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노동기] 전화상담 보험 설계사의 노동
나는 전화상담 보험 설계사다.
재택 근무를 할 때 쓰는 책상 (필자 제공)     오늘은 평소보다 더 버거운 날이었다.
  따르릉. 전화벨이 울린다.
“방송 보시고 보험 상담 요청하셔서 전화드렸습니다.
〇〇생명입니다.
통화 괜찮으실까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멘트였다.
수화기 저편에서 상대가 물어왔다.
“몇 분 걸립니까?” 귀찮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 목소리다.
“상담은 십 분 정도 걸리고 청약까지 하신다면 15분 정도 더 걸리십니다.
” “계약은 안 할거구, 말해보쇼.”   순간 기분이 다운됐다.
처음부터 계약은 안 할 거라고 대놓고 말하는 고객은 흔치 않다.
아무래도 사은품을 받으려고 온 고객인 듯했다.
그래도 고객에게 적합한 상품을 열심히 설명했다.
“갱신형 상품을 먼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 9분쯤 지났을까. 상대가 말을 끊었다.
“아, 안 해. 이제 10분 된 거요?” 사은품을 위해 상담 신청을 한 고객이구나. 확신을 넘어 사실이 되었다.
상대는 내게 묻지도 않고 사은품 받을 주소를 부르더니 전화를 끊었다.
사은품만 바라고 들어오는 고객을 상대하는 일은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오늘은 예의 없는 태도가 겹쳐 기운이 더 빠졌다.
  보험 회사는 방송으로 광고를 하고, 광고 끝에 상담만 해도 사은품을 증정한다고 강조한다.
어느 보험사나 마찬가지다.
회사는 사은품이라는 유혹에 끌려 상담을 받으러 자신의 연락처를 남기는 사람들이 예비 고객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이중 일부는 설계사를 몹시 힘들게 한다.
시간만 때우다가 사은품만 받겠다는 의도를 대놓고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런 고객일 수도 반말이 잦고 짜증을 부릴 가능성이 컸다.
  나이 앞에서 학력도, 경력도, 성실함도 소용없었다   전화로 상담을 하는 보험 설계사 일을 하기 전엔, 26년간 영어를 가르쳤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좋아했다.
일단 보람이 있었다.
점점 성장하는 아이들을 통해 느끼는 뿌듯함이 있었고,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보내는 따스한 눈빛도 좋았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나는 나이가 많은 사람이 되었다.
  예순이 되자, 아이들의 학부모도 내 딸뻘이 되었다.
아이들을 가르치기에 나이가 많다는 생각이 들어 일을 그만두었다.
고령화 사회라고 하지만, 정작 나이가 든 사람들이 일할 수 있는 기회는 너무도 적었다.
새로운 일을 구하기 어려웠다.
30년 가까이 일한 경험은 나이 앞에서 소용없었다.
학력도, 경력도, 성실함도 다 소용없었다.
  많은 보험 회사에서 자사 보험을 광고하며 상담만 해도 사은품을 증정한다고 강조한다.
그 유혹에 끌려 상담을 신청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설계사를 몹시 힘들게 한다.
    그러다가 전혀 다른 분야인 보험 설계사 콜센터 일을 소개받게 됐다.
운이 좋았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 경험이 전혀 없고 나이까지 많은 사람이 이 일로 이직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운 좋게 얻은 직장이지만 처음에는 힘들었다.
설계사 자격증을 따고 팀에 배치되었을 때 팀장과 고참들의 텃세로 인해 고생을 꽤 했다.
게다가 첫 콜(상담 전화)을 할 때 얼마나 떨리던지. 그 떨림이 무색하게도, 전화로 음담패설을 하는 사람까지 겪었다.
한 달도 되지 않아 그만둘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후 팀을 새롭게 만나 적응하여 이제 이 일도 7년째다.
평생 해본 적 없는 일이지만, 성실이 몸에 밴 성격이라 입사한 지 얼마되지 않아 신인상도 받았다.
나이가 들었다고 일을 못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보람은 없다.
  보험 회사의 경쟁적 광고…사은품만 노리는 고객들 많아 계약해지에 따른 손실은 프리랜서 설계사들의 몫   내가 진심으로 고객에게 필요할 것 같은 보험을 권해도, 그들은 내가 영업을 위해 상술을 부린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보험료를 대신 내주면 보험 가입을 하겠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일부 설계사들이 그런 식으로 성과를 올린다는 걸 들은 모양이다.
그런 부당한 편법을 당연하게 요구하는 말을 들으면 기운이 빠진다.
  이 일을 하려면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수화기 너머로 만나야 하고, 그때마다 받는 스트레스는 지금도 어마어마하다.
그중 최고로 스트레스를 주는 건, 대놓고 사은품만 바라는 사람들이다.
사은품을 안 준다고 쌍욕을 하는 고객도 있고(그들은 너무 많은 사은품을 받았기에 회사 지침에 따라 줄 수가 없다), 사은품 때문에 민원을 거는 고객도 있다.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 상품 계약을 하고 나면, 이제는 타사와 경쟁을 해야 한다.
우리 회사만 광고 방송을 하는 것이 아니라서 고객은 여러 곳에 상담 신청을 해둔 상태다.
이미 보험 계약(청약)을 했다고 해도, 다른 회사 설계사와 상담을 하고 난 후 고객의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고객이야 자신에게 더 잘 맞는 보험을 찾아가는 것이 당연하다.
문제는 계약 해지에 따른 보험 수수료 감액이 크다는 것이다.
  프리랜서인 설계사들은 기본급이 거의 없고, 임금은 청약에 따른 수수료로 결정된다.
그런데 가입한 고객이 중간에 계약을 해지하면, 그로 인해 회사가 받지 못한 보험료는 고스란히 우리 통장에서 빠진다.
우리는 인바운드(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것) 상담사인지라 고객이 전화를 걸어 상담을 요청하지 않은 한 추가적인 영업을 할 수도 없는데, 해지에 대한 책임은 고스란히 설계사의 몫이 된다.
  심지어 이 수수료 체계는 점점 더 상담사에게 불리해지고 있다.
내가 처음 입사할 때는 계약을 3개월까지 유지하지 못한 고객의 상품에 대해서만 손해를 물었다면, 지금은 그 기간이 12개월 넘게 늘어났다.
한 명의 고객이 보험 계약을 해지하면, 담당 설계사는 일 년 내내 손해를 보아야 하는 거다.
그러니 경력이 늘어도 월급은 더 형편없어졌다.
아침 9시경에 컴퓨터를 켜고 오후 6시까지 일을 한다.
때로 주말이나 휴일에도 근무한다.
회사원으로 치자면 8시간 넘게 일을 하는 건데, 요즘은 최저시급에도 못 미치는 월급을 받고 있다.
  매일 출근하지만 4대보험도, 퇴직금도, 실업급여도 없는   ‘나의 노동기’를 쓰며 지난 35여 년 내가 해 온 일을 생각해보았다.
단 하루도 빠짐없이 성실하게 일했는데, 한 푼의 퇴직금조차 받아본 적이 없다.
고용된 직원이 아니니 실업급여도 신청할 수 없다.
첫 번째 직장도, 지금 이 일도 모두 프리랜서-특수고용직이다.
나는 나라에서도, 회사에서도 어떤 보장도 받지 못한다.
매일 출근하지만 4대 보험을 들 수 있는 직장인으로 고용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람도 없는 일을, 그러나 오늘도 한다.
생활을 해야 하니까. 그리고 열심히 한다.
왜?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왜 그렇게 하는 거지? 왜냐하면, 내 삶의 가치가 일에 있으니까. 작은 일을 하더라도 성실하게 하고 싶고, 사람들에게 좀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일을 하고 싶으니까.
임금 줄어드는 일자리, 보람 느끼기 힘들죠