리는 서빙을 맡았다.
접시를 수백 개 나르다 야외에 나가 우리끼리 점심을 먹었다.
음, 오늘 눈부시다.
그러게, 일본 영화 〈리틀포레스트 2〉 결말 같은 날이야.
동네 잔칫날이 젊은 여성에겐 축제이자 ‘투쟁’일 수도…
서울에서 내 뿌리를 내 손으로 뽑아 제주에 이주한 지 11년이 됐다.
이 정도면 탈(脫)영토 성공이지. 그중에서도 시골, 즉 읍면 지역에서 8년간 살고 있다.
이 마을엔 작년에 왔는데, 무척 마음에 들어서 다양한 관계망을 적극적으로 넓히고 있다.
생존을 위해서다.
“농촌의 경우, 난방비나 교통비, 도시보다 비싼 소비재 등 예상치 못한 생활 비용이 많이 든다.
그럴 때 지역 내 관계망이 없으면 필요한 정보와 서비스를 특정인에게 의존하거나 고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따라서 이주 초기 물리적 기반 지원에 사회적 관계를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
2019년 구례다움연구회가 낸 ‘지역맞춤형 청년 이주 지원 프로그램’ 조사 보고서에서 짚은 내용이다.
경험자로서, 이게 정말 맞다! 경쟁 사회와 대인관계에서 잔뜩 치여서 시골에 이주해도 사회적 관계망은 여전히, 아니 오히려 더 중요해진다.
거기에 더해, 나처럼 자기 결정을 후회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적극적으로 자기 공간을 재영토화하고 싶어서 보이지 않는 가부장제 투쟁에 돌입하게 될 수도 있다.
경로잔치는 그런 의미에서 관계망을 넓히는 축제이자 보이지 않는 투쟁의 장이었다.
사실 앞서 설명한 잔칫날의 모든 장면이 아름답지는 않았다.
시골에서 여성들이 삶의 주도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내공을 키우고 네트워킹하기 위해, ‘일상대응력 향상 훈련’을 기획했다.
올해 2~3월에 이어 5~6월에도 진행 중이다.
제주여민회-2030위원회에서 제작한 포스터 중 일부.
우리는 젊은 여성- 즉 ‘아가씨’로 대상화되어 남성 청년들을 주선해 주시려는 호의(?), 예쁜 아가씨들이니 서빙을 해야 한다는 아슬아슬한 칭찬(?), ‘대체 어디서 온 것이냐’는 질문 50번에서 해석할 수 있는 이주자에 대한 명백한 경계와 호기심 속에서, 낯선 공간에서 알잘딱깔센(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있게) 서빙해야 하는 상황에 계속 놓였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었고, 주최자보다 손님에 가까웠으며, 대인 경험이 무척 많았고, 제주 어르신들이 이주자에게 가지는 경계심의 이유를 이해하고 있었다.
팀의 다른 한 친구와 함께 2월부터 꾸준히 ‘일상 대응력 향상 훈련’ 중이기도 하고…. 그래서 그날 나는 다양한 상황에 ‘대응’할 수 있었다.
그날은 우당탕탕 재밌는 축제로 기억될 것이다.
귀촌하는 여성 1인가구 늘고 있지만 쉽지 않은 시골살이
내 안전망은 내가 구축할 거야! 그런데 어떻게?
하지만 모든 이의 시골살이가 축제로 기억될 수 있을까? 나 또한 계속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가능성 제로,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장르는 농촌 판타지다.
지방의 여성주의 단체 ‘문화기획 달’이 2018년 6월 농촌 여성 11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를 보면, 89.5%가 ‘농촌 성문화가 불평등하다’고 응답했고, ‘차별적인 성 역할 분담’(31.6%)을 그 내용으로 가장 많이 꼽았다.
‘성희롱, 성추행 등 성폭력을 경험한 적이 있느냐’라는 질문에는 과반수인 65.5%가 ‘경험했다’고 밝혔다.
제주에서 조사한 것도 아닌데 어찌나 상황이 똑같은지. 나 또한 아직도 이런저런 사적 자리에서 나를 향한 손길(진짜 손길)을 피하느라 태극권을 자주 한다.
잔치에 일손이라도 도우러 가면 부엌 일하는 여성으로 분류돼 무조건 국수만 삶게 했다던 제주 서쪽 친구 이야기가 생각나기도 하고, 해녀학교 수업도 마치고 성게 수십 킬로를 잡아 어렵게 어촌계에 입성했는데, 젠더폭력을 포함한 해녀 집단 내 갈등 악화로 결국 지난해 제주를 떠난 친구가 떠오르기도 한다.
친구는 떠나기 전 이런 얘기를 남겼다.
“이럴 거면 그냥 받아주지 말지.”
이런 문화가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는데, 여성 귀농·귀촌인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농촌경제신문에 따르면, 여성 귀농·귀촌인은 2013년 20만 명에서 2021년에는 24만 명으로 늘었다고 한다.
2021년에는 전체 귀농·귀촌인의 46.4%가 여성이었고, 그중 절반 이상이 청, 중년층이었다.
특히 최근 여성 귀농·귀촌은 1인 가구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고, 여성 동반 인원 비율은 감소하는 추세라 했다.
농촌경제신문은 이 현상을 ‘여성 주도적 귀농·귀촌 성향이 증가한 것’이라 분석했다.
나 또한 제주에 정착하고 싶어서 기어이 짐 싸서 제주로 오는 여성들을 계속 마주하고 있다.
정착 청년 지원 활동 중인 나는 ‘그렇다면 여자 혼자 시골에서 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어떤 안전망이 필요한가?’를 고민하게 됐다.
나처럼 좋은 게 좋은 무딘 사람, 공간과 관계에 있어 자기 기준이 있는 사람도 모든 상황에 주도권을 가지고 잘 대응하는 건 아니니까, 막 이주해서 공간이 낯선 이들은 사는 게 더 힘들겠지, 싶어서. 용기 내서 자기 뿌리를 뽑아 이주했는데, 상처받아 정착하지 못하면 뿌리가 약해져 여기저기 떠돌 수도 있으니까. 그걸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안전망을 만들고 싶었달까.
올해 2~3월 진행된 ‘일상 대응력 향상 훈련’ 중에서, ‘젠더 기반 폭력’(Gender Based Violence)에 대해 이해하는 시간. (제주여민회2030위원회 제공)
그러다 여성주의 자기방어 훈련 강사, 신율 씨를 만났다.
그는 3년 전 제주 읍면지역에 이주한 여성청년 당사자이고, 제주여민회 성평등교육센터 강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가 자기방어 훈련에 나선 이야기로 ‘사람책’ 강연을 했는데, 우연히 듣게 되었다.
강연 후, 2시간짜리 미니 워크숍까지 진행했는데 속이 다 후련하고, 만나야 할 것을 만났다는 기쁨에 사로잡혔다.
그는 신체적, 언어적 경계 침해 대응을 다각도로 제안하는 일을 수년째 해오고 있었다.
몇 년 전엔 미국에서 여성주의 자기방어 훈련을 수료하고, 심리-코칭-호신술을 넘나들며 자기만의 길을 걷고 있다고 했다.
일상 속 다양한 젠더폭력에 대한 대응력 향상 프로젝트
신율 씨와 나는 둘 다 제주여민회 활동 회원이었고, 제주여민회 또한 5년간 성평등 마을 조성 사업을 하며 읍면지역 성평등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고 있었기에 모두 뜻을 모아 일을 도모했다.
농촌 페미니즘 프로젝트! 우리는 ‘시골은 중간 지대가 많다, 네 공간과 내 공간이 명료하지 않고, 살아온 역사만큼이나 몸과 관계의 경계가 다른 어르신 세대와 함께 그 중간 지대에서 살아가야 한다, 마을에서 일상적 젠더폭력에 대한 일상 대응력을 향상시키자, 그것이 시골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사는 길이기도 하다!’고 의견을 모으게 되었다.
한국여성재단 젠더폭력 대응활동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자원이 생긴 것도 큰 동력이 됐다.
한국여성재단은 사회적으로 인식되지 않던 젠더폭력의 범위를 넓히기 위해 젠더를 바탕으로 발생하는 다양한 형태의 폭력(Gender Based Violence)에 대응하는 활동을 지원 중이다.
젠더 기반 폭력(Gender Based Violence)이란, 성별, 성적 지향 또는 성 정체성으로 인해 개인이나 집단에 가해지는 모든 유형의 피해다.
이는 권력 불균형에서 기인하므로, 성적, 신체적, 언어적, 심리/정서적, 또는 사회경제적 폭력 등이 될 수 있다.
지원사업 요건에 맞춰 우리의 기획을 정교하게 다듬었다.
1단계: 시골의 중간 지대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젠더폭력 상황을 유형화하고, 2단계: 이에 대응하는 시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3단계: 전국 성평등 주체들 70여 군데에 배포할 매뉴얼까지 개발하는 것이 우리 프로젝트의 골자가 됐다.
보이지 않던 읍면지역 여성들과 만나고, 소중한 경험을 나누다
여성 청년들이 겪고 있는 갈등과 불안 알게 돼
젠더폭력에 대한 ‘일상 대응력 향상 훈련’ 참여자들이 각자의 경계를 섬세하게 느끼며 접근하고 있다.
(제주여민회2030위원회 제공)
이제 훈련 참가자들을 기다릴 차례. 2월부터 5월 현재까지 2개 읍면에서 8주차 훈련을 했고, 대상자 특성에 따라 1주차 간단 훈련도 진행하며 22명의 여성들을 만났다.
아이들을 제주에서 뛰놀게 해주고 싶어 이주한 양육자, 초기 정착 청년 세대, 페미니스트 정체성이 뚜렷하지만 지역에서 고요히 살던 토박이 중년 세대, 정체성은 모르겠지만 일상 대응 역량을 강화하고픈 욕구를 가진 사람, 은둔 고위험군 읍면 여성 청년이 주를 이뤘다.
부녀회, 운영위원회 등 마을 대표기구 활동을 이어가는 사람은 1명뿐이었다.
그간 지역사회 여성 활동에서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진짜 나오고 있구나, 내심 기뻤다.
첫 주에는 자신의 젠더폭력 경험을 나눴고, 2주차부터 경계 존중, 자기방어 훈련에 집중했다.
마지막 주엔 대응 시뮬레이션을 했는데, 참여자들 간 친밀감, 신뢰가 형성되어 서로의 대응에 조언을 얹기도 했다.
모든 훈련이 종료되면 만족도를 체크하는데, 참여자들은 ‘매주 모여서 한 주간의 대응 경험을 나눈 것’과 ‘자신의 경계를 확인한 훈련’이 가장 좋았다고 꼽았다.
나는 이 프로젝트의 기획팀이자 보조강사지만, 개인으로서의 나도 그 시간이 가장 좋았다.
프로젝트 기획 의도와는 다른 맥락도 자주 포착됐는데, 젠더폭력이라 할 수 없는 일상 속 작은 갈등이나 사건에 대응하지 못해 자책하거나 회피하는 여성 청년들을 발견한 것이다.
쓰지 않아도 되는 쿠션어를 정성 들여-길게 쓰고 타인의 감정까지 자신이 책임지려는 모습들을 보면서, 불안 사회의 한 모습인가 싶어 마음이 아렸다.
이건 프로젝트의 향후 과제이자 활동 가능성을 의미하기도 해서, 프로젝트가 끝나면 좀더 들여다보기로 했다.
일상 대응 스펙트럼을 넓혀, 성평등한 시골을 만들어가는 꿈
일상 대응 스펙트럼을 넓히려는 이 프로젝트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7월 중순까지 다른 2개 읍면지역 장기 훈련이 확정되었고, 제주시 시내권 여성들의 성화에 못 이겨(?) 도시에서 훈련도 한다.
훈련 방식과 성과를 담은 매뉴얼은 한국성폭력상담소, 충북여성재단에서 앞서 발간한 자료와 해외 것들을 참고하여 작성하고 있는데, 고민이 깊다.
지역 성평등 주체들이 진짜 훈련을 열 수 있도록 ‘활용되는 자료’를 내기 위한 고민이다.
제주에서의 서툰 시도가 전국 시골 구석구석 성평등 실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면 한다.
매뉴얼에 실어 보낸 우리의 진심이 결국 시골에서 살고픈 당신에게까지 닿아서, 당신도 시골에서 영화처럼, 축제처럼 살았으면 좋겠다.
당신답게.
[필자 소개] 은영
. 제주여민회2030위원장. 성공한 제주 덕후. 제주에서 재미있는 일, 선의를 나누는 일이라면 뭐든 한다.
제주여민회 정책위원이자 2030위원회 위원장. 국내 유일(?!) 여성 바투카다 밴드 블로꾸 자파리를 만들어 뚱땅대며 산다.
서귀포에 기숙형 청년 시민학교 ‘신술목학교’를 개교했고, 운영 책임을 맡고 있다.
시골에 살고픈 당신에게 필요한 자기방어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